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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여야의 무책임한 총선용 ‘예타’ 완화 야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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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성일종 국민의힘 당시 정책위의장이 지난해 9월 당-정-과학기술계 규제개혁 및 예타제도 혁신정책간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는 모습. 뉴스1

성일종 국민의힘 당시 정책위의장이 지난해 9월 당-정-과학기술계 규제개혁 및 예타제도 혁신정책간담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는 모습. 뉴스1

재정준칙 도입도 없이 예타만 만장일치로 의결

국가채무 1000조에 심각한 세수 고려는 했나

정치 현안뿐 아니라 각종 민생 법안 등 거의 모든 사안마다 대립각을 세우던 여야가 선심성 사업 난립 우려가 있는 포퓰리즘 법안 앞에선 아무 이견 없이 손을 잡았다. 총선을 1년 앞두고서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는 어제 국가 재정이 들어가는 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예타)의 기준을 완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신공항이나 도로·철도 등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나 국가연구개발사업(R&D)의 예타 면제 총사업비 기준을 현행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국비 투입 규모는 300억원 이상에서 500억원 이상으로 올린 것이다. 기준금액 상향은 예타 제도가 시행된 1999년 이후 24년 만에 처음이다.

예타 완화는 여야가 갑작스레 합의한 건 아니다. 국책사업 규모가 최근 10년 새 두 배 가까이 커가는데 총사업비 기준은 수십 년 동안 묶여 있다 보니 사업 진행이 더디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기재부는 지난해부터 제도 개편을 준비해 왔다. 1000억, 500억원으로 상향된 사업비 기준 금액 역시 기재부 안이 그대로 반영됐다. 또 공공청사 건립 등 사업비 규모와 상관없이 원래 예타를 면제받는 대상과 관련해선 요건을 훨씬 구체화하는 한편, 예타를 면제받는 대신 ‘사업계획 적정성 검토’를 통해 사후 관리를 강화하는 지침을 이미 지난해 개정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번 4월 국회에서 재정준칙(국가재정법 개정안) 도입이 불발됐다는 점이다. 당초 여야는 지난해 예타 완화 개정안에 잠정 합의하면서 예타 완화가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재정준칙의 도입과 연계해 처리한다는 데 동의했다. 재정준칙은 관리재정수지 적자 한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3% 이내로 유지하고 국가채무비율이 GDP 대비 60%를 넘으면 2% 이내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재정준칙 법제화 조건으로 공공기관에 사회적 기업의 물품 구매를 의무화하는 사회적 경제 기본법 처리를 무리하게 요구하면서 일단 물 건너갔다. 이런 상황에서 예타 완화만 서둘러 처리한 것은 아무리 여야 간 앞선 합의가 있었다 해도 1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용 야합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기재부는 각 부처가 관련 예산을 요구할 때 ‘사전 타당성 조사’ 결과를 첨부하도록 해서 문제를 보완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경제성이 낮은데도 표를 얻기 위한 지역 민원 해결 차원에서 각종 SOC 사업을 벌여 재정을 축내는 걸 막기는 쉽지 않다.

시기적으로도 매우 부적절하다. 지난해 국가채무는 이미 1000조원을 돌파했다. 지금도 1분에 1억원씩 나랏빚이 불어나고 있다. 반면에 올 1~2월의 세수 결손은 이미 16조원에 육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타 완화는 재정 악화로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