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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AI에 자비심을 장착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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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연초록 파스텔톤의 산색이 평온하다. 새들의 목청은 높고 청량하다. 이 평화로운 봄날, 경주를 다녀왔다. 문화로 국력을 자랑하던 시대에 백제는 미륵사를, 신라는 황룡사를 지었다. 지금은 모두 세월의 허망함을 담아 빈터로 남았다. 새벽녘 스님 100여 명이 황룡사 9층탑이 섰던 빈자리에서 예불을 올리고 좌선을 하였다. 어스름한 아침 동쪽 하늘에서 붉은 해가 솟는다. 삭발한 머리와 적갈색의 가사, 회색 장삼은 주초석만 남은 절터에도 어우러진다. 아마 천 년 전에도 수행자들의 마음엔 따뜻한 사랑과 어려움을 돕고자 하는 연민과 더불어 기뻐함과 평온함이 가득했을 것이리라.

경주 보문단지에는 역사 속 유물인 황룡사 구층탑 양식의 중도탑을 현대 과학기술과 건축공법으로 재해석하여 지은 황룡원이 자리해 있다. 한눈에도 품격을 갖춘 이 건물은 다양한 명상과 수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연수원이다.

AI시대에도 마음공부는 불변
자애·연민·기쁨·평온이 출발점
세월호 9주기의 아픔에 공감
우리 모두 좀더 따뜻해졌으면

경주 황룡사터

경주 황룡사터

황룡원에서 KAIST명상과학연구소장인 미산 스님은 ‘명상과 과학’을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면서 AI시대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를 물었다. “챗GPT를 쓰고 계신 분? 방송에서 들어 보신 분? 호기심이 생기신 분? 저런, 스님들의 AI지수는 매우 낮군요.”

모든 영역에서 챗GPT4가 이용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훌륭한 답변도 있지만 거짓말도 진짜인 것처럼 답한다는 것. 무려 100조 개의 파라미타가 장착된 챗GPT5가 개봉 시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현실과 가상이 모호해지는 상황이 코앞에 닥쳤다. 인간이 따라잡을 수 없는 혁명의 시대가 곧 현실로 다가온다. 코로나 팬데믹 때처럼, AI시대도 준비 없이 맞닥뜨린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분야의 몇몇 선구자들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며 시간 조절을 한다지만 자본 앞에서 오래 버틸 수도 없다.

AI에게 절제의 지혜와 자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을 의무로 강제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수행자들이 마음공부 전에 사무량심(四無量心·자애 연민 기쁨 평온)을 장착하듯이, 이 분야 과학자들이 100조 개의 파라미타에 기본 사양으로 사무량심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사무량심은 언제 어디서나 끊임없이 나오는 마음이다. 초기불교의 수행체계에 37가지의 단계가 있다. 37가지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사무량심을 이해하고, 깊이 새기고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수행하는 목적을 잊고 자아에 도취하기 쉽다. 사무량심을 닦으면 마음을 조절하고 복덕을 늘일 수 있으며, 결국에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자애(慈愛)는 치우침 없이 모든 생명과 자연을 다 감싸는 마음이다. 언제라도 도울 태세가 있는 최상의 사랑이다. 연민(悲)은 더불어 아파하는 마음이다. 세상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지만, 보호하고 돕고자 하는 마음이 흔들림 없으면 평화롭고 고요해진다.

더불어 기뻐함(喜)은 남의 행복을 자기 것처럼 즐겨 나누어 가짐으로써 나의 삶에도 기쁨이 늘어나는 것이다. 남의 기쁨이 거룩하고 고상한 것일수록 나의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은 더 의미 있게 된다. 평온(捨)은 마음수행을 통해 완전하고도 요지부동한 균형을 이룬 마음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과 나와 내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마음을 버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다. 평온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의 절정이자 그 극치이다.

4·16 세월호 9주기를 앞두고, 안산을 지나며 근처에 사는 원돈 스님에게 전화했다. 9년이나 흘렀지만, 그는 간단하게라도 추모제를 지내려고 준비 중이었다. 진도 팽목항까지 달려와 마음 둘 곳 없는 단원고 희생자의 학부모들을 위로하던 그 마음이 그대로였다.

“지현이 엄마는요?”

“우리 흥부네 책 놀이터에서 봉사하고 있어요.”

9년 전, 늦은 밤에도 잠 못 이루고 진도실내체육관에 임시로 설치된 법당 앞을 오락가락하는 한 엄마가 있었다.

“이리 오세요, 누구를 기다리나요?”

“딸이요, 수학여행 안 가겠다는 아이를 애 아빠가 가방을 사 오며 ‘추억을 만들어야지’, 하면서 제주 가는 배를 태웠어요.”

“그랬군요. 여기 소원지에 지현에게 날마다 편지를 써 보세요.”

침몰 200일째, 잠수부들의 마지막 물질을 하던 날, 그이는 극적으로 딸을 만날 수 있었다. 가슴에 묻어 두었겠지만, 그이는 슬픔을 이겨내고 시흥의 ‘흥부네 책놀이터’에서 아침을 못 먹고 등교하는 학생들의 밥을 챙기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이가 슬픔을 사랑으로, 연민으로, 기쁨으로 승화하고, 마침내 평온함을 찾았으면, 찾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좀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사무량심은 AI뿐만 아니라, 아니 AI에 앞서 우리들 마음에 기본으로 장착해야 한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