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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포퓰리즘보다 개혁…그리스 선택이 한국의 롤 모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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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리스 총선, 복지 개혁 이뤄낸 여당의 압승

연금·노동·교육 개혁만이 한국 경제 살길

지난 21일 그리스 총선에서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신민주주의당(신민당)이 압승을 거뒀다. 신민당은 41%를 득표해  알렉시스 치프라스 전 총리가 이끄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 20% 득표)을 압도했다. 신민당은 단독정부 구성이 가능한 과반(151석)에 5석이 못 미치는 146석 확보에 그쳤지만, 다음 달 말로 예상되는 2차 총선에서는 단독 과반 달성이 무난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스의 이번 총선은 과도한 정부 부채와 방만한 복지 속에서도 포퓰리즘이 판치는 여러 나라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는 2010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 등으로부터 3260억 유로(약 462조원)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유럽의 문제아’였다. 포퓰리즘 때문이었다. 무상교육·무상의료, 최저임금 인상 등 선심성 정책이 나라를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구제금융의 조건인 긴축과 공공부문 수술은 혹독했다. 연금 수령액을 대폭 삭감하고, 수령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올렸다. 2009년 90만 명이던 공무원은 2016년 67만 명으로 감축됐다. 공무원 평균연봉은 38% 줄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회생의 길로 접어든 그리스가 2019년 총리로 선택한 이가 미초타키스 현 총리였다. 그는 집권 후 긴축과 의료·연금 개혁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보험료를 석 달만 안 내도 의료 혜택을 끊을 정도로 무상과는 담을 쌓았다. 올해 최저임금은 2009년보다 28% 낮은 상태다. 그 결과 그리스의 국가부채는 2020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06%에서 지난해 171%로 낮아졌다. 법인세는 낮추고(28%→24%), 규제는 줄이고, 공기업은 민영화했다. 그러자 수출이 늘고 외국인 투자가 유입되면서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스 경제는 2021년 8.1%, 지난해 5.9% 성장률을 기록하며 ‘유럽의 기대주’로 살아났다.

총선 결과는 미초타키스 총리의 ‘그리스병 고치기’에 민심이 호응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더 눈길을 끈 것은 유권자들이 최저임금 14% 인상, 연금 수령액 7.5% 인상 등 야당인 시리자의 선심성 공약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포퓰리즘으로 나라가 거덜난 시절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선택이었다.

때마침 전직 부총리 등 경제 원로 31명이 한국개발연구원과의 인터뷰에서 연금·노동·재정·교육 개혁의 강력한 추진을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이동호 전 내무부 장관은 “정치적 생명을 걸고 연금개혁을 추진하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저출산·저성장 덫에 걸린 ‘한국병’을 치유할 길은 포퓰리즘과의 결별, 사회 개혁밖에 없다. 이 기회를 놓치면 한국 경제의 퇴보는 시간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