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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깨기 같다"…금감원장 방문 맞춰, 4대 은행 금리 다 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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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30일 서울 영등포구 우리은행 시니어플러스점 개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30일 서울 영등포구 우리은행 시니어플러스점 개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은행권이 줄줄이 ‘대출금리 인하’라는 ‘선물 보따리’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선물을 뜯어서 국민에게 나눠주는 일은 정부가 대신하는 형국이다. 금리 인상기 은행이 ‘이자 장사’를 한다며 공개 압박을 행사했던 정부는 금리가 차츰 안정되자 은행의 ‘상생 금융’ 방안에 전면에서 박수를 쳐주고 있다. 대출금리 인하가 ‘정치적 이벤트’화하는 모습이다.

30일 우리은행은 가계대출 모든 상품의 금리를 최대 0.7%포인트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고령 고객을 위한 상생 금융 차원의 '시니어플러스' 영업점을 개장하는 자리에서다. 이날 개점 행사에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과 임종룡 신임 우리금융그룹 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 원장은 이날 “최근 시중은행을 중심으로 상생 금융 발표가 이어지고 있는 데 대해 매우 감사하다”고 치하했다.

4대 시중은행은 이 원장의 영업점 방문 시점에 맞춰 대출금리 인하와 금융 지원책을 꺼내 들고 있다. 이날 우리은행은 금리 인하 외에도 청년 자립 지원을 위한 도약대출, 소상공인 긴급대출과 연체금 상환 지원 등 총 20조원 규모의 상생 금융 패키지도 함께 제공하기로 했다. 연간 지원 규모로는 2050억원에 이른다.

지난달 23일 이 원장은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을 찾았다. 당시 하나은행은 서민 금융상품인 새희망홀씨대출의 금리를 최대 1%포인트(신규 취급 대상)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금융상품 개발 단계에서부터 이자와 수수료 결정체계를 원점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다음 목적지는 KB국민은행이었다. 국민은행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본점에서 이 원장과 간담회를 열고 가계대출 전 상품의 금리를 최대 0.5%포인트 인하한다고 밝혔다. 지난 24일에는 신한은행이 이 원장 방문 행사에서 총 1623억원 규모 금융 지원책을 발표했다. 이날 신한은행은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0.4%포인트, 전세자금대출은 0.3%포인트, 신용대출 0.4%포인트, 새희망홀씨대출에서 1.5%포인트 인하하기로 했다.

금감원장이 은행 영업점을 돌아가며 방문할 때마다 각 은행이 대출금리를 내려주는 모습은 상대를 하나씩 굴복시키는 ‘도장 깨기’와 같다는 지적이 금융권에서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감원장이 영업점에 오기 전에 미리 선물을 준비해둬야 하는 분위기”라며 “대출금리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은행도 향후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객의 이자 부담을 낮춰야 한다는 인식은 이미 있었는데, 당국이 움직이는 금리를 내리는 모양새가 연출되고 있다”고 전했다.

대출금리가 올라 서민의 한숨이 깊어지던 때 은행은 예대마진(예금·대출 금리 차이로 얻는 수익)을 늘려 최고 실적을 내며 눈총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정부가 공개적으로 시장 가격(금리)을 압박하는 구조가 지속 가능한지다. 결국 은행이 상품 ‘가격’에 해당하는 대출금리를 내리면 ‘원가’ 격인 예금금리도 올리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실제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달 4대 시중은행의 가계 예대금리차(정책서민금융 제외)는 평균 1.33%포인트로 2개월째 확대되고 있다. 대출금리를 내려도 예금금리는 더 큰 폭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출자는 한숨 돌릴 수 있지만, 가만히 있던 예금자의 이익은 감소하는 시장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전문가는 금융당국이 시중은행의 금리 결정에 개입할 때는 향후 시장에 미칠 구조적인 영향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세금이 높아지는 것과 금리가 오르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인 것은 사실”이라며 “과거 정부에서도 금리가 오를 때 여론의 눈치를 보고 은행에 압박을 가하는 일이 반복됐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경제 상황이 변하고 금리가 오를 때마다 정권이 개입하는 것보다, 구조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조언했다.

사실 최근 각국의 은행 위기 속에서도 국내 은행이 수천억원 규모의 상생 금융 지원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은행이 상대적으로 높은 안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는 기준금리 인상 기조 속에서 은행의 재무구조가 악화하며 발생했다. 금리 인상기 불어난 예금을 유가증권 등 고위험 상품에 투자한 SVB와 달리 국내 은행은 대출을 늘려 예대마진을 확대했다. ‘이자 장사’는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글로벌 은행위기 우려에서 고객의 돈을 지키는 데는 유리한 '안전지대'가 된 셈이다.

물론 최근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점도 은행의 상생 금융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날 우리은행이 개설한 시니어플러스 영업점은 오프라인 지점 주요 고객층인 고령자를 위해 고령 친화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배치하고, 금융상품을 판매할 때도 원금보장형 위주로 추천하고 있다. 앞서 하나·신한·국민은행 등은 저소득층에 에너지 생활비를 지원하고, 소비자에 금융 교육을 제공하며, 서민·금융소외계층을 지원하는 등의 상생 금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해 말부터 각 은행에서 이미 자발적으로 상생 금융 방안을 내놓고 있던 상황이다. 앞으로도 추가 지원책을 검토 중”이라며 “은행 간의 경쟁에서 금리 등으로 매력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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