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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데이터 가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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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전영선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영선 K엔터팀장

전영선 K엔터팀장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제시한 개념이다. 10년 전 현대 사회를 ‘피로사회’로 명명한 그는 신작 『정보의 지배』에서 디지털 정보체제(Informationsregime)가 인간을 데이터 가축으로 사육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탐욕스럽게 생산한 정보와 데이터를 착취하면서 지배를 공고히 해 나간다고 말한다.

이 체제에서 인간의 자유는 일종의 망상이다. 플랫폼을 잘 활용한다고 생각하는 데이터 가축은 각각 색다른 무엇인가를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실상은 해시태크(#)를 타고 유도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각종 틱톡 챌린지, 인스타그램 릴스를 몇 시간씩 본 뒤 자신도 모르게 암시된 제품을 사들이는 사이클을 반복한다. 인간은 소통하고 있다고 믿고, 이 믿음에 기반해 다시 정보를 생산함으로써 투명한 디지털 감옥에 갇힌다. 최종 승자는 누구일까. 구글로 대표되는 정보통신(IT) 플랫폼이 가장 큰 몫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자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두렵다. 데이터 가축은 내면에서 우러난 욕구에 따라 스스로 발가벗는다. 다른 무리를 붙잡을 데이터 생산에 몰두한다. 우유 생산량이 좋은 젖소가 사랑받는 것처럼, 데이터를 많이 만들어 시스템의 보상을 받는 인플루언서는 동경이 대상이 된다. 쏟아지는 ‘좋아요’는 달콤하지만, 이는 함정이다. 내가 나라고, 내 사고가 내 생각이라고 단언하기 힘든 허무한 세계, 자유와 감시가 하나인 세상이다.

철학자의 이런 서늘한 시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생각 거리는 많다. 우선 체제가 배제하는 집단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지배 시스템 안으로 못 들어오거나 들어갈 수 없는 집단은 이미 고초를 겪고 있다. 가령 배달 애플리케이션, 택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지 못하는 노인은 체제가 버려도 좋은 존재다.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는 인간은 사회적 존재를 부정당한다. 코로나19 시대 QR코드를 찍지 못하는 사람이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이는 과장이 아니다.

물론 지난 모든 레짐(체제)이 그렇듯, 빈틈은 있다. 의심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균열도 쉽게 전파된다. 인간의 가치가 최신 기술로 쉽게 대체되는 요즘, 존재 증명을 헐값에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욱 소중해지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