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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우의 밀리터리 차이나] 수십 년 공들인 친중화… 전쟁없이 오커스 무력화한다(上)

중앙일보

입력

영국은 ‘신사의 나라’로 불리지만, ‘대외관계에서 이처럼 지저분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각종 모략과 공작으로 점철된 나라다. 역사상 최초의 정보기관은 중국 15세기 명나라 때 만들어진 ‘동창(東廠)’이다. 하지만 이 조직은 주로 반역자 색출을 위한 황제 직속의 친위·방첩조직 성격에 가까웠던 반면,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최측근 프랜시스 월싱엄 경(Sir. Francis Walsingham)을 시켜 조직한 비밀공작조직은 주로 대외 정보 수집과 공작, 사보타주 임무를 수행했다.

이 조직은 프랑스 내부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해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을 유발하기도 하고, 스페인에서 ‘무적함대’의 출항 일정과 전쟁 준비 상황에 대한 첩보를 수집하기도 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경쟁자였던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의 메리 여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다양한 공작을 수행했다.

세계 최초의 현대적 정보기관과 전쟁에서 ‘반칙’으로 통하는 비정규전 전문 부대를 처음 만든 것도 영국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영국은 ‘신사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보원 이미지. [사진 셔터스톡]

정보원 이미지. [사진 셔터스톡]

대의명분보다는 철저하게 실리를 좇는 영국인들의 사고체계는 유럽 외곽의 외딴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대영제국의 초석으로 만드는 데 충분했다. 그들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사략선(Privateer ship)을 대량으로 허가해 주고, 국가 차원에서 아편을 생산해 내다 파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영국과 관계를 맺고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는 영국의 스파이가 침투해 있었고 스파이들은 주재국(駐在國)에 영향력을 행사해 해당 국가의 유력 인사를 포섭하거나 제거하는 등의 공작도 벌였다. 지금은 국제적인 영향력이나 전반적인 국력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5대 핵 강국이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 영국이다.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공작과 정책으로 국력을 키우고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랐던 영국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지금 중국이 벌이고 있는 비도덕적·비윤리적 행태들을 미국·영국과 같은 서방 강대국이 비난하는 것이 옳은 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하게 된다. 중국인의 시각, 즉 ‘내재적 접근론’으로 생각해 보면 중국 공산당이 세계 각국에서 벌이고 있는 ‘지저분한 짓’은 중국 국익을 위한 최선·최고의 선택이다. 스파이를 심고, 친중 인사를 키워 공작 대상 국가의 국력을 약화하고, 대상 국가가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하게끔 유도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보편타당한 정의·도덕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 행위다.

그러나 이러한 공작 행위는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창출해 중국의 국익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중국 위정자들에게는 ‘범죄’가 아닌 ‘의무’의 영역에 속한다. ‘호주 노동당’은 중국이 수십 년간 공들인 친중화(親中化) 공작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1월 시진핑 중국 주석과 앤서니 앨버니지(Anthony N. Albanese) 호주 총리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정상회담을 갖기 전 악수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시진핑 중국 주석과 앤서니 앨버니지(Anthony N. Albanese) 호주 총리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정상회담을 갖기 전 악수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2022년 5월 출범한 노동당 정부를 이끄는 앤서니 앨버니지(Anthony N. Albanese) 총리는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호주 정계의 대표적 친중 인사다. 이민자가 많은 호주에는 무려 100만 명의 중국계 시민이 거주하는데, 당시 총선에서 중국계 시민의 75%가 노동당에 몰표를 던진 것이 정권 교체의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했다.

호주 노동당은 ‘중도좌파’로 포장돼 있으나 전통적으로 경제·안보·젠더·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급진좌파 색채를 보이는 정당으로, 친중 성향이 매우 강한 정당이다. 현직 총리인 앨버니지도 능숙한 중국어를 구사할 만큼 중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높은 인물이고, 전 총리인 줄리아 길라드(Julia E. Gillard)나 케빈 러드(Kevin M. Rudd) 모두 강성 친중 인사로 꼽힌다.

줄리아 길라드 전 총리는 “중국의 군사적 팽창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망언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고, 케빈 러드 전 총리는 학부 전공이 중국어로 통역사 수준의 중국어를 구사할 뿐만 아니라 역대 호주 총리 중에 중국 정상과 가장 많이 만나 애정 공세를 편 호주 정치권의 대표적인 친중 인사다. 총리 퇴임 후 옥스퍼드대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이 시진핑 리더십에 대한 내용이었을 정도다.

앨버니지 총리는 호주 국민의 높은 반중 정서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반중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변한 것은 호주가 아니라 중국”이라며 “중국이 호주에 대한 제재부터 먼저 폐기하라”고 성토하는 등 중국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내놨지만,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앨버니지 내각은 출범 직후 당 2인자이자 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리처드 말스(Richard Marles)를 앞세워 중국과 접촉했다. 말스 부총리는 취임 직후 동맹국인 미국·영국 국방장관보다 중국 국방부장을 먼저 찾았다. 아예 중국계 인사인 페니 웡(Penny Ying-yen Wong) 외교장관 역시 우방국 외교장관보다 중국 외교부장을 먼저 찾았다. 국방·외교장관 접촉 후 중국은 “화기애애하고 생산적인 대화였다”며 호주와의 관계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2022년 5월. 호주의 보수적 로비단체인 ‘어드밴스 오스트레일리아’가 고용한 차량이 시진핑이 야당인 노동당 후보에 투표하는 사진을 걸고 거리를 달리고 있다. 집권당인 자유국민연합은 ″노동당이 중국에 유화적″이라고 비난한다. [AP=연합뉴스]

2022년 5월. 호주의 보수적 로비단체인 ‘어드밴스 오스트레일리아’가 고용한 차량이 시진핑이 야당인 노동당 후보에 투표하는 사진을 걸고 거리를 달리고 있다. 집권당인 자유국민연합은 ″노동당이 중국에 유화적″이라고 비난한다. [AP=연합뉴스]

호주 노동당의 친중 색채는 중국이 오랫동안 공을 들인 결과다. 호주 방첩기관인 ASOI(Australian Security Intelligence Organization)는 지난 총선 당시 “선거를 앞두고 외국 정부기관이 자국에 우호적인 정치인을 호주 정치권에 심으려는 시도를 적발했다”고 밝힌 바 있었다. ASOI가 밝힌 외국 정보기관은 중국 국가안전부(MSS : Ministry of State Security)였다. ASOI가 적발한 MSS의 공작은 빙산의 일각이었고 해당 사건에 앨버니지 당시 노동당 당수도 연루됐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호주 노동당은 “근거 없는 색깔론”이라며 맞받아쳤고, 결국 선거에서 승리했다.

외국의 선거에 개입하는 행위는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이고 전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주권 침해 행위지만 앞서 영국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 입장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중국 시각에서 봤을 때 미국과 연대하며 반중 전선을 구축하던 호주는 중국 국익과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었고, 중국 정부에게는 법적·도덕적 정당성을 떠나 이러한 ‘호주 위협’을 제거할 책임이 있었다. 결국 중국은 성공했고, 그 결과는 ‘오커스(AUKUS)’ 파트너십 무력화라는 최대의 효과로 나타났다.

조 바이든(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13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포인트 로마 해군기지에서 열린 오커스(AUKUS: 호주·영국·미국의 안보동맹) 정상 회담 중 앤서니 앨버니지(왼쪽) 호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를 만나고 있다. [AP=뉴시스]

조 바이든(가운데)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13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포인트 로마 해군기지에서 열린 오커스(AUKUS: 호주·영국·미국의 안보동맹) 정상 회담 중 앤서니 앨버니지(왼쪽) 호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를 만나고 있다. [AP=뉴시스]

오커스 파트너십은 미국과 영국, 호주 3국이 중국을 겨냥해 결성한 안보 협력체다. 미국·영국이 호주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 획득을 지원하고 이 잠수함으로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에 대한 전략적 포위망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이 파트너십의 목표였다.

이 파트너십에는 양자 컴퓨터·인공지능·사이버 기술 등 첨단 과학기술은 물론, 장거리 공격·네트워크 협동 전투·핵잠수함 등의 기술을 삼국이 공유하고, 이를 통해 중국을 겨냥한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한다는 분명한 지향점이 있었다. 미국을 설득해 이 파트너십을 끌어낸 스캇 모리슨(Scott J. Morrison) 당시 호주 총리는 2021년 가을, 오커스 파트너십 출범 발표 후 최단기간 내에 핵잠수함을 확보하겠다며 국내 강성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주 국내 일자리 창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핵 잠수함 직도입론’을 꺼내기도 했다.

미국이 핵 비확산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호주의 손에 핵잠수함을 쥐여주려 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해군력, 특히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전략원잠(Strategic Missile Submarine) 전력을 미 해군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오커스 레짐 출범의 밑바탕이 됐다.

중국은 다탄두 핵미사일인 JL-2 계열 SLBM을 12발 탑재하는 094형 전략원잠 8척을 전력화하는 동시에 탄두 숫자와 사거리가 대폭 늘어난 차세대 SLBM인 JL-3 24발을 탑재하는 096형 전략원잠도 건조하고 있다. 이들 잠수함은 하이난다오(海南島)를 거점으로 운용 중인데, 현용 주력 전략원잠인 094형에 탑재되는 JL-2 계열은 사거리 부족 문제 때문에 서태평양으로 나오지 않는 한 미국 동부 해안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중국은 유사시 이 잠수함들을 바시 해협(Bashi Channel) 동쪽으로 어떻게든 내보내려 하고 미국은 어떻게든 이를 저지하려 하고 있다.

문제는 잠수함의 숫자다. 미국은 26척의 로스앤젤레스급(Los Angeles class)과 21척의 버지니아급(Virginia class), 3척의 시울프급(Seawolf class)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공격용 원자력 잠수함 대국이다. 문제는 미 해군의 작전 영역이 전 세계이고, ‘고작’ 50여 척의 공격원잠만으로는 작전 소요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군함은 기본적으로 3직제로 움직인다. 3척의 군함이 있으면 1척은 작전, 1척은 휴식 및 정비, 1척은 훈련을 하는 방식으로 순환 운용된다는 말이다. 이는 50여 척의 현역 공격원잠 가운데 작전 중인 잠수함의 숫자가 17척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17척으로 중국, 러시아와 같은 적성국의 전략원잠에 대한 감시·추적 임무를 수행하고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각각 최소 1~2척씩 활동 중인 항모전단의 호위 임무도 맡아야 한다.

SLBM을 탑재하고 전략 초계 임무를 수행하는 아군 잠수함에 대한 호위 임무는 물론, 토마호크 미사일을 사용하는 지상 공격 임무, 적성국 연안에서의 특수부대 작전 지원 임무도 수시로 부여된다. 이 때문에 미 해군 잠수함 승조원의 근무 강도는 타 함종 승조원과 비교할 수 없는 살인적인 수준으로 악명이 높다.

지난 1월 오하이오급 핵전략잠수함 USS네바다(SSBN-733)가 태평양 괌 아르파항구에 정박했다. [사진 미 해군]

지난 1월 오하이오급 핵전략잠수함 USS네바다(SSBN-733)가 태평양 괌 아르파항구에 정박했다. [사진 미 해군]

그렇다고 해서 공격원잠의 숫자를 무턱대고 늘릴 수도 없다. 미 해군이 현재 조달하고 있는 버지니아급 잠수함의 척당 건조비는 32억 달러, 한화 4조 2000억 원에 육박한다. 아무리 ‘천조국’이어도 이런 잠수함을 마구 찍어내는 것은 무리다. 과거 7개소에 달했던 원자력 잠수함 건조 가능 조선소가 제너럴 다이내믹스 일렉트릭 보트(General Dynamics Electric Boat)와 헌팅턴 잉갤스 인더스트리 뉴포트 뉴스(Huntington Ingalls Industries Newport News) 2개소로 줄어든 것도 잠수함 대량 건조를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 조선소는 잠수함의 신규 건조와 정비·연료 교체 작업은 물론, 항공모함이나 순양함, 구축함 건조도 함께 수행하기 때문에 각 조선소가 연간 최대 건조할 수 있는 잠수함 숫자는 1.2척 수준에 불과하다. 원자력 잠수함은 원자로가 들어가기 때문에 일반적인 조선소에서는 건조가 불가능하며, 차폐 시설이 구비된 전용 건조 도크를 만드는 데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지난 2021년 10월 발생한 시울프급 잠수함 코네티컷(USS Connecticut, SSN-22)의 사례는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지원 인프라 부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미 정치권에서 큰 논란이 됐었다. 당시 코네티컷은 남중국해 하이난다오 인근에서 정체불명의 수중 물체와 충돌해 함수(艦首) 부분이 대파됐다.

미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 코네티컷호가 2021년 7월31일 일본 요코스카항에 도착한 모습. [사진 미 해군연구소]

미 해군의 핵추진 잠수함 코네티컷호가 2021년 7월31일 일본 요코스카항에 도착한 모습. [사진 미 해군연구소]

코네티컷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시울프급 잠수함이자 미 해군에서도 최고의 전략 자산 중 하나로 대접받는 고성능 잠수함이었는데, 이 잠수함이 파손됐을 때 미 해군에서 가장 먼저 나온 이야기가 바로 ‘조기 퇴역’이었다. 지원 인프라 부족으로 언제 수리가 될지, 얼마나 큰 비용이 들어갈지 가늠조차 되지 않으니 그냥 퇴역시켜버리자는 것이었다.

이 잠수함이 수리 도크로 들어간 것은 사고 발생 17개월이 지난 올해 3월 말이었다. 척당 약 50억 달러, 한화 6조 5500억 원 가치의 최고급 전략 자산이 무려 17개월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두에 계류된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주가 핵잠수함을 갖고 남중국해 지역에서 중국 전략원잠에 대한 감시·정찰 임무를 맡아 주면 미국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을 것이다. 미국이 핵잠수함 관련 기술을 제공해 주기만 하면 핵잠수함 획득·운용 비용은 전부 호주가 부담할 것이고, 미군과 공조체제를 갖춰 미 해군 잠수함에 걸린 임무 부하(負荷)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 (下)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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