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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세상에, 다 탔네" 화마 덮친 강릉 집 찾은 모친은 '털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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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60년 넘게 살며 저와 4남매를 키운 곳이었습니다. 그 남매가 장성해서 아이들을 데려와 추억을 공유하던 자리였고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게 사라졌습니다."

12일 강릉 아이스아레나 산불 이재민 대피소에서 만난 차주철(57)씨는 전날 산불로 어머니 안영자(82)씨 자택이 전소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밤새 어머니 곁을 지켰다. 전날 2시간 넘게 아파트 단지를 뛰어 다니며 불과 싸운 덕에 아파트는 지켰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니의 집까진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에 좀처럼 잠들기가 어려웠다.

다음 날 찾은 집, 남은 건 잿더미 뿐… 주저 앉은 어머니  

12일 강원도 강릉시 저동골길 주민인 안영자(82)씨가 전날 발생한 산불로 전소된 집을 다시 방문하곤 망연자실하고 있다. 안씨는 이곳에 60여년을 살며 4남매를 키웠다. 김종호 기자

12일 강원도 강릉시 저동골길 주민인 안영자(82)씨가 전날 발생한 산불로 전소된 집을 다시 방문하곤 망연자실하고 있다. 안씨는 이곳에 60여년을 살며 4남매를 키웠다. 김종호 기자

불안한 대피소의 밤을 보낸 주철씨와 어머니는 아침이 되자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다시 집을 찾았다. 그러나 보이는 건 완전히 불에 타 주저앉은 집의 흔적들 뿐이었다. 차씨 남매가 어릴 적 감을 따먹던 나무, 감자‧옥수수를 심은 밭, 수십년 간 장을 보관해두던 장독대까지 모두 불탔다. 창고가 있던 자리에 쌓여 있는 잔해더미 아래서는 아직도 연기가 올라와, 주변을 수색하던 소방이 물을 뿌리고 있었다. 사진 한장, 추억이 담긴 물건 하나라도 건질까 싶어 접근해봤지만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
알아볼 수 있는 건 과거 외양간으로 사용하던 공간을 개조해 만든, 막내딸 차혜숙씨의 방 한 곳뿐이었다. 단 몇시간 사이 수십년 삶의 터전이 잿더미가 된 걸 본 안씨는 집 앞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고, “아이고 세상에. 어떻게 전부 다 재로 만들어버렸네”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병을 앓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기운을 차렸으면 하는 마음에 가족들이 심어뒀던 복숭아 나무조차 새카맣게 불에 탄 걸 본 차씨의 여동생도 어머니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남편 떠난 곁 지키던 고양이도 못 찾아… 긴박했던 하루

12일 강원도 강릉시 저동골길에서 전날 발생한 산불로 전소된 어머니 안씨의 집을 찾은 딸 차혜숙(51)씨가 소방관에게 연기가 나는 곳을 알려주고 있다. 집은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고양이도 함께 대피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김종호 기자

12일 강원도 강릉시 저동골길에서 전날 발생한 산불로 전소된 어머니 안씨의 집을 찾은 딸 차혜숙(51)씨가 소방관에게 연기가 나는 곳을 알려주고 있다. 집은 불에 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고양이도 함께 대피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김종호 기자

안씨는 60여년 전 남편과 함께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3남 1녀를 낳아 길렀다. 남편이 떠난 뒤부턴 고양이 ‘에노’와 함께 이 집에서 밥을 먹고, 산책하고, 잠을 잤다. 그러나 전날 발생한 산불은 순식간에 주변을 삼켰고, 손 쓸 틈도 없이 집 뒤편 대나무 숲까지 붉게 물들였다. 놀란 안씨는 맨몸으로 겨우 화재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만큼 긴박했다. 대피 당시에도, 화재 다음날 다시 집에 와서도 애타게 고양이를 찾았지만 울음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딸 혜숙씨는 “아버지와 사별 이후 에노는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며 “어제 통화할 때도 ‘고양이를 두고 왔다. 어떻게 하냐’며 안절부절못하셨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막막하다. 당장은 이재민 대피소와 자녀들의 집을 오가며 지낼 수밖에 없다. 인천에 사는 안씨 자매는 자주 친언니를 뵈러 오며 이 집에서 며칠을 묵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마지막 여생을 이곳에서 지내고자 했던 작은 소망 역시 불에 탄 집처럼 모두 사라졌다.

“뒷산까지 불 왔다” 단지 뛰어다니며 물 뿌린 ‘소화전 3인방’

주철씨 역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전날 오전 집 근처 텃발에서 화재 소식을 처음 들은 그는 곧장 강릉시 저동의 아파트로 이동했다. 오전 9시쯤, 순간 풍속이 30㎧ 일만큼 강했던 바람은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있는 뒷산까지 불길을 밀어 붙였다. 20~30m 높이 소나무도 금새 불탔고, 바람에 날린 불씨는 아파트 단지로 날아와 떨어졌다. 순간 아파트 전체가 잿더미가 될 수 있겠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아파트엔 43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는 “관리사무소로 뛰어가서 화재를 진압에 쓸 수 있는 게 없냐고 물었더니 50m 길이의 소화전 하나가 있다고 했다”며 “무작정 뛰어갔다”고 말했다.

강원도 강릉 저동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차주철(57)씨는 11일 화재가 발생하자 아파트 소화전을 찾아 급하게 호스를 연결하고 산불 진화에 나섰다. 차씨와 아파트 관리소 직원 2명은 이후 2시간 넘게 물을 뿌리며 아파트 단지를 누볐다. 이찬규 기자

강원도 강릉 저동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차주철(57)씨는 11일 화재가 발생하자 아파트 소화전을 찾아 급하게 호스를 연결하고 산불 진화에 나섰다. 차씨와 아파트 관리소 직원 2명은 이후 2시간 넘게 물을 뿌리며 아파트 단지를 누볐다. 이찬규 기자

이후 주민 신고를 받은 소방차 3대가 아파트 단지에 들어왔지만, 소방차 역시 폭발 위험이 있는 가스 저장소를 지키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주철씨는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관리사무소 직원 2명과 함께 방화(防火) 작업에 나섰다. 2인 1조로 5분씩 교대하며 물을 뿌렸다. 그는 “검은 연기 때문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매캐한 연기로 숨쉬기도 힘들었지만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저동 소화전 3인방’의 사투는 이후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불길이 거센 뒷산, 바람이 향하는 방향에 있어 불이 옮겨붙을 수 있는 화단과 놀이터 등을 뛰어다니며 쉴새 없이 물을 뿌렸다. 작업이 끝나 갈 무렵, 다행히 아파트 뒷산 불길도 조금씩 사그라졌다. 주철씨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됐고 입고 있던 점퍼엔 여러 개의 구멍이 생겼다. 당시 3인방의 모습을 지켜봤던 아파트 주민 홍모(54)씨는 “대피하며 불 끄는 모습을 봤다. (미리 물을 뿌리지 않았다면) 불길이 가장 셌던 동은 하마터면 큰 화재 피해를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날 산불로 주택 59채, 펜션 34채 등 총 100채가 전소됐다. 안씨 주변 이웃들도 망연자실한 상태다. 정모(67)씨는 "전 재산인 집이 사라졌다"며 "안에 있던 도구며 기계며 다 사라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11일 발생한 강릉 화재로 저동의 한 주택이 불에 타 무너져 내렸다. 벽도, 지붕도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집 안의 물건들도 모두 잿더미가 됐다. 이찬규 기자

11일 발생한 강릉 화재로 저동의 한 주택이 불에 타 무너져 내렸다. 벽도, 지붕도 종잇장처럼 구겨졌고 집 안의 물건들도 모두 잿더미가 됐다. 이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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