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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YS는 눈물 회동도…지금 여야는 밥도 토론도 나몰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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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어린이 안전 헌장 선포식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어린이 안전 헌장 선포식에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여야 수뇌의 ‘회동 가뭄’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취임 이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따로 회담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가 물러난 뒤 지난해 8월 이재명 대표가 취임한 뒤에도 국가 기념일 행사장 같은 곳에서 마주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회담 테이블에 마주앉은 적은 없다.

여야 대표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3월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당선된 뒤 이재명 대표를 찾아가 당선 인사를 한 적은 있지만 그 뒤로 제대로된 회동 자리는 성사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두 사람이 만난다, 안 만난다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장면만 계속해 노출되고 있다. 민주당에 따르면 지난달 초 김 대표가 먼저 이 대표에게 비공개 만찬을 제안했지만 이 대표는 ‘공개 정책 대화를 하자’며 한 차례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김 대표는 지난달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13주기 추도식에서 이 대표에게 재차 비공개 식사 회동을 제안했다. 이 같은 사실이 지난달 25일 국민의힘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공개되자 곧바로 다음날 이 대표는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밥 먹고 술 먹는 것은 친구분들과 하라”고 받아쳤다. “공개적인 정책 대화는 언제든지 환영한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러다 최근엔 두 대표의 TV토론이 성사되는 듯했지만 이 또한 안갯속이다. 실무협의가 시작됐지만 논의는 2주 째 멈춘 상태다. 그러자 이 대표는 지난 7일 최고위에서 “국회 로텐더홀에 의자, 책상 하나 놓고 만인이 보는 가운데 허심탄회하게 대화하자”며 ‘공개 토론’을 거듭 주장했다. 반면 김 대표는 “(이 대표가) 자꾸 대화는 안 하고 논쟁만 하자고 하니까 답답한 노릇”(8일)이라거나 “TV토론은 자기 주장만 하니까 더 세게 붙는다. 협상하자는 게 아니고 싸우자는 것”(9일)이라며 이 대표의 저의를 의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 대통령과 이 대표의 회동도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 대표가 여러 차례 제안한 이른바 ‘영수회담’에 대해 대통령실과 여당은 “범죄 피의자와 단독 회담은 적절치 않다”며 거절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통령실이 야당과 대화를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과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가 함께 보는 3자 회동에 대해선 적극적이다. 그래서 대통령실은 박 원내대표에게 이같은 회동을 제안했지만 박 원내대표는 “당 대표와 먼저 만나는 게 순서”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과거에도 이랬을까. 정치권에선 “지금이 비정상”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특히 ‘영원한 라이벌’로 불린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활발한 교류가 자주 회자된다. 1990년 10월 당시 평화민주당(평민당) 대표였던 DJ가 지방자치제 무산과 내각제 개헌 추진에 반발하며 단식에 들어가자 3당 합당으로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를 맡고 있던 YS가 DJ를 찾아가 단독 회담을 가졌다. YS는 회담 직후 “우리가 정치를 복원하는 일을 하자, 거기에 대해선 똑같은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시절이던 1990년 10월 11일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평민당 총재)를 전격 방문해 단독 회담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시절이던 1990년 10월 11일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평민당 총재)를 전격 방문해 단독 회담했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대통령과 야당 총재로, 또 대통령과 당선인으로 수차례 회담했다. 특히 YS와 DJ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취임 전까지 1달 반에 걸쳐 주례회동을 가지며 정국 현안을 논의하고, 대통령 직무를 인수인계했다.

역대 여야 대표는 카메라가 있는 곳과 없는 곳에서의 행동이 달랐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물밑에선 활발히 협상을 시도하고 움직였다. 그래서 군사 정권 시절에도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나는 ‘영수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될 때 더 진솔한 대화가 오가곤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5년 5월 신민당 총재였던 YS를 대통령 집무실로 불렀다. YS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따르면 YS는 이날 1년 전 타계한 육영수 여사에 조의를 표했고,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창밖의 새를 가리킨 뒤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005년 9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만나 ‘대연정’을 제안한 것 역시 유명한 사례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장은 “여야 대표가 만나는 것 자체가 협치를 보여주는 정치적 메시지인데, 현재로선 양당 대표 모두 만나서 서로 주고받을 게 딱히 없는 상황”이라며 “국민적 압박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만남을 시도하는) 할리우드 액션을 하는 걸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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