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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남북대화 시기 집중 도청...배달차 위장해 文정부 엿들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 정보당국이 한국의 대통령실을 도감청해 작성한 기밀 문서가 유출되며 한미 양국이 관련 사안 조사에 착수했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미 정보당국이 한국의 대통령실을 도감청해 작성한 기밀 문서가 유출되며 한미 양국이 관련 사안 조사에 착수했다. 김필규 워싱턴 특파원

미국 정보당국이 핵심 동맹국인 한국의 대통령실을 도·감청했다는 의혹에 대해 한·미 양국은 구체적 입장 표명을 자체한 채 신중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 및 한·미 정상회담을 2주일 앞둔 시점에서 관련 논란이 외교 마찰 등 대형 악재로 커지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다만 수면 아래선 지난 8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기밀문서의 진위와 구체적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등 분주한 모습이다. 대통령실은 조태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역시 법무부 주도로 공식 조사에 나섰다.

정부 관계자는 “보도에 담긴 문건의 진위와 구체적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하고, 이를 토대로 구체적 내용이 확인된 이후엔 재발방지책 마련을 포함해 미국과의 총체적 논의에 나설 것”이라며 “대통령실의 시설·인프라 등에 대한 보안 점검을 포함해 내부적 후속 조치도 진행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스노든 '프리즘' 폭로, 유럽 정치인 도청 의혹도 

미국이 유럽의 정치인의 통화 등을 감청했다는 의혹과 관련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2021년 5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 측에 공식 해명을 요구했다. AP=연합뉴스

미국이 유럽의 정치인의 통화 등을 감청했다는 의혹과 관련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2021년 5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 측에 공식 해명을 요구했다. AP=연합뉴스

미국이 동맹국을 포함해 각국을 도·감청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건 처음이 아니다. 앞서 2013년 미 국가안보국(NSA)의 협력 업체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민간인 사찰 프로그램인 ‘프리즘’의 존재와 전방위적 사찰 문제를 폭로했다. 특히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휴대전화를 10년 넘게 도청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대형 외교 악재로 비화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앞으로는 (도·감청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2021년 미국이 유럽 정치인을 포함한 고위급 인사의 통화 및 인터넷 정보 등을 도·감청했다고 덴마크 언론이 보도하며 미국의 도·감청 금지 약속은 신뢰를 잃었다.

NSA 등 미 정보당국의 도·감청 리스트에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뉴욕타임스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재미 한국인 사업가였던 박동선씨를 로비스트로 활용해 미 상·하원 의원 100여명에게 불법 로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남북 대화 국면서 美 도청 활발" 

 미 NSA의 무차별적 정보 수집 문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2015년 화상 인터뷰에서 "한국도 NSA의 감시 대상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미 NSA의 무차별적 정보 수집 문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은 2015년 화상 인터뷰에서 "한국도 NSA의 감시 대상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결정을 막기 위해 금품을 살포했다는 의혹은 '코리아 게이트'라는 외교 스캔들로 비화했는데,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이 청와대 도청을 통해 이미 한국의 불법 로비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2013년 11월엔 미국이 중국·러시아 등과 함께 한국을 ‘초점 지역’으로 관리하며 도청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하며 미국의 도·감청 실태가 재차 도마 위에 올랐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미국 정보기관의 감청 활동은 특히 북한과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던 문재인 정부 때 활발했다”며 “국가정보원에서 미국 정보당국의 감청에 대한 대응 전담팀까지 운영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당시 미 정보당국이 감청 장비를 단 차량을 배달 차량으로 위장한 뒤 활동한 정황이 포착돼 청와대 주변에서 해당 차량에 대해 집중 감시를 벌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폴란드 통한 '우회 무기 지원' 논의 정황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해 4월 국회 화상연설 등을 통해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전쟁중인 국가에 살상용 무기는 지원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지원 범위를 인도적 지원으로 한정했다. 국회사진기자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해 4월 국회 화상연설 등을 통해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정부는 전쟁중인 국가에 살상용 무기는 지원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지원 범위를 인도적 지원으로 한정했다. 국회사진기자단

기밀문서 유출에서 시작된 이번 의혹은 ‘전략적 포괄 동맹’ 관계를 약속한 한국을 상대로 한 불법적인 도·감청 의혹에 더해 윤석열 정부의 외교·안보 원칙을 검증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유출된 미 정보기관의 기밀문서엔 대통령실 관계자들이 폴란드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우회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한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 등이 무기 지원을 요청할 때마다 “전쟁 중인 국가에는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앞세워 이를 거절했다. 지난 1년간 대(對)우크라 지원이 비살상 군수물자와 인도적 지원으로 한정된 이유다.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수차례에 걸친 인도적 지원에 나섰지만 살상용 무기는 지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유출된 미 정보당국의 기밀문서엔 정부가 폴란드를 통한 우회 지원으로 사실상 우크라에 포탄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한 대목이 담겼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정부가 우크라이나 국민과 피난민을 돕기 위해 인도적 지원 물품을 마려 발송하는 모습. 외교부 제공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수차례에 걸친 인도적 지원에 나섰지만 살상용 무기는 지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유출된 미 정보당국의 기밀문서엔 정부가 폴란드를 통한 우회 지원으로 사실상 우크라에 포탄을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한 대목이 담겼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정부가 우크라이나 국민과 피난민을 돕기 위해 인도적 지원 물품을 마려 발송하는 모습. 외교부 제공

하지만 기밀문서엔 지난 3월 당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이문희 외교비서관에게 “미국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신속하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언급하며 155㎜ 포탄 33만발을 폴란드에 판매하는 문제를 언급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해달라는 미국의 요청과 전쟁 중인 국가에는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 사이에서 폴란드를 통한 '우회 지원'이라는 절충안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지난해 말 미국에 수출한 155㎜ 포탄 10만발 역시 사실상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회 지원으로 평가된다. 당시 국방부는 “미 국방부와 우리 탄약업체 간에 수출 협의가 진행 중이고 미국을 최종 사용자로 한다는 전제에 변함이 없다”며 우회 지원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해당 포탄을 판매할 당시 계약서엔 최종 사용자를 미국으로 설정하는 조항이 없었다고 한다.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구매한 포탄을 우크라에 지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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