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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민호의 레저터치

봄은 바둑 같은 거야, 연진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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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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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레저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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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밤을 새웠어, 연진아.

원래 연속극은 잘 안 보는 ‘아재’지만 이 연속극은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어. ‘더 글로리’ 시즌 2가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부문 1위를 했다지? 대단해 연진아, 멋지다! 박연진!

내가 ‘더 글로리’를 밤새워 본 건 순전히 바둑 때문이야, 연진아.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뒀고, 지금은 바둑 기사도 쓰지만 나는 한 번도 바둑이 섬뜩한 복수의 상징이 될 거라곤 상상을 못 했어. ‘더 글로리’를 보다가 되게 신나서 바둑 대사들을 모아봤어. 공 많이 들였는데… 읽어봐, 연진아.

‘상대가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으면 이기는 게임이라니 아름답더라.’ ‘바둑은 침묵 속에서 욕망을 드러내고 매혹하고 매혹당하며 서로를 발가벗겨.’ ‘침묵 속에서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는 게 좋아서요.’ ‘남의 집을 잘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해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더 글로리’에서 남녀 주인공이 바둑을 두는 장면. 드라마에서 바둑은 복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사진 넷플릭스]

‘더 글로리’에서 남녀 주인공이 바둑을 두는 장면. 드라마에서 바둑은 복수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사진 넷플릭스]

바둑이 집이 많으면 이기는 것도, 바둑이 소리 없이 죽고 죽이는 싸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침묵 속에서 욕망을 드러내고 서로를 발가벗기는 게임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 해봤어, 연진아. 혜정이가 너한테 일러바쳤잖아. “문동은, 네 남편이랑 바둑 둬.” 이 대사가 네 남편이 동은이랑 바람피운다는 뜻처럼 쓰이더라. 이제 바둑도 마음대로 못 두는 게 아닌가 싶어, 연진아.

네 말마따나 나 같이 없는 것들은 인생에 인과응보와 권선징악만 있는 줄 알아, 연진아. 그래서 바둑을 좋아해. 바둑에선 인과응보가 정확히 지켜지거든. 권선징악도 마찬가지야. 악수를 두면 꼭 대가를 치러야 해. 무엇보다 내가 가진 걸 버릴 줄 알아야 해. 넌 끝까지 다 가지려다 폐허가 됐지만.

바둑에는 복기라는 게 있어, 연진아. 바둑이 끝났는데도 바둑돌을 다시 놓으며 복습을 해. 어떤 수가 잘못됐고, 여기 뒀으면 이렇게 됐을 거라며 승자와 패자가 다시 바둑을 둬. 패자에게 복기는 흉터와 같아서 시종 가렵고 아리고 뜨거워. 그래도 복기를 해. 복기는 반성과 같은 거거든. 바둑에는 반성이 있어, 연진아. 네가 사는 글로리한 세상에는 없지만.

정치도 심란하고 경제도 암담한데 WBC 야구까지 박살 났어, 연진아. 한동안은 모든 날이 흉흉할 거야. 찌개 끓이는 그런 저녁도 없을 거고. 이제 천천히 말라 죽을지 몰라.

그래도 봄이야, 연진아. 부동산 할머니가 동은이한테 “봄에 죽자”고 한 말, 기억나? 난 그게 다시 살자는 말로 들렸어. 봄이 오면 꽃이 피니까. 꽃이 피는 건 새 생명이 돋는 거니까. 그런데 알아? 봄에 피는 꽃은 봄에 죽어, 연진아. 그 영광스러운 꽃이 죽어야 열매가 열려.

봄은 바둑과 같은 거야, 연진아. 모든 게 침묵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저마다 맹렬하거든. 우리, 봄을 살자, 연진아. 바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