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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만 280번…"어떻게 돼가죠" 판사들에게도 잊혀진 재판 [현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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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검사가 화면에 띄운 서류 내용을 그대로 읽는데 일부는 예전에도 봤던 문건이다. 증거순번이 1만 번을 넘는지라 서둘러야겠으나 마스크 속 작은 목소리는 옆 법정에서 시원하게 다투는 소리에 묻힌다. 피고인석 2열에 앉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은 가끔만 눈을 뜬다. ‘사법농단’이라는 거대 의혹 속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되고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압수수색하는 등 초유의 수사 끝에 시작한 재판은, 네 번째 해넘이 후 이런 모습이 됐다. 복습할 서류가 남지 않자 쟁점별로 검찰과 피고인 의견을 듣는 ‘종합정리’에 석 달을 더 썼고 이번 달은 증언을 거부하는 증인을 신문하는 데 쓴다. ‘세기의 재판’이 ‘세기의 재판 지연’이 되는 사이 언론과 사회의 관심도 멀어졌다.

“이런 이야기 정말 오랜만에 하네요.” 판사들에게 이 사건은 책장 한 켠 먼지 쌓인 형사소송법 교과서 같은 존재다. 한 때 열심히 봤지만 이젠 들여다보지 않은 지 오래된,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책이다. 도리어 “그 재판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기자에게 묻는 판사도 있다. 지난 9일까지 267차 공판, 중간에 또다시 열린 공판준비기일까지 합하면 280번 재판을 했는데 결심 날짜는 아직도 정해지지 않았다. 법원 안팎에선 “양 전 대법원장 등은 지금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내에서 선고를 받고 싶지 않을 것” “재판부도 부담스러울 텐데 굳이 9월 전에 선고하겠느냐”는 얘기가 나온다.

 ‘국정농단’이 “이게 나라냐”를 번역한 것이듯 ‘사법농단’은 “이게 사법부냐”는 말이고 이 재판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정부(법무부) 소속인 검찰과 달리, 법원은 삼권 중 하나인 사법부 그 자체다. 법원행정처는 기능적·당위적으로는 법관들의 재판을 지원하는 백오피스지만 실질적으론 법관들의 ‘윗선’으로 기능해 왔다. 판사들 사이에서 “행정처에서 전화 온다” 는 농담은 어린아이에게 “경찰 아저씨가 잡으러 온다”랑 같은 의미였다. 행정처를 양적·질적으로 축소하고 법원에 수평적 문화를 도입한 김명수 대법원장 덕에 이런 말은 옛 이야기가 됐지만, 그런 그조차 직권남용으로 수차례 고발당한 현실은 사법행정권의 경계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법조인들 사이에서 “연수원 때 시험 문제로 나오면 정답은 무조건 불기소·무죄”라는 데이터에 기반을 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우리 법원이 거의 다뤄보지 않은 죄목이었다. 국정농단 이후 관련 재판이 크게 늘었고 그때마다 해석은 논란이었다. 재판 개입에 대해서도 “부당하거나 부적절한 재판관여행위지만, 월권행위는 직권남용죄가 아니다(지난해 4월, 대법원 소부)”는 해석과 “지적 권한의 월권적 남용이며 직권남용에 해당한다(2021년 3월, 서울중앙지법)”는 해석이 있다.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 법원행정처장에 대한 재판은, 과거 그들의 행태를 평가하는 형사재판의 형태를 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법행정의 범위와 한계를 획정해 향후 법원행정처에 대한 부표가 될 것이다. 법원행정처가 국회·정부를 상대하는 프런트 오피스로 기능하려다 생긴 문제들의 배경엔, 삼권 중 유일하게 법안 발의권이 없는 사법부로선 (법 개정이 필요한) 큰일을 하려면 입법·행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단 현실이 있다. 재판 적체 문제를 두고 양 전 대법원장은 상고법원법 도입을 위해 ‘비상적 대처’에 나섰다 탈이 났고, 김 대법원장은 판사 수 증원으로 해결하려 한다지만 역시 법 개정에 막혀 있는 상황이다. 재판 지연 문제가 극도로 심각해진 상황에서 3개월 뒤 새 대법원장에게 넘겨질 과제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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