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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 넘어져도, "전기료 못올려 돈 없다"…전력생태계 무너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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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A 전력 기기 생산 업체 공장 내 한전 납품 라인이 썰렁한 모습. 몇년전까지 활력이 넘쳤던 이곳 라인은 이제 근무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 업체는 적자가 누적된 한전의 발주가 줄면서 수출 품목 라인 등으로 인력을 조정하고 있다. 정종훈 기자

25일 A 전력 기기 생산 업체 공장 내 한전 납품 라인이 썰렁한 모습. 몇년전까지 활력이 넘쳤던 이곳 라인은 이제 근무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 업체는 적자가 누적된 한전의 발주가 줄면서 수출 품목 라인 등으로 인력을 조정하고 있다. 정종훈 기자

25일 오후 경기도의 A 전력 기기 생산 업체. 공장 바깥의 넓은 공간엔 파란색으로 포장된 자재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한국전력에 납품할 제품용 자재인데, 한전의 발주가 줄면서 별일 없이 놀리고 있다. 완제품 일부도 4개월째 한전으로 보내지 못해 한쪽에 놓여있었다. 이 회사의 김모 사장은 "보통 마당에 자재를 한 달 정도 보관했는데 요즘엔 그보다 더 길게 두고 있다"면서 "완제품으로 미리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다 만들어놓고 쌓아두는 판"이라고 말했다.

공장 내부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나마 수출용 제품을 만드는 라인엔 10명 가까운 근무자가 몰려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한전용 제품 제조 라인엔 두 명밖에 없었다. 제작 중인 기기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김 사장은 “한전 라인의 직원을 수출 라인으로 돌리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전 협력업체 고사에도…2분기 전기료 기약 없어 

에너지 가격 상승 등에 따른 한전의 경영난이 심해질수록 6500여 한전 협력업체들의 한숨도 커지고 있다. 채권 발행 등으로 손실을 메우고 있는 한전의 돌파구는 전기요금 인상이지만, 정치적 이유로 난항을 겪고 있다. 당초 지난달 말에 나왔어야 할 2분기 전기료 결정은 한 달 가까이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인상 여부 발표가 다음 달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요금의 키를 쥔 '갑' 당·정과, '을' 한국전력 사이에선 추가 자구책 마련 등을 두고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물밑에선 ‘병’ 입장인 협력업체 생태계가 고사하고 있다.

대부분 중소기업인 이들은 한전이 32조6000억원 넘는 적자를 낸 지난해 이후 발주·대금 결제 등에서 큰 차질을 빚고 있다. 꾸역꾸역 버티고 있지만, 한전 적자가 이어질 올해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원자잿값 인상·인건비 상승·고금리까지 겹친 '사중고'로 전력망 유지를 위한 실핏줄이 줄줄이 터져나갈 위기다.

25일 A 전력 기기 생산 업체의 공장 바깥에 완제품 대신 자재만 잔뜩 쌓여있다. 한전의 발주가 줄어들면서 공정이 밀린 자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른쪽의 일부 완제품은 수출용 제품. 정종훈 기자

25일 A 전력 기기 생산 업체의 공장 바깥에 완제품 대신 자재만 잔뜩 쌓여있다. 한전의 발주가 줄어들면서 공정이 밀린 자재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오른쪽의 일부 완제품은 수출용 제품. 정종훈 기자

"공사를 해도 한전의 비용 결제는 안 되고, 적자만 쌓여갑니다. 이미 하고 있던 공사도 중지될 정도입니다. 멈추고 싶어도 다들 국민 안전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버텼지만, 주변에서 '이젠 놓자' 이야기까지 나오네요."

24일 중앙일보 기자와 만난 배전 공사 전문 업체 B사 대표는 한숨을 쉬었다. 그 옆에 있던 같은 업계 C사 직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작년이 최악인 줄 알았는데 올해가 더 최악입니다." 배전 공사는 변전소와 소비자 사이에서 전기를 연결해주기 위한 작업으로, 전신주나 전기 선로 설치·보수가 대표적이다.

"결제 7개월 밀려" "하던 공사도 중지될 정도" 

B사 대표는 "지난해 공사 보수가 전년 대비 30% 정도 줄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예 신규 공사 일감이 없는 수준"이라면서 "그나마 일한 것도 대금 결제가 시원시원하게 안 되는데, 한전에서 적자 때문에 예산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이런 상황이 1년 갈지, 2년 갈지도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C사 직원도 "요즘엔 공사 후 돈을 제때 받아본 적이 없다. 지난해엔 7개월 밀린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상반기라 회사 직원들도 버티고 있지만 이대로면 오래 일하던 분들을 비롯해 다 나갈 판"이라고 덧붙였다.

심지어 한전 지사에서 공사 발주 등 목소리를 내달라고 협력업체에 부탁할 정도라고 한다. B사 대표는 "각 지사에서도 문제점을 잘 알지만 '우리가 힘이 없으니 (협력업체가) 본사에 바로 말하라'고 한다"고 전했다.

길 옆에 서 있던 전신주가 넘어진 상황. 이런 상황일 때 배전 공사 업체가 긴급 보수 작업에 나선다. 사진 배전 공사 업계

길 옆에 서 있던 전신주가 넘어진 상황. 이런 상황일 때 배전 공사 업체가 긴급 보수 작업에 나선다. 사진 배전 공사 업계

기기 납품 업체도 벼랑끝 "적자에 적금 다 깼다" 

기자재를 제조해 한전에 납품하는 업체들도 벼랑 끝에 서긴 마찬가지다. 발주하는 물량 자체가 줄고 단가는 오르지 않으니 재무제표를 보기 겁날 정도다. 얼마 안 되는 한전 물량을 차지하기 위해 '출혈 경쟁'도 감수하다 보니 경영 여건은 더 악화하기 일쑤다.

송전선로 부품을 공급하는 D사 대표는 한전 납품 등 내수 중심이라 매출 타격이 크다. 그는 "30년간 회사 운영하면서 지금이 제일 큰 위기다. 지난해엔 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도 겪지 않은 수십억 원 적자를 냈다"면서 "부동산ㆍ적금ㆍ보험 등 팔 수 있는 건 다 팔거나 해약하고 이젠 남은 게 전혀 없다. 50명 가까이 있던 직원도 30명 수준으로 확 줄었고, 경기 하락ㆍ물가 상승ㆍ인건비 요동ㆍ발주 하락이 겹쳐 희망이라곤 안 보인다”고 말했다. “업체 10곳 중 8곳이 어려워서 하반기 넘기기도 쉽지 않다. 자칫하면 부도 위험이 곧 대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차단기 등을 만드는 A기업은 해외 수출 덕분에 그나마 사정이 낫지만, 한전 물량이 적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다고 했다. 한전이 적자를 낸 2021~2022년에 이 회사도 사실상 ‘마이너스’(-) 실적을 받아들었다.

지난달 말 서울 시내 전력 계량기. 연합뉴스

지난달 말 서울 시내 전력 계량기. 연합뉴스

한전 예산 부족에 안전 우려…'대정전' 같은 부메랑 경고 

이곳 김모 사장은 “평년의 60~70%로 발주량이 줄다 보니 기존 인력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매달 경영 회의할 때마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부품 공급하는 2차 협력 업체서 단가가 낮다며 ‘납품을 포기할 정도’라고 하소연하지만, 한전도 어려우니 단가 인상 요청은 말도 못 꺼내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부 업체는 비용 문제로 납품을 중단하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국내 전력 계통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들도 그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업무를 진행해왔다. C사 직원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전기 품질에서 최고로 꼽히는 건 협력업체들의 시공 능력, 안전 관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력 생태계가 흔들리면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 안전 저하’나 ‘대정전’ 같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B사 대표는 “전신주가 넘어질 상황이라 긴급 보수 공사가 필요한데도 한전에선 ‘예산 없다’면서 못 하게 할 정도”라고 말했다. C사 직원은 “업체가 당장 힘드니 장비ㆍ인력 투자를 안 해 품질과 안전 저하라는 악순환에 빠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D사 대표는 “원자잿값은 오르는데 단가ㆍ물량이 적으니 중국산 저가 부품을 갖다 쓰는 업체도 있다. 부품 수명이 짧아지고 선로 오류가 늘어나는 만큼 모두가 손해”라고 밝혔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자금 여력이 없는 한전이 꼭 필요한 '필수 투자’ 위주로 투자계획을 짜면서 이런 업체들의 우려는 현실이 되는 모양새다. 한전은 재정 건전화 차원에서 2022~2026년 송변ㆍ배전망 투자 예산을 기존 계획안보다 2조705억원 축소했다. 수백개 업체가 엮여있는 배전 부문에서만 5년간 1조310억원이 줄었다. 또한 한전의 연간 물자수급계획에 따르면 2021년 1억4887만대 수준이던 기자재 구매량은 올해 1억1589만대로 떨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한전은 "안전과 안정적 전력 공급을 위한 투자와 예산 집행은 차질없이 지속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올해를 못 넘기는 업체가 급증하면 ‘줄도산’ 등으로 전력 업계 안정성이 크게 떨어질 거란 데엔 모두가 입을 모았다. A기업 사장은 "업계에선 인건비라도 건지려고 저가 수주에 나서는 곳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출혈이 크다 보니 2~3년 뒤엔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력 기기 수출 덕분에 ‘위기’ 상황은 아니라는 E사 대표도 “이런 식으로 가면 전력 업계에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밝혔다.

"답은 빠른 전기료 현실화뿐…당정이 국민 설득해야"

아직 한전이 제시한 올해 전기료 인상 요인(㎾h당 51.6원)을 채우려면 먼 길이 남았다. 전기 업계와 전문가들은 결국 전력 생태계 공멸을 막으려면 빠른 전기료 현실화와 한전 경영 혁신이 병행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전기요금이 한두 번 오른다고 한전의 발주나 대금 지급이 당장 원활해지진 않겠지만, 요금 현실화가 늦어질수록 업체가 받을 고통은 더 커질 수밖에 없어서다. 물가 부담 등을 내세워 인상을 미룰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라는 호소가 대부분이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A기업 사장은 "정부와 여당에서 요금 인상 눈치만 보고 있으니 업체들로선 죽을 지경이다. 2026년까지 단계적으로 한전 적자를 해소한다는데 기업들 다 죽고 나서 산소호흡기 꽂으면 무슨 소용이냐"면서 "국민에겐 인상 필요성을 설득하고, 지금 당장 전기요금을 정상화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B사 대표는 "결국 한전에 돈이 없으니 기형적인 발주·결제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전기료 인상과 한전 경영 개선이 같이 가야 한다"며 "연간 ㎾h당 100원은 고사하고 당초 계획대로 50원 정도라도 요금이 올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처럼 한전의 재무 부담은 한전에만 그치지 않는다. 전력망 투자가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노후화로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지고, 정부가 추진하는 여러 첨단 산업단지 조성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전력 다(多)소비국인 한국의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얘기다. 인위적으로 요금을 억누른 데 따른 ‘나비효과’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미 전력 산업과 시장의 고사가 진행 중이다. 전력 산업 붕괴는 국내 산업 생태계 전반의 위기로 넘어갈 것"이라면서 "전기료를 현실화하는 한편 에너지 요금을 독립적으로 결정할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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