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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충격, 거리로 나온 ‘을’과 ‘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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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진호 경제부 기자

정진호 경제부 기자

#직장인 C(32)는 또래보다 빨리 부동산에 눈을 떴다. 2020년 전세로 살던 C는 집값이 몇억원씩 오르는 걸 지켜보다 퇴근 후 부동산 강의를 들었고, 주말엔 매물을 보러 다녔다. 벼락거지를 면하고 싶던 그는 갭투자로 빌라를 샀다. 그의 서울 금천구 빌라는 최근 매매가가 전세가(2억원)보다 떨어졌고, 2억원으로는 새 세입자를 구할 수 없게 됐다. 보증금 반환을 위해 대출을 알아보고 있는 C는 최근 임차인으로부터 “사기꾼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임대사업자인 K(58)는 임대사업자 세금을 감면해 주던 2018~2019년 서울 강서·관악구 등에 빌라 70여 호를 샀다. K는 지난달부터 임차인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대위변제를 받아 나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내가 죽어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 세입자는 돈을 받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한 시간 넘게 통화한 K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지난달 23일 서울 화곡동 부동산에 걸린 전세 정보. [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서울 화곡동 부동산에 걸린 전세 정보. [연합뉴스]

집주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30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에선 전국임대인연합회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주로 ‘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던 광화문에 다주택자인 임대인이 모였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이들은 “임대인이 죽어야 임차인이 산다는 발상을 멈추고 상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밝혔다. 다른 한편에선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국회나 대통령실 앞에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전세사기는 정책 실패다.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회초년생·신혼부부 등 경제적 약자는 빌라 외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빌라 수요는 급증했고, 매매와 달리 전세를 위한 대출은 쉽게 받을 수 있었다. 2017년 보유세를 줄이는 등 민간임대사업을 장려하다 보니 소수의 악성 임대인이 주택을 대거 매입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다.

그러던 정부가 전세사기 대책이라며 HUG의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 요건 강화를 내놨다. 공시가격의 150%였던 보증 한도는 1일부터 126%로 줄어든다. 예컨대 공시가 2억원 빌라는 3억원 보험 가입이 가능했지만, 이제 2억5200만원이 한계다. ‘보증 한도=전세보증금’으로 정해진 전세시장에서 한도를 낮춘 만큼 역전세가 발생한다. 공시가 2억원 빌라 10세대를 임대한 사업자라면 4억8000만원을 본인 돈으로 메워야 한다. 임대 기간에 집을 팔면 한 채당 과태료 3000만원이다.

정부의 HUG 보증 한도 축소로 전셋값이 급락하면서 상당수 임대인이 사기꾼으로 전락할 위기다. 야당은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의 보증금을 한국자산관리공사 등이 사들이는 공공매입을 주장한다. 을(임대인)과 을(임차인)이 서로를 불신하고 비난하는 사이 생색을 내는 건 이 상황을 만든 갑(정치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