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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비 오기만 빌었던 강릉 산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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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2일 오후 강원 강릉시 경포 일원 산림과 건물이 전날 대형 산불로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있다. 김종호 기자

12일 오후 강원 강릉시 경포 일원 산림과 건물이 전날 대형 산불로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있다. 김종호 기자

가뭄·강풍에 소방 헬기 못 떠 발만 동동 굴러

매년 반복되는 재난…물웅덩이·임도 검토해야

주민의 목숨을 앗아가고 축구장 면적 530배에 이르는 산림(379㏊)을 잿더미로 만든 강원도 강릉 산불의 주불이 진화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제 강릉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신속한 복구와 지원을 지시했다. 오랜 가뭄으로 숲이 바짝 마른 탓에 삽시간에 번진 이번 산불은 강풍까지 겹쳐 소방 헬기가 뜨지 못하는 바람에 피해가 커지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그제 오후 3시18분부터 이 지역에 비가 내리면서 큰불이 잦아들지 않았다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형국이었다.

이번 산불은 강한 바람을 비롯한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상황이 악화했다. 앞서 지난 2일에도 서울 인왕산을 비롯해 전국 34곳에서 산불이 나는 등 기후변화로 인해 한반도 화재 위험이 날로 심각해지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비록 기후위기가 심화시킨 재난이라고 해도 면밀하게 대책을 마련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이 겹쳐 피해를 키우는 사태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향을 보인다. 지난해 3월에는 경북 울진군에서 시작한 불이 강풍을 타고 강원도 삼척시까지 순식간에 번졌다. 봄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이 거론됐지만 별로 나아진 게 없었음이 이번 화재로 드러났다.

내년, 후년에도 봄철에 가뭄과 강풍이 겹친 상황에서 또다시 산림이 불에 타고 화마가 민가를 덮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번 강릉 산불로 확인된 사실은 바람이 세지면 소방 헬기가 진화에 나서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피해가 커진다는 점이다. 오죽 답답하면 시민들이 “강릉에 비가 오게 해 달라”며 인터넷에서 기우제를 지냈을까.

차제에 산불 대책을 전면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어제 윤 대통령은 예정했던 국민의힘 전임 원내대표단과의 만찬 회동까지 취소하며 산불 대응에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젠 구체적인 대비책이 나와야 한다. 헬기가 못 뜰 때를 대비해 진화 장비가 육로로 진입할 수 있도록 산에 길을 내야 한다는 주장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형 산불 피해를 보았던 슬로바키아에서 산속 곳곳에 물웅덩이를 만들어 효과를 본 ‘물모이’ 정책도 서둘러 검토해 보자. 서울대에서 관련 실험을 진행 중이니 속도를 내면 유효성을 판단할 수 있다. 소방 인력뿐 아니라 군경은 물론 민간에서도 함께 초기 진화를 도울 수 있도록 대응 체제를 정비하는 방안도 절실하다. 소나무가 산불 피해를 키운다는 주장이 나오고, 여기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는 만큼 집중적인 논의를 거쳐 조림의 방향도 새로 정해야 한다. 산불 대부분이 부주의에 의한 실화로 시작하는 만큼 처벌을 강화하는 논의도 필요하다. 기후변화가 위기를 고조시킨다고 언제까지 하늘만 쳐다볼 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