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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레퍼시픽 창업주, 동백기름 팔던 '6남매 억척맘' 남긴 유산 [비크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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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좀 더 나은 삶, 이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브랜드의 목소리를 쫓아갑니다. 세상을 바꾸는 브랜드 목소리, 'Voice Matters(보이스매터, 목소리는 중요하다)' 김민정 기자입니다.

가정의 달 포스터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한 해 시작이 어제 같은데 다음 달이면 5월입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등 가족을 위한 갖가지 행사가 많아 가정의 달이라고 일컫기도 하죠. 온 오프라인에 각종 행사 포스터도 즐비합니다. 알림판을 장식하는 삽화에는 어김없이 부모와 아이로 구성된 3인 가족 또는 4인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신경 쓴다면 머리카락 희끗희끗한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더해 6인 가족이 등장하기도 하죠) 그냥 보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어요.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어쩌면 편안한 가정의 모습일 테니까요. 과연 그럴까요?

미성년 자녀를 둔 가구 가운데 열에 둘은 한부모 가정입니다. 미혼, 또는 배우자와 사별이나 이혼 등으로 모자 가족, 또는 부자 가족이 된 거죠. 대가족, 핵가족, 아이 없는 가족처럼 다양한 가족 구성의 하나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관심 밖에 머물거나, 종종 부정적 시선과 마주하게 됩니다. 홀로 당당히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싱글맘, 싱글 대디 연예인들의 활약에 한부모 가정에 대한 편견이 전보다 많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멉니다.

1960년대 초 고 서성환(가운데) 아모레퍼시픽 창업주가 서울 영등포 공장의 잔디밭에서 여성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육아와 생계의 짐을 짊어진 어머니에게서 곧은 성품과 강한 생활력을 엿본 그는 회사의 모태를 어머니이자 여성이라 말할 정도로 여성과 아동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1960년대 초 고 서성환(가운데) 아모레퍼시픽 창업주가 서울 영등포 공장의 잔디밭에서 여성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육아와 생계의 짐을 짊어진 어머니에게서 곧은 성품과 강한 생활력을 엿본 그는 회사의 모태를 어머니이자 여성이라 말할 정도로 여성과 아동복지에 관심이 많았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20년 희망의 두드림, 그 시작

다양성과 포용이 화두가 된 지금도 이러한데 20여년 전은 어떠했을까요? 이혼이나 사별로 급작스레 생계를 책임지게 된 한부모 가정 여성 가장들은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혼자 아이를 보면서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일을 하기도 어려웠고, 어렵사리 일자리를 찾는다 해도 소규모 사업장 임시직이나 아르바이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돈도 많이 벌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돈도 버는 일로는 장사가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작은 가게 하나 여는 데 필요한 목돈을 은행에서 빌리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죠.

지난 2021년 발표된 한부모가족 실태조사(3년마다 조사)에 따르면 모자 중심 가구가 67.4%로 부자 중심 가구(32.6%)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월평균 소득은 245만3000원(세금 및 사회보험료 등 제외)으로, 2021년 전체 평균 가구 가처분 소득 416만9000원에 비해 턱없이 모자랍니다. 20년 전에는 이들의 월평균 소득이 100만원이 채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죠. 당장 먹고 사는 것조차 힘겨운데, 세간의 따가운 시선은 이들을 더욱 위축시켰습니다. 막막한 앞길에 출구가 생긴 건 지난 2003년이었죠.

고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의 유산을 기반으로 지난 2003년 한부모 가정 여성 가장을 위한 '희망가게' 사업이 시작됐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고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의 유산을 기반으로 지난 2003년 한부모 가정 여성 가장을 위한 '희망가게' 사업이 시작됐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고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평소 여성과 아동복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집 부엌에서 동백기름을 만들어 가가호호 팔던 6남매의 억척 맘이었습니다. 1930년대 그의 어머니가 만든 '창성상회', 그곳에 담긴 화장품 제조술과 진심이 태평양을 거쳐 오늘날의 아모레퍼시픽이 된 거죠. 육아와 생계의 짐을 짊어진 어머니에게서 곧은 성품과 강한 생활력을 엿본 고 서성환 창업주는 늘 회사의 모태는 어머니고 여성이다 강조했습니다.

1964년에는 아모레퍼시픽이 방문 판매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는데요. 이때 생계가 어려운 한부모 가정 여성 가장들이 대거 참여했고, 아모레퍼시픽의 비약적 성장에 일조했죠. 경영도 마음 씀씀이도 여성에 맞닿아 있던 고 서성환 선대 회장의 이 같은 뜻을 기리며, 그가 세상을 떠난 2003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을 비롯한 가족들은 유산 중 50억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해 '희망가게'라는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희망가게 대출은 일 년에 총 세 차례 전국적으로 공모를 거쳐 진행됩니다. 창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사업계획서를 토대로 면접과 기술 심사를 거쳐 선발된 이들에게 창업 자금을 대출해주는 방식입니다. 보증금을 포함해 최대 4000만원의 창업 자금을 연 1%의 금리로 빌려주는데요. 상환 기간은 8년이고, 상환금과 이자는 또 다른 한부모 가정 여성 가장을 위한 창업 지원금으로 사용됩니다.

20년 만 500개 희망가게, 한부모 가정에 남긴 것

금융 소외층을 대상으로 진행된 착한 대출은 지난 20년간 탄탄히 성장해나갔습니다. 2004년 7월 희망가게 1호점 ‘미재연 정든 찌개'(현재는 폐업)를 시작으로 2011년 100호점, 2013년 200호점, 2016년 300호점, 2020년 400호점, 그리고 지난달 500호점을 돌파했죠. 업종 역시 음식점뿐 아니라 개인택시, 재활용품 가공업체, 피부관리샵, 천연비누 제조 등 다채롭게 확장됐습니다. 아모레퍼시픽과 희망가게를 운영하는 아름다운재단에 따르면 지난해 기존 대출 상환율은 80% 이상, 가게 생존율(3년 이상 영업을 지속하는 비율)은 72%라고 하네요.

희망가게 대출은 일 년에 총 세 차례 전국적으로 공모를 거쳐 진행된다. 창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사업계획서를 토대로 면접과 기술 심사를 거쳐 선발된 이들에게 창업자금을 대출해준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희망가게 대출은 일 년에 총 세 차례 전국적으로 공모를 거쳐 진행된다. 창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사업계획서를 토대로 면접과 기술 심사를 거쳐 선발된 이들에게 창업자금을 대출해준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3년 가까이 진행된 코로나 19 팬데믹은 희망가게 창업주에게는 그야말로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사업 확장은커녕 유지조차 힘겨울 때도 70개 이상의 매장을 새롭게 열었어요. 상환금 유예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죠. 긴급 생활안전자금을 주고 아모레퍼시픽 사내 라이브커머스(실시간 온라인 홈쇼핑)를 통해 창업주 가게의 제품을 파는 등 판로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나하나 쌓아 올린 자립기반이 무너지지 않도록 힘을 더한 것이죠. 아모레퍼시픽과 아름다운재단은 지난 20여년을 이어오며 희망가게가 한부모 가정에 남긴 진짜 메시지에 주목합니다.

"희망가게는 온전한 자립으로 함께 가는 과정이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업을 통해 자신이 뭔가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삶에 대해 자신감을 회복하게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한찬희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한부모가정창업자 분들이)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보다 도움 주는 사업을 함께한다는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 사업을 시작하는 분들을 위한 대출 지원사업이지만, 곧 사업이 안정화되고 그 돈이 회수되면 또 다른 분들에게 다시 지원되는 나눔의 선순환이기 때문입니다" (송호준 아모레퍼시픽 CSR 팀장)

금융 소외층 한부모 가정 여성 가장을 대상으로 한 '희망가게' 대출지원사업은 지난 20년 동안 나눔의 선순환을 실현하고 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금융 소외층 한부모 가정 여성 가장을 대상으로 한 '희망가게' 대출지원사업은 지난 20년 동안 나눔의 선순환을 실현하고 있다. 사진 아모레퍼시픽

정상, 비정상 프레임은 누가 만드나

500호점의 첫 시작을 알린 분부터 가장 최근 창업하신 분까지 만나 뵙고 얘기를 듣고 싶은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전과는 그래도 조금은 달라진 사회 분위기에 내심 많은 분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죠. 그러나 보기 좋게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대다수 분은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하셨죠. 혹여 좋은 뜻에서 건넨 자신의 말들이 자녀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컸습니다.

이름과 얼굴이 노출되는 게 아직도 꺼려지는 건 자신보다 자신의 자녀 때문이었죠. 드라마, 영화 등 대중문화를 통해 이전보다 다채로운 가정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뿌리 깊은 편견과 그로 인한 상처가 걱정되는 것이지요.

김희경 전 여성가족부 차관은 『이상한 정상가족』(동아시아)에서 친모-친부-아이로 구성된 3~4인 가족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장 아파하는 건 아동이라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이혼 가정, 미혼 가정 등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가족의 형태가 있으니까요.

"저는 제가 자랑스러워요. 요즘" 
희망가게 379호점 창업주가 환하게 웃으며 건넨 이 목소리가 더 큰 메아리가 되길 바랍니다. 혼자서 아이를 양육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연민도 동정도 따가운 시선도 아닌 편견 없는 포용이 아닐까요.

비크닉 Bic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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