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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유명강사 수업이 무료다…대치동 안부러운 '공립학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30일 전북 김제시 검산동에 위치한 '지평선학당'의 강의실에서 수업이 이뤄지는 모습. 이가람 기자

30일 전북 김제시 검산동에 위치한 '지평선학당'의 강의실에서 수업이 이뤄지는 모습. 이가람 기자

지난달 30일 오후 7시, 전북 김제시 검산동의 한 건물 앞에 노란색 셔틀버스가 멈춰 서더니 교복을 입은 학생 19명이 연이어 내렸다. 인근 덕암고와 김제고에서 수업을 마치고 왔다는 이들은 “영어 단어를 다 못 외웠다” “오늘 모의고사 문제풀이 하는 날인가?”라는 대화를 주고받더니 곧이어 건물로 들어갔다. ‘지평선학당’이라는 간판이 내걸린 이곳은 김제시가 운영하는 이른바 ‘공립학원’이다.

지방소멸 대안으로 떠오르는 ‘공립학원’

30일 오후 7시 전북 김제시 관내 고등학생들이 셔틀버스를 타고 '지평선학당'에 오고 있다. 이가람 기자

30일 오후 7시 전북 김제시 관내 고등학생들이 셔틀버스를 타고 '지평선학당'에 오고 있다. 이가람 기자

김제시가 직접 학원 운영에 나선 건 자녀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도권과 대도시로 이탈하는 행렬을 막기 위해서다.  2003년 전북 순창의 ‘옥천인재숙’에서 시작된 공립학원은 지자체가 강사를 직접 고용하거나 서울의 유명 입시학원과 계약을 맺어 무료로 수업과 대입 컨설팅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지방소멸 위기에 내몰린 다른 지자체들도 공립학원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전북 남원시와 경북 청도군 등에서도 관련 사업을 준비 중이다.

이날 찾은 지평선학당은 2층 규모 건물에서 125명의 학생이 8개 강의실로 흩어져 국어와 영어, 수학 수업을 듣고 있었다. 모두 김제 관내에 위치한 4개 고등학교와 8개 중학교에서 온 학생들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주 4일 방과 후 수업을 듣는다. 덕암고에 다니는 김모(17)군은 “중학교 2학년 때 학당에 지원했다가 떨어져 3학년 때 겨우 들어왔다”며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업보다 더 어렵긴 하지만 수준별 수업이 이뤄져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액 무료에 ‘기회균형’ 선발까지

30일 전북 김제시 검산동에 위치한 '지평선학당'의 모습. 김제시가 출연한 김제사랑장학재단이 현재 운영 중인 학당은 수업료가 무료인 공립학원이다. 이가람 기자

30일 전북 김제시 검산동에 위치한 '지평선학당'의 모습. 김제시가 출연한 김제사랑장학재단이 현재 운영 중인 학당은 수업료가 무료인 공립학원이다. 이가람 기자

지평선학당은 학기마다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는데, 올 상반기에는 140명 선발에 188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김제시 관계자는 “수업료가 전액 무료이고 서울의 유명 학원 강사들이 김제까지 내려와 수업하기 때문에 학생 수가 줄어드는 추세에도 학당에 들어오려는 경쟁률은 꾸준히 높다”고 했다. 입학 정원의 20%는 한부모 가정이나 기초생활수급자 등을 기회균형 전형으로 선발한다.

김제시는 직접 학원과 계약을 맺고 서울 등 전국에서 유명 강사를 초빙해 학생들을 가르친다. 종로학원은 국어·영어·수학·탐구 과목을 가르칠 총 15명의 강사를 김제시에 파견했다. 매년 소요되는 10억원가량의 사업 예산은 김제시의 장학재단 출연금과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최봉석 종로학원 영어 강사는 “오전에 목동 학원에서 재수생을 가르친 뒤 오후 3시에 출발해 6시쯤 김제에 도착한다”며 “서울과 달리 활기차고 발랄한 수업 분위기와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의 의지에 큰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고교 진학 앞두고 이사 가던 학생↓

30일 전북 김제시 검산동에 위치한 '지평선학당'의 교무실에서 종로학원 강사들이 수업을 준비 중인 모습. 이가람 기자

30일 전북 김제시 검산동에 위치한 '지평선학당'의 교무실에서 종로학원 강사들이 수업을 준비 중인 모습. 이가람 기자

학생들은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무료로 누릴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크게 만족했다. 금성중에 재학 중인 이모(14)군은 “유튜브에서 길거리 수학 문제풀이 챌린지라는 콘텐트를 즐겨 보는데 서울에 사는 또래 친구들이 벌써 고난도 수능 문제를 척척 푸는 걸 볼 때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며 “학당에서 서울 친구들 못지않게 수준 높은 강의를 듣고 학습관리를 받고 있어 대치동이나 목동이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김제여고에 재학 중인 김모(16)양은 “몇십만 원을 줘야 하는 대입 컨설팅을 김제에서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혜택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평선학당은 인재유출의 원인으로 지목된 고교 진학 분위기도 바꿔 놨다. 학당 관계자는 “그동안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은 고교 진학에 앞서 전주로 이사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평선학당에서도 서울대 진학 등 우수한 대입 실적이 꾸준히 나오면서 전주의 명문고로 굳이 가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지평선학당이 문을 연 2008년에 성적이 우수한 중학생의 관내 고등학교 진학률은 22.3%에 불과했지만, 이후 꾸준히 상승하며 올해 75.2%를 기록했다. 과거엔 인재 10명 중 8명이 고교 진학을 앞두고 김제를 떠났다면 이제는 그 숫자가 3명 미만으로 줄었다는 뜻이다.

“학습 평등권 침해” vs “농촌교육 현실 외면”

공립학원이 학습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있다. 지자체가 명문대 진학 실적을 내고자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구조가 ‘소수를 위한 특혜’라는 것이다. 2008년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공립학원인 ‘옥천인재숙’을 운영하던 순창군수에게 “자치단체가 성적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해 학원을 운영하는 것은 평등권 침해이고 비입사생 대다수의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향유할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개선 권고를 내리기도 했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장은 “지역 공립학원을 통해 육성한 인재는 지역에 정주하지 않고 대학서열의 상위에 위치한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고 전체 고용 구조를 볼 때 취업도 수도권 소재 기업으로 하게 된다”며 “결국 오히려 지역인재 유출을 가속하는 정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립학원을 준비 중인 한 지자체 관계자는 “공립학원이 사교육비 부담을 줄여주고 중·고교생 학부모를 고향에 계속 거주하게 하는 유인이 분명 있다”며 “학생들이 서울 소재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진학 실적이 우수한 지역 명문고를 육성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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