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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한 아이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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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지난해 11월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소년법 개정안’과 지난 12일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 기사를 접한 이후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다. 어디에서 읽었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의 출처조차 모호한 말이라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아프리카 문화권에 널리 퍼진 속담이란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략 이렇다. ‘아이는 한 가정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다.’(우간다) ‘아이는 부모나 한 가정에만 속한 것이 아니다.’ ‘아이의 부모가 누구이건 양육의 책임은 지역 사회에 있다.’(탄자니아)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스와힐리). 소년 범죄이건, 학교 폭력이건 그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은 그 아이가 나고 자라는 ‘온 마을’에 있다는 말이다.

소년법 개정안, 학폭 대책 한계
여론 좇는 포퓰리즘 성향 짙어
징벌보다 잘못 깨우치게 해야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우리 아이 희망 네트워크’가 2011년에 펴낸 동명 책에 대한 교육학자 문용린(서울대 명예교수)의 서평은 그 책임을 ‘온 마을’에서 ‘부모’로 좁힌다. 자녀 교육에 절대적 책임을 떠안고 그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는 우리의 현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오로지 내 아이만 생각하고, 아이에게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성취적 행복에 몰입하도록 가르치는 부모들에게, 부모로서의 마음가짐을 반성해 보고 아이가 온전한 행복을 추구하도록 가르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이상적 처방과 현실의 틈이 적지 않으니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심판’의 극 중 판사 심은석(김혜수)은 이렇게 말한다.

“보여줘야죠, 법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야죠, 사람을 해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제 새끼 아깝다고 부모가 감싸고돈다면 국가가, 법원이 제대로 나서야죠.” 단죄를 통한 가르침, 즉 부모가 그 책임을 회피했으니 ‘법’이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소년범죄의 잔혹성에 대한 사회적 공분에 힘입은 촉법 연령 하향 개정안의 근거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법무부 장관이 밝힌 입법 취지는 ‘소년의 신체적 성숙도와 사회환경’의 변화를 고려한 것이란다.

그런데 그것을 반영한다면 오히려 상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그 옛날의 청소년은 지금의 어른만큼 삶의 무게를 스스로 져야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래서 일찍 철드는 경우 또한 아주 많았으니까. 다양한 합리적 찬반 의견이 있지만 개정안 입법예고에 뒤이어 국가인권위원회와 대법원, 더 나아가 유엔 아동 권리위원회는 그것이 여론의 압박에 호응하는 것일 뿐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며 반대 의견을 표했다.

학교폭력 가해 사실을 학교생활기록부에 적시하여 대학입시에 반영하겠다는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도 별다른 고민 없이 사회적 여론에 떠밀린 것 아닌가 싶은데 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는 그로부터 불과 9일 만에 학교폭력 조치사항을 대입 전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기로 합의했다.

촉법 연령 하향 조정은 전과자 신분을 부여하는 연령을 낮추는 것일 뿐 그것으로 얻는 사회적 이익, 즉 범죄 예방 효과는 의심스럽다. 학교폭력 사실을 대입 전형에 ‘적극’ 반영하는 것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년법 개정안과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에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직 교화의 가능성이 높은 연령대이니 그에 초점을 맞추자는 원론적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온 마을’이 함께 고민한 날이 얼마나 있었는지, 그들을 그렇게 키운 부모의 잘못은 어찌할 것인지, 그렇게 키울 수밖에 없다는 변명거리를 이 사회가 얼마나 많이 제공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그 책임이 온전히 그 청소년들에게 있는 것만은 아님을 살피고 하나하나 개선하는 것이 어른 된 도리 아니냐는 말이다.

그런데 글 쓰는 내내 마음이 쓰이는 말이 하나 있다. “난 네가 죽은 후에도 고통스러웠으면 좋겠어.” 영화 ‘악마를 보았다’ 중 연쇄살인마에게 약혼녀를 잃은 주인공이 그를 응징하며 내뱉은 말이다. 가해자에게 영원한 고통을 주고 싶을 만큼 큰 피해자의 아픔과 분노를 외면하고 원론적 이야기나 떠벌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영 불편하다.

그래서 무거운 마음으로 옛 성현의 두 말씀을 빌려 위로의 마음을 대신한다. “토라(율법)는 목숨에는 목숨, 눈에는 눈(중략)으로 되갚을 것을 정했다. 하지만 누구든지 자비를 베풀어,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죄 또한 용서받을 것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말씀이다.

그보다 앞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모욕하는 이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는 것이 모든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그러니 단죄와 징벌에 앞서 제대로 가르치는 것이 순서다.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