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화 같은 '엄마나무 가설' 틀렸다…영양분 나누기? 냉혹한 숲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식물 뿌리에 침투해서 자라는 곰팡이인 균근의 균사체. 균근은 식물과 곰팡이의 공생이다. [위키피디아]

식물 뿌리에 침투해서 자라는 곰팡이인 균근의 균사체. 균근은 식물과 곰팡이의 공생이다. [위키피디아]

식물 뿌리에 침투해 매우 가는 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곰팡이(균류)를 근균(根菌, mycorrhiza)이라 한다.
식물은 근균에게 광합성에서 얻은 유기물(탄소)을 제공하고, 근균은 식물에 물과 미네랄을 제공한다.

나무와 공생하는 이 근균이 땅속에서 넓게 퍼지면 여러 나무의 뿌리를 동시에 침투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이 보고되면서 1990년대 후반에는 '엄마 나무 가설(Mother Tree Hypothesis)'이란 게 등장했다.

엄마 나무가 주변에 자라는 어린 나무에 이 '공통 균근 네트워크(common mycorrhizal networks, CMN)'를 통해 영양분을 제공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학문적인 뒷받침 없이 학계에, 그리고 일반 대중을 사이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런 내용이 담긴 논문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마치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 자체가 지닌 매력 때문이었다.

스웨덴 연구팀 조목조목 반박 

엄마 나무 가설. 공여자인 엄마 나무가 균근을 통해 어린 나무에 영양물질을 제공해 잘 자라도록 도와준다는 가설이다. [자료: New Phytologist, 2023]

엄마 나무 가설. 공여자인 엄마 나무가 균근을 통해 어린 나무에 영양물질을 제공해 잘 자라도록 도와준다는 가설이다. [자료: New Phytologist, 2023]

스웨덴의 스웨덴농업과학대학과 독일의 게오르그-아우구스트 대학, 오스트리아 응용시스템 분석 국제연구소 등 연구팀은 최근 저명 식물학 저널인 '신진 식물학자(New Phytologist)'에 발표한 논문에서 '엄마 나무 가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연구팀은 기존 문헌을 찬찬히 살펴보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들은 우선 숲에서 가설을 설명할 현상을 관찰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었다.
큰 나무 주변 가까이에 어린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데, 이는 큰 나무가 드리운 그늘 때문이기도 하지만 땅속의 치열한 경쟁 탓이라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영양분이 극도로 부족한 스칸디나비아 소나무 숲에서는 지하 경쟁을 통해 묘목 형성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외생균근의 모양. 식물의 가는 뿌리보다 더 가는 균사체가 표현돼 있다.

외생균근의 모양. 식물의 가는 뿌리보다 더 가는 균사체가 표현돼 있다.

엄마 나무에서 영양분(유기 탄소)이 균근에게 가더라도 그게 어린나무에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다.

엄마 나무로부터 받은 영양분은 곰팡이 안에서 생화학 반응을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균류 세포로 들어온 6탄당은 즉시 곰팡이 특유의 트레할로스나 폴리올로 전환되는데, 이 형태로는 다시 식물로 내보낼 수 없다.
곰팡이가 아기 나무에 영양물질을 보내기 위해 트레할로스나 폴리올을 다시 6탄당으로 전환해야 할 이유도, 실익도 없다.

탄소 동위원소로 추적한 실험에서도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는 않았다는 게 논문을 쓴 연구팀의 판단이다.
동위원소로 표시된 물질이 아기 나무에서 검출됐다고 해도 그것이 여전히 아기 나무뿌리에 침투한 곰팡이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질소 동위원소로 추적했지만, 질소 성분이 전달된다는 증거도 찾기 어려웠다.

간접 경로 전달 될 수는 있어 

송이는 소나무와 공생 관계를 맺은 외생균근이 땅속으로 넓게 뻗은 뒤 땅위로 나와 자실체(버섯)를 형성한 것이다. 중앙포토

송이는 소나무와 공생 관계를 맺은 외생균근이 땅속으로 넓게 뻗은 뒤 땅위로 나와 자실체(버섯)를 형성한 것이다. 중앙포토

연구팀은 또 공통 균근 네트워크를 통한 직접 전달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아기 나무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엄마 나무에서, 혹은 엄마 나무에 침투한 균근에서 영양물질이 토양으로 삼출(渗出, exudation), 즉 스며나갔고, 어린나무가 토양에서 이를 흡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엄마 나무에서 어린나무로 영양분이 가는 것은 맞지만, 정확하게 목표를 정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우연히 전달됐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엄마 나무가 정확히 아기 나무에만 골라서 보내는 게 맞느냐는 것이다.
같은 종(種)의 어린 나무에만 영양물질을 보내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종이 다른 나무도 혜택을 보기 때문에 엄마 나무와 아기 나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연구팀은 "만일 균근이 영양물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면 진화적 관점에서 곰팡이도 얻는 게 있어야 하는데, 아직 나타난 게 없다"면서 "식물 사이에 탄소가 (우회 경로를 통해) 이동하는 것은 맞지만, 균근이 역할을 한다는 것은 불분명하고, 증거도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머체왓숲길. 사진 제주관광공사

머체왓숲길. 사진 제주관광공사

연구팀 관계자는 "균근 네트워크가 산림 생태계의 안정성에 필수적이지만, 나무 사이의 물질 공유와 보살핌에서는 별다른 역할이 없다"면서 "숲은 초(超)유기체나 공통된 목적으로 움직이는 가족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숲을 이루는 나무와 곰팡이, 그리고 다른 많은 생물이 서로 의존적인 관계이지만, 한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단순한 생태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상호 협력도 하고, 때로는 경쟁도 하고, 때로는 병에 걸리게 해 상대를 죽게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