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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병주의 시선

김명수 대법원장의 마지막 제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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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문병주 논설위원

헌법 해석이 논란이다. ‘특혜 채용 의혹’에 휩싸인 선거관리위원회는 감사원의 감사를 일부 받아들였다. 하지만 감사원의 직무를 규정한 헌법 제97조를 앞세워 원칙적으로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여전히 주장한다. 결국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리게 됐다. 대법관 제청과 임명에 대한 제104조 2항을 두고선 대통령에게 임명 거부권이 있는지 문제가 됐다. 임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상 초유의 가능성도 제기됐다.

파문을 일으킨 건 익명으로 전해진 대통령실 관계자들의 발언이었다. 다음달 퇴임하는 박정화·조재연 대법관 후임 후보로 지난달 30일 8명이 추려지자 일부 후보자가 제청될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헌법이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는데,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을 권한도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반면 이 조항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대통령에게 형식적 임명 절차를 부여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많았다. 제청 과정에서 절차적 하자나 후보자에게 결격 사유가 없는 한 대법관후보추천위, 그리고 대법원장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대법관 임명을 거부한 전례는 없다. 외부로 갈등이 표출되기 전에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후보자 논의를 해 온 게 관례였다고 한다. 지난해 김재형 전 대법관 후임으로 오석준 대법관을 제청할 때도 괜찮았는데, 왜 하필 이번에만 파열음이 들린 것일까.

9월 퇴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마지막으로 제청하는 대법관 명단에 자신의 코드에 맞는 인사를 올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퇴임 후에도 당분간 대법원 성향을 전 정부와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지속시키겠다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과 함께였다. 남녀 성비를 고려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고려한 특정 후보자들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실은 물론 법원 내부에서조차 소통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법원 내부망에는 ‘후보추천위에서 의견을 나누거나 토론하는 과정은 없었고 찬반 표결을 통해 후보자들을 정했다’는 소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글까지 올랐다. 대통령실이 불편해한다는 두 명 대신 권영준 서울대 로스쿨 교수와 서경환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제청되면서 임명권 갈등은 봉합된 모양새다. 하지만 헌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헌법 조항을 앞세운 부담은 대통령실에 남아 있다.

대법관 임명 거부권 첫 제기돼
대법원의 정치 코드화가 문제
사법부 정체성 고민 계기 돼야

김 대법원장은 더더욱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법원이 전 정권의 뜻대로 움직이는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대표적인 게 2018년 사법부 70주년 기념식 행사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을 대법원으로 초청해 “촛불 정신을 사법부도 무겁게 여겨달라”는 식의 그의 당부에 “국민주권을 회복했다”고 화답했다. 임기 중 제청한 대법관들 상당수가 이런 그의 생각을 반영한 인사들 아닐까.

현재 대법원은 김 대법원장과 13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오석준 대법관을 제외하고 모두 문재인 정부 때 임명됐다. 김 대법원장이 회장을 지낸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 6명이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과 젠더법연구회 회장 출신이 있다. 다음달 퇴임하는 박정화 대법관도 우리법연구회 소속이었다. 박 대법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김 대법원장이 제청했다. 임기 중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지막 대법관 교체를 앞두고 ‘알 박기 제청’을 통해 대법원의 구성을 당분간 현 구도로 유지할 것이라는 예상이 확산했다. 대법원까지 가게 될 중요한 재판들이 줄줄이 진행되거나 대기 중인 점을 고려하면 현 정권으로선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그에 따른 판례 변경 등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의 성향에 따라 구성원이 바뀌고, 그 변화에 따라 기존 기준과 다른 정치 성향적 판례가 자꾸 나온다면 누가 사법정의를 믿겠는가. 치킨게임 같았던 대통령실과 대법원의 대법관 제청 갈등은 지난 6년간 진행된 사법부의 정치코드화와 그 파급을 되돌아볼 계기를 준 긍정적 측면이 있다. 윤 대통령과 9월 퇴임하는 김 대법원장을 대체할 차기 대법원장에게도 큰 과제를 각인시켰다.

윤 대통령 임기 중 대다수의 대법관이 임기 만료로 교체된다.  2021년 9월 임명된 오경미 대법관과 지난해 임기를 시작한 오석준 대법관을 제외한 전부다. 정치 성향이 아닌 법과 사실에 근거하고 양심에 따라 재판할 수 있는지가 명확한 후보자 기준이 된다면 사법의 정치코드화 악순환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