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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손민호의 레저터치

산에서 불이 내려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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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손민호 기자 중앙일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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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레저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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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불이 내려와. 그런 거 봤나? 세상이 쌔까만 게 하나도 안 보이는데, 바람은 또 겁나게 쎄고, 무서운데, 어떻게 할진 모르겠고, 이런 난리가 없는 거라. 근데 서풍이 불렀다이. 서풍이 불어 갖고 불이 바다 쪽으로 온 거래. 바다 쪽은, 펜션이고 농가고 다 도망가느라고…. 불이 바다 쪽으로 와서 그래도 다행인 거이, 동풍이었으면, 대관령으로 불이 갈 뻔했으이, 그리됐으면, 아이고….”

강원도 대표 트레일인 ‘강릉바우길’의 이기호(64) 사무국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들려준 지난 11일 강릉 산불 상황이다.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그는 연신 강릉 사투리를 쏟아냈다. 강릉바우길 11구간이 산불 현장을 지나간다.

지난 11일 강릉 산불로 관동 제일의 전통 가옥 선교장도 피해당할 뻔했다. 사진은 선교장의 정자 활래정. 손민호 기자

지난 11일 강릉 산불로 관동 제일의 전통 가옥 선교장도 피해당할 뻔했다. 사진은 선교장의 정자 활래정. 손민호 기자

11일 일어났던 강릉 산불은, 말이 산불이지 강릉 시내에서 일어난 불이었다. 이기호 국장의 말을 다시 빌리면, 강릉은 산이 너무 많아서 어지간한 산은 이름도 없다. 그 이름 없는 강릉의 산 중에서 강릉 시내 서북쪽 동네 뒷산 자락에서 불이 났다.

더 큰 일 날 뻔했던 게, 불이 난 그 동네 뒷산이 오죽헌과 선교장의 뒷산이었다. 서남풍이 불어 불이 동북쪽으로 번졌지, 북동풍이 불었으면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이 태어난 오죽헌(보물 제165호)도, 아흔아홉 칸을 자랑하는 관동 제일 사대부가 가옥 선교장도 잿더미가 될 뻔했다.

불길이 서쪽을 향했으면, 2007년 광화문 복원에 쓰인 금강소나무를 벌채한 소나무 숲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명주군왕릉 뒤편의 이 소나무 숲은 강릉 최대 송이버섯밭이기도 하다. ‘소나무 아니면 다 잡목’이라고 할 만큼 소나무가 많은 강릉에서도 잘 생긴 금강소나무가 많은 숲으로 통한다. 넓게 보면 대관령 아랫도리가 되는 숲이다.

“헬기도 못 뜨고, 온다는 비는 안 오고….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나? 비가 내렸다이. 그냥 비가 아니라 소나기가 막 쏟아진 거래. 그래서 불이 잡혔으이. 비가 와도 쫌만 온다 그랬는데, 그렇게 퍼부을 줄 누가 알았겠나. 희한하제?”

강릉은 대관령 너머 마을이다. 대관령(大關嶺·835m)은 이름 그대로 큰 관문인 고개다. 영동과 영서가 이 고개로 나뉘고, 관동지방이라는 지명도 이 고개에서 유래한다. 대관령 깊은 숲에 국사성황신 범일국사(810∼889)를 모시는 신당이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강릉단오제가 대관령 성황당의 범일국사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에서 시작한다. 기적 같았던 소나기는 혹 범일국사가 내린 게 아닐까. 산림청은 11일 오후 3시 18분 갑자기 비가 내린 뒤 강풍이 잦아들어 소방 헬기를 투입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산불에 발만 동동 구르는 봄날이 되풀이되고 있다. 메마른 하늘을 원망하고, 모진 바람만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강릉 산불로 피해를 본 모든 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