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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지역 인구위기와 홍길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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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하면 떠오르는 표현이다. 내가 처음 홍길동전을 접했을 때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였을 것이다. 어린 내 눈에 홍길동은 우상(偶像)이었다. 신분 타파니 의적이니 유토피아니 하는 거창한 가치들이 아니라, 나를 매료시켰던 것은 바로 분신술이었다. 어린 시절, 태어난 곳과 자라난 곳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나에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은 시쳇말로 멋짐 폭발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홍길동은 점점 내 기억에서 작아졌다. 그런데 얼마 전, 한 지인이 한 말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기억 속 홍길동을 다시 소환했다.

교통 발달로 생활 반경 넓어지면서
지자체 경계 넘나드는 사람 늘어나
지자체 인구 전략 획기적 개선 위해
생활인구 토대로 집계 방식 바꿔야

워낙 지역의 인구가 줄어 위기라고 느끼는 지자체가 많아지다 보니 그래도 인구전문가라고 알려진 나에게 자문해오는 곳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지방 출장이 많아졌고, 어떤 때는 한 주에 충청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를 다녀와야 하는 일정도 생겨날 정도였다. 이런 모습을 본 지인이 내게 웃으며 말했다. ‘조 교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네?’ 엇? 내 우상이던 홍길동!

지난주, 지방에 갈 일이 생겨 고속철도 열차표를 예매하려다 깜짝 놀랐다. 거의 일주일 전 열차표를 예매하려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들어갔는데 열차 편이 일반석이든 특실이든 거의 모두 매진인 것 아닌가? 한 시간에 한 편씩 열차가 있는데 매진이라니. 나는 순간 누군가가 예매 시스템을 악용해서 열차표 사재기를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누군지도 모르는 가상의 ‘사재기꾼’을 힐난했다. 하지만 내가 원한 시간이 아니라 자리가 있는 시간에 내 여정을 맞춰 간신히 표를 구해 탄 열차에서 나는 사재기꾼에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열차는 만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이 홍길동처럼 사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분신술처럼 동시간에 여러 군데서 등장할 수는 없지만, 하루를 기준으로 보면 많은 사람이 여러 곳의 행정구역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에는 일과 가정이 한 기초지자체에 있거나 좀 많아 봐야 몇 개의 기초지자체를 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은 아예 시도를 넘나들며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상화되었다. 주말이나 연휴가 되면 출몰하는 영역이 더 넓어진 홍길동들도 즐비하다.

과거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교통과 도로 인프라가 국민들을 홍길동으로 만들었다. 앞으로 모빌리티의 수단에도 더 큰 혁신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일하고 휴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근로제도까지 바뀐다면? 전 국민이 모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 않을까?

그런데 하루에도 넓은 영역에서 여러 개의 지역 경계를 넘나들고 사는 모습이 일상화되었는데, 아직도 인구를 세는 기준은 행정적으로 과거와 동일하다. 서울에 주민등록을 두고 있는 ‘조 교수’는 전라남도, 충청남도, 경상북도에서 출몰하지만, 언제나 서울 사람일 뿐이다. 직장인 서울대학교가 있는 관악구에서 내 일상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주민등록이 있는 구의 주민이지 관악구 주민은 될 수가 없다.

지금 수많은 지자체는 인구가 줄어 고민이다. 인구의 수는 지방세수는 물론 중앙으로부터 받는 교부세 등 재정 및 인프라 지원의 기준이다 보니, 지자체들은 인구수에 민감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구는 주민등록인구다.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이 멀지 않고, 생활 영역이 넓지 않았던 과거에는 사람을 세는 기준으로 주민등록지가 되는 것이 적합했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람이 홍길동처럼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 그럴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한데, 사람을 세는 방식도 이런 현실을 반영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람들을 세는 것이 불가능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생활하는 지금은 지자체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만큼의 시간을 머물렀는지 정확하게 기록이 가능하다. 주민등록 기준으로 보면 2022년에 나는 주민등록지 한곳에서만 사는 1명이었다. 반면 시간을 기준으로 보면 하루 24시간에 365일, 즉 8760시간을 갖고 있었고, 내가 실제로 그 시간을 나눠 쓴 수십 개의 지자체에서 셀 수 있는 홍길동이었다.

만일 지자체들이 주민등록만이 아니라 실제 활동하는 사람들의 시간의 총량에 맞춰 교부세나 각종 인프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면, 지역 인구위기를 보는 관점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은 지금과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국토를 균형발전 시켜야 하는지 기획도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얼마 전 행안부가 인구감소지역지원 특별법을 마련했는데, 법안에 새로운 인구 개념이 ‘생활인구’라는 이름으로 반영됐고, 국토교통부도 각종 인프라를 기획할 때 새로운 인구 개념을 반영하기 위한 연구를 이미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지역 인구위기 극복을 넘어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