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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4개'를 밥처럼 먹는 할머니…정작 중요한 약은 빠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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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신성식 기자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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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에서 두 마리의 강아지와 지내는 한 노인이 약 봉지를 만지고 있다. 언뜻 봐도 약이 많아 보인다. 연합뉴스

지난 5월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에서 두 마리의 강아지와 지내는 한 노인이 약 봉지를 만지고 있다. 언뜻 봐도 약이 많아 보인다. 연합뉴스

경북에 사는 독거 여성 A(77)씨는 당뇨병·심부전·과민성 대장증후군·위식도역류병·경추간판장애 등을 앓고 있다. 대학병원 2곳, 동네의원 3곳에 다닌다. 대학병원에서 통증조절·당뇨병·심부전증 등의 6개 약을, 동네의원에서 고지혈증·과민성대장증후군·감기 등의 약 11개를 타서 먹는다. 출처 불명의 기침감기약 등 3개, 의사 처방이 필요 없는 일반약(잇몸약·진통제·변비약 등) 6개, 홍삼·양파즙·벌꿀화분·아마씨 등 건강기능식품 8개를 먹는다. 모두 34개이다. A씨는 설사·변비가 반복되자 마음대로 약을 먹었고 복통에 시달렸다. 진통제는 처방약과 일반약을 동시에 먹었다. 건강보험공단이 여러 약물 관리사업의 일환으로 A씨와 약사회를 연결했다. 건보공단 한주성 과장(약사)은 "A씨가 한 번에 8~10개의 약을 먹었고, 어떤 때는 4~5개를 더 먹었다. 건기식도 8개를 먹었다"며 "밥보다 더 배부를 것 같다"고 지적했다.

약 한뭉치 복용 노인 117만명
10~30개 약을 하루 7회 복용
낙상·의식소실로 급격히 쇠약
"의사의 약물정리 지원 절실"

 지역약사회 약사는 A씨에게 "배가 아프면 의사에게 변비약을 바꿔달라고 요청해라"고 주문했고, 약을 바꿨더니 복통이 줄었다. 요통약(일반약) 복용은 중단했다. 정작 필요한 심장병 약 2개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먹지 않았는데, 꾸준히 먹게 됐다. 동네의원 2곳은 안 다니게 됐다. 약 6개, 건기식 2개를 줄였다. A씨 집에는 짜 먹는 위장약을 비롯, 유효기간이 경과한 약이 10개 넘게 있었다. 이런 것도 수시로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박지영 건보공단 만성질환관리실장은 최근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이사장 김용익) 주최 국회 토론회에서 '다제약물 관리사업 경험과 추진 방향'을 발표하면서 A씨 사례를 공개했다.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약을 먼저 찾는다. 아프면 약으로 우선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정 교수는 "최근 퇴원한 환자는 "오전 7시, 8시, 아침식사 후, 점심 직후, 오후 4시, 저녁 직후, 자기 전에 약을 먹는다"고 소개했다. 건보공단은 만성질환 환자가 10개 이상 뭉치 알약을 60일 이상 먹는 경우를 여러 약물 복용자로 본다. '뭉치 복용자'는 지난해 117만5130명이다. 매년 는다. 20개 넘게 먹는 사람이 약 3만명이다. 75세 이상 환자 중 뭉치(약 5개 이상 90일 이상 복용) 복용 노인의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47%이지만 한국은 70.2%이다.

소득 높을수록 뭉치 약물 더 복용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소득이 높을수록 많다. 117만여명을 건강보험료 1~10분위(10분위가 가장 높음)로 나눴을 때 10분위, 9분위, 1분위 순으로 많다. 2분위에서 10분위로 올라갈수록 뭉치 복용자가 증가한다. 고소득층(8~10분위)이 저소득층(1~3분위)의 2.3배에 달한다. 건보공단은 "고소득층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의료 쇼핑'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혼자 사는 사람도 26%에 달한다.
 뭉치 약 복용의 대표적 부작용은 신체와 인지 기능 저하, 약물 상호 부작용 등이다. 제주대병원 한지윤 팀장과 박은옥 제주대 간호대 교수 연구(노인 285명 대상, 노인간호학회지 게재)에 따르면 하루 5개 이상 약을 먹는 노인의 72%, 3~4개 약 복용자의 54%가 낙상 경험이 있었다. 안 먹는 사람(18.9%)보다 월등히 높다. 건보공단은 부적절한 여러 약물을 복용하면 입원·사망·응급실 방문 위험이 1.32~1.35배 높다고 경고한다. 정희원 교수는 "컨디션이 나빠져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낙상·요로감염·소변 막힘·의식소실·섬망 등이 찾아오고 급격히 노화가 진행돼 요양병원 신세로 전락한다"고 경고한다. 어떤 노인은 '노인 부적절 약제'인 벤조다이아제핀 계열 약과 삼환계 항우울제 약 등을 먹고 심하게 졸림 증세를 겪다가 낙상해 고관절이 골절됐다.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또 다른 부작용은 약이 약을 부르는 '처방 폭포(prescribing cascades)'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노인의 부적절한 다약제 사용 관리 기준 마련' 보고서를 보자. B(82)씨는 전신이 쇠약해져 석 달 간 체중이 5㎏ 빠졌다. 골다공증으로 인한 척추 압박골절, 다리 부종(부은 상태) 등으로 휠체어 신세를 졌다. 심장비대증도 앓았다. 압박골절 통증을 줄이려 처방한 소염진통제 때문에 폐에 거품소리·쌕쌕거림 증상이 생겼다. 다른 병원에서 천식약을 처방하자 다리 부종이 악화했고, 소변이 줄어 이뇨제를 투여했다. 그러자 전해질이 악화하고 전신상태가 크게 나빠졌다. 다른 데서 영양제를 주사하니 부종이 더 나빠졌다. 진통제를 마약성 진통제로 바꾸고 천식 흡입기 약 등을 중단하면서 호전됐다.

경북 77세 여성 집에서 수거한 유효기간 지난 약. 열 가지가 넘는다. 사진 건보공단

경북 77세 여성 집에서 수거한 유효기간 지난 약. 열 가지가 넘는다. 사진 건보공단

줄이는게 능사 아냐,적정관리 중요 

 약을 많이 먹으면 안 좋지만 그렇다고 복용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부작용이 있어도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김광준 신촌세브란스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무조건 약을 줄이는 게 능사가 아니라 의료진과 적극적으로 소통해 상태에 맞게 약이 중복되지 않아야 하고, 부작용을 고려해 적절하게 관리하는 게 중요하다"며 "노인전문 약사제도를 도입하거나 노인 포괄평가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희원 교수는 "20~30분 노인 환자를 자세히 진료하면서 약 이력을 정리·조정하고 교육할 수 있게 수가가 지원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익 이사장은 “노인의 다제 약물을 관리하려면 의사와 약사가 환자 집을 방문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진다. 의사와 약사의 협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단골약국·단골약사를 두고 환자 복약정보를 일원화해서 관리한다. 대만은 메디클라우드 시스템을 통해 의사가 환자 기록을 조회해서 치료하고 처방한다. 약사도 조회해 조제와 상담에 활용한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신성식 복지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