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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공화주의 상상력을 요청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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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1월부터 김진표 국회의장 직속 ‘헌법개정 및 정치제도 개선 자문위원회’ 위원을 맡아 왔다. 2018년 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던 경험도 있어 헌법 개정에 작지 않은 관심을 두어 왔다. 헌법 개정의 가능성이 당장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젠가 있을 헌법 개정에 대비한 기초 자료를 쌓기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광복 78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것의 하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제1항이었다. 역사학자 박찬승은 ‘공화국’에 ‘민주’가 결합한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한 바 있다. 하나가 귀족 주도의 ‘귀족공화제’에 대비되는 평민 중심의 ‘민주공화제’를 부각했던 임시정부의 전통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권력 집중을 강조하는 ‘인민공화국’에 맞서 권력 분립을 중시하는 ‘민주공화국’을 선호했던 광복 직후 이념적 상황의 영향이었다.

한국 행복수준 OECD 국가 중 하위
‘성공한 국가’와 ‘위기의 국민’대비
‘같이, 함께’ 살아가는 나라가 돼야
새 시대정신으로서 공화 생각할 때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민주공화국’에서 공화국을 지탱하는 이념인 공화주의다. 전통적으로 공화주의는 덕성을 갖추고 공공성에 헌신하는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사회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정치철학적으로 공화주의는 자유주의와 경쟁하고 이를 비판해 왔다. 자유주의가 타인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를 중시한다면, 공화주의는 개인은 물론 집단 차원에서 간섭의 배제를 넘어 지배의 부재를 요구하는 ‘비지배적 자유’를 부각한다.

공화국이란 말의 기원인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그리스어 폴리스(polis)에서 비롯됐다.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는 ‘한 사람이 지배하는 곳은 폴리스가 아니다’라고 노래했다. 로마 철학자 키케로는 공동의 법과 이익에 의해 결속한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레스 푸블리카라고 주장했다. 공화주의의 이상은 한 개인이나 소수가 아닌 시민 모두가 주인이 되는 공동체 만들기에 놓여 있었다.

이쯤에서 소개하고 싶은 자료가 하나 있다. 2월 26일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정책 성과 및 동향 분석 기초연구’에 따르면, 갤럽월드폴의 우리나라 행복 수준은 2021년 10점 만점에서 6.11점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우리나라보다 낮은 나라는 그리스·일본·멕시코·폴란드·콜롬비아·튀르키예 여섯 국가였다. 여기서 행복 수준이란 그 나라 국민이 스스로 인식하는 행복의 정도를 의미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우리나라 위상이 20세기와는 다르다는 점은 국가적 자부심이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고, 절차적 민주주의도 어느 정도 안정됐다. 그 결과 비서구 사회에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이례적인 나라로 인정되고 있다. 최근에는 K-문화가 지구적으로 큰 환영을 받아 김구 선생이 소망했던 ‘문화국가’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갤럽월드폴에 담겨 있는 의미는 뭘까. 적지 않은 국민이 ‘성공한 국가’에서 ‘행복하지 않은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갤럽월드폴에서 시선을 끈 결과가 하나 더 있다.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나 친지가 있는가’에 대한 응답이다. 이 질문에 ‘없다’고 답변한 비율이 18.9%를 기록함으로써 한국은 OECD 회원국에서 네 번째로 높았다. 우리보다 사회적 고립도가 심각한 국가는 콜롬비아·멕시코·튀르키예뿐이었다. 이 자료들이 함의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국가는 성공했지만 정작 국민은 삶의 위기 앞에 놓여 있는 아이러니가 바로 그것이다. ‘성공한 국가, 위기의 국민’은 최근 우리 사회가 서 있는 자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언명이라고 나는 보고 싶다.

성공한 국가는 행복한 나라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같이, 함께’ 살아가지 않는 나라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국가다.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시민적 덕성·참여·신뢰의 윤리를 내면화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뢰의 상실, 불투명한 통치, 은폐의 언어, 진실의 폄하가 어둠의 시대를 가져올 수 있다’는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경구는 우리 사회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아렌트는 이를 ‘공화국의 위기’라 명명한 바 있다. 우리 국민 다수의 소망이 삶의 위기를 넘어서 ‘같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나라에 있음은 분명하다.

오늘날 경제 양극화는 물론 정치 양극화가 우리 사회를 둘로 나누고 있다. 정치 양극화는 세대와 젠더의 사회 양극화를 넘어 배타적 옹호와 극단적 혐오라는 정서의 양극화에까지 나아가고 있다. 점증하는 다층적 양극화에 맞서 모두의 공공선 추구, 자유의 권리와 법의 지배의 조화, 배려와 연대와 책임의 윤리, 그리고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공존을 모색하는 공화주의적 애국주의 등 성숙한 공화주의의 가치는 더없이 중요하다.

‘성공한 국가, 위기의 국민’을 그대로 놓아둘 순 없다. 국가와 국민은 동행해야 한다. 산업화 시대 30년, 민주화 시대 30년을 넘어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서의 공화주의의 상상력을 요청하는 시점에 우리 사회는 이미 도달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