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설악산 하얘졌다…고산 침엽수 100만그루 고사 미스터리

중앙일보

입력 2021.09.23 19:00

업데이트 2021.09.23 19:15

지리산 중봉 근처에서 말라죽은 구상나무 고사목. 강찬수 기자

지리산 중봉 근처에서 말라죽은 구상나무 고사목. 강찬수 기자

지난 13일 오전 경남 함양군 유림면 함양 산림항공관리소를 이륙한 산림청 산불 진화용 KA-32 헬리콥터.
헬기는 곧바로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리산 상공으로 향했다.

헬기에는 산림청과 함께 진행하는 고산 침엽수림 실태 모니터링 작업을 위해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 연구팀과 녹색연합 조사팀이 타고 있었다.

계절은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남쪽 지리산은 아직은 푸른 잎의 나무들로 울창했다.

헬기가 해발 1874m의 지리산 중봉에 이르자 발밑에는 짙푸른 나무 사이로 새하얀 나무가 자주 눈에 띄었다.
구상나무·가문비나무 등 하얗게 말라죽은 침엽수였다.

지리산 하봉 능선에는 온통 고사한 나무들만 서 있는 듯했다.
언뜻 보면 벚꽃이 핀 것 같기도 하고, 겨울 눈이 내려 가지에 쌓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두대간수목원·녹색연합 동행 취재

조사팀은 이튿날인 14일 강원도 강릉시 강릉 산림항공관리소에서 다시 헬기에 올랐다.
북쪽으로 이동한 헬기는 오대산과 설악산 일대를 돌았다.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설악산 대청봉 일대에서는 분비나무가 하얗게 말라죽은 게 뚜렷하게 보였다.

대청봉 바로 아래 눈잣나무 군락지도 군데군데 잎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근처에서 자라는 키 작은 분비나무들도 잎이 갈색으로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행한 녹색연합 서재철 전문위원은 "지리산 중봉·하봉 등 일부 지점에서는 침엽수의 80~90%가 말라죽었을 정도로 고사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 위원은 "올해 초부터 대청봉 일대 눈잣나무의 잎이 누렇게 변했고, 분비나무 중에서도 건강한 게 없을 정도"라며 "최근 나타나고 있는 여름철 폭염 등 기후변화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산 침엽수 3분의 1이 고사

지리산 중봉 근처 조사지점에서 고사목 실태를 조사 중인 국립백두대간 수목원 연구팀. 강찬수 기자.

지리산 중봉 근처 조사지점에서 고사목 실태를 조사 중인 국립백두대간 수목원 연구팀. 강찬수 기자.

지리산과 설악산·한라산 등 전국 31개 산지에는 고산 침엽수 7종이 370만 그루가 분포하는 것으로 산림청은 집계하고 있다.

산림청은 2016년 '멸종위기 고산지역 침엽수종 보전·복원 대책'을 발표하고, 7종(구상나무·분비나무·가문비나무·주목·눈잣나무·눈측백·눈향나무)을 중점 보전대상으로 선정해 관리하고 있다.

산림청은 또 2019년부터 500개 지점을 골라 2년에 한 번씩 나무의 생육 상태, 고사목의 변화 등을 조사하고 있다.

지난해 끝난 1차 모니터링에서 구상나무 숲은 33%, 분비나무는 31%, 가문비나무는 약 40%가 고사한 것으로 평가됐다.
고산 침엽수 전체로는 평균 32%가 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조사된 고사율 26%와 비교하면, 2년 사이에 6%포인트나 증가했다.

설악산 대청봉 인근의 고사한 침엽수. 강찬수 기자

설악산 대청봉 인근의 고사한 침엽수. 강찬수 기자

백두대간수목원 산림생물자원보전실 변준기 팀장은 "500개 조사지점별로 반경 11.3m 내 모든 나무에 대해 수종과 흉고직경(가슴 높이 나무 지름), 생육 상태 등을 파악하는데, 지점당 400㎡ 면적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장 모니터링 담당인 변 팀장은 "침엽수가 죽고 있지만, 다양한 고사 원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고사 원인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현재로써는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하는 방법뿐"이라고 말했다.

기온 상승 등 기후변화가 근본 원인이지만, 같은 산지 내에서도 가뭄과 수분 부족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도 있다.
지형과 토양층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고, 다른 생물 종과의 경쟁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람이 갈수록 세지고 강풍의 빈도가 늘면서 나무가 쓰러진 다음 고사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른 봄 고온·가뭄 스트레스 탓일까.

지리산 중봉 근처에서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고사목. 강찬수 기자

지리산 중봉 근처에서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고사목. 강찬수 기자

전문가들은 고산 침엽수의 고사 원인을 이른 봄 고온과 가뭄 스트레스 탓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겨울에도 잎을 가진 상록침엽수는 봄에 기온이 상승하면 호흡이 늘어나 탄수화물을 소비하게 되지만, 가뭄으로 수분 공급이 부족할 경우 광합성을 제대로 못 해 탄수화물 부족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국립산림과학원 임종환 박사는 "침엽수가 척박한 능선부에서도 잘 사는 것은 나무뿌리와 곰팡이의 공생 관계인 균근(菌根, mycorrhiza) 덕분인데, 이른 봄 고온·가뭄이 나타나면 균근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균근의 곰팡이는 아주 가는 뿌리처럼 역할 해 나무뿌리에 수분을 제공하고, 토양의 미네랄도 녹여내 식물에 공급한다.
대신 나무는 균근 곰팡이에게 유기물을 제공한다.

균근 곰팡이가 제 역할을 하려면 토양 온도가 영상 8도 이상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봄철에 갑작스럽게 기온이 올라가면 균근이 성장할 새도 없이 탄수화물 기근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토양 온도는 기온과 10일 정도 시차를 두고 서서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햇빛이 잘 드는 남향이나 남서향의 급경사지, 능선부,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침엽수일수록 피해가 더 커지고, 호흡량이 많은 큰 나무가 더 위험하다.

미국 콜로라도대학 연구팀은 지난 2월 국제 생태학 저널(Journal of Ecology)에 게재한 논문에서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1982~2019년까지의 아고산 침엽수의 고사율 관찰한 결과, 덥고 건조한 여름철 기후 조건과 고사율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봄이냐. 여름이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더위와 가뭄이 침엽수 고사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한라산 구상나무 고사는 강수량 증가 탓

지난해 8월 촬영한 한라산 성판악 등산로 1800m 고지 구상나무숲 모습. 조현우 사진작가

지난해 8월 촬영한 한라산 성판악 등산로 1800m 고지 구상나무숲 모습. 조현우 사진작가

한라산 구상나무를 연구하는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연구팀은 기후변화에 따른 토양 수분 과다가 한라산 구상나무 고사의 원인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연구팀은 2019년 한국농림기상학회지와 지난해 국제학술지 '삼림(Forests)'에 게재한 논문에서 "한라산의 구상나무 고사는 장기간 지속하는 많은 강우량과 그에 따른 과도한 토양 수분이 원인일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팀의 분석결과, 구상나무 고사율은 한라산 내에서도 고도별·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한라산 남동부 백록샘 일대에서는 고사율이 17.1%로 낮았지만, 한라산 북동부의 1300∼1400m 고도에서는 87.7%로 높았다.

한라산 구상나무 고사 현장. 조현우 사진작가

한라산 구상나무 고사 현장. 조현우 사진작가

연구팀은 "강수량이 많고, 경사가 완만해 토양의 수분 함량이 높은 지역일수록, 일사량이 적을수록 고사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한반도와 제주지역에서 강수량이 지속해서 증가하는 가운데 경사가 완만해 배수가 잘 안 되고, 일사량이 적어 증발도 잘 안 되는 곳에서는 토양 수분이 과다해 구상나무 고사가 잘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리산이나 다른 지역에서 침엽수 고사가 가뭄 탓이라는 주장과는 반대되는 원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기후변화 탓이 아닐 수도

설악산 대청봉 인근 분비나무 등 침엽수가 고사한 모습. 강찬수 기자

설악산 대청봉 인근 분비나무 등 침엽수가 고사한 모습. 강찬수 기자

국립공원연구소 박홍철 박사는 지난 9일 환경부·국립공원공단 주최로 열린 '탄소 중립과 한반도 자연 생태계 미래전략 심포지엄'에서 "기후변화의 영향이 큰 게 사실이지만, 지리산 구상나무의 고사가 기후변화 탓이 아닐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구상나무가 60~120년인 자연 수명을 다해 죽은 후에 어린나무(치수)가 새로 자라는 천연 갱신 과정인데, 집단 고사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립공원연구소가 지난 2017년 구상나무 고사목 94그루의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94그루 모두 58년 전인 1960년부터 생육 부진이 이어졌고, 1964년부터 간헐적으로 한 두 그루씩 고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0년 이후 고사한 구상나무 84그루 가운데 가장 오래 산 것은 수명이 118년이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84그루의 평균 수명은 69년으로 나타났다.

고사목의 48.8%는 고사했을 때 나이가 자연 수명이라고 볼 수 있는 70~80년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박 박사는 "2018년 봄에는 소형 설치류인 대륙밭쥐가 지리산 세석평전 구상나무의 잔가지를 갉아먹는 등 52그루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주기도 했다"며 또 다른 고사 원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높은 나무 밀도가 문제일 수도

지난 3월 드론으로 촬영한 지리산 하봉 일대 고사 현장. [녹색연합]

지난 3월 드론으로 촬영한 지리산 하봉 일대 고사 현장. [녹색연합]

고산 침엽수가 밀집해서 자라는 게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활엽수 등 다른 수종과의 경쟁도 벌어지지만, 같은 침엽수 종끼리도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임종환 박사는 "나이가 비슷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면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연구팀도 "한라산 구상나무의 밀도와 고사율 사이에 일관된 양의 상관관계가 나타난다"며 불리한 성장 조건에서 과도한 토양 수분이 구상나무의 고사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박홍철 박사는 "나무 밀도가 높은 경우 강한 바람에 쓰러지면서 띠 모양으로 집단 고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대학 등 미국 연구팀은 지난해 10월 '에코스피어(Ecosphere)'에 게재한 논문에서 "아고산 전나무 감소 현상은 전나무 숲 가장자리보다는 밀집된 중심에서 나타날 가능성이 있고, 이미 고사한 동종 나무 곁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침엽수 밀도가 높은 상황에서는 침엽수를 약하게 만드는 곰팡이가 기후변화의 도움을 받아가며 주변 나무들로 쉽게 퍼질 가능성도 커진다.

지속적인 원인 규명이 중요

결국 침엽수 고사는 기후변화와 더불어 침엽수가 견딜 수 있는 생물학적인 한계, 지형의 영향, 생물 종의 상호작용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셈이다.

서재철 위원은 "눈잣나무 등 침엽수가 고사하고 나면 활엽수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만, 강한 바람과 심한 추위 탓에 활엽수가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그렇게 되면 아고산 생태계가 토양 침식 등으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설악산 대청봉 인근 눈잣나무 잎 일부가 누렇게 변했다. 강찬수 기자

설악산 대청봉 인근 눈잣나무 잎 일부가 누렇게 변했다. 강찬수 기자

변준기 팀장은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정밀 조사를 통해 고산 침엽수종의 고사 원인을 밝히는 연구를 꾸준히 진행해야 하고, 여기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쇠퇴 현상을 완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팀은 앞으로 생육이 양호한 곳과 어린나무가 자라는 곳, 쇠퇴지 등으로 구분해 생육 환경 특성을 파악할 계획이다.
특히 기온·습도·강수량·풍속·광량 등 미세 기후를 관측하고, 토양 특성과 토양 미생물 분석도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산림청은 고산 침엽수종의 개체군 유지와 숲 복원을 위해 종자를 채취해 보관하고 있다.
2019년부터는 경북 봉화와 제주, 전북 무주 등 3곳에 현지 외 보존원을 조성해 후계림을 육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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