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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트럼프만 기다린다" 핵버튼 대신 미사일만 쏘는 속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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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지난 7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 11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주재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결정 등을 통해 한·미 군사훈련에 대해 '압도적 행동 준비', '중대 조치' 등을 시사하며 위협 수위를 높였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도발 수위는 당장에라도 선을 넘을 듯한 엄포와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전반기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프리덤실드'(FS·자유의 방배)가 시작된 지난 13일 이후로 범위를 좁히면 네 차례에 걸쳐 미사일을 발사한 것이 군사적 대응의 전부다.

 북한이 지난 14일 오전 황해남도 장연군 일대에서 지대지 전술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습. 조선중앙TV=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14일 오전 황해남도 장연군 일대에서 지대지 전술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모습. 조선중앙TV=연합뉴스

사실상 '상황 관리' 수준인 북한의 이러한 대응 방식과 관련해선 한·미 연합 공중훈련인 '비질런트 에이스'(Vigilant ACE)에 대응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단거리탄도미사일(SRBM), 전투기, 방사포 등 가용한 군사 전력을 총동원하며 협박 수위를 높였던 지난해 10~11월과 비교하면 오히려 "로우키(low-key)에 가깝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봉착한 대내·외적 환경 변화가 극단적 도발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어게인 트럼프'까진 마이웨이

북한은 지난해 3월 24일 ICBM을 발사하며 국제사회가 설정한 '넘지 말아야 할 선'(레드라인)을 넘었다. 이후 지속해서 '7차 핵실험'을 예고했지만, 김정은은 1년째 핵실험을 위한 '핵단추'를 누르지 않고 있다.

이는 무차별적 도발과 연쇄적 핵실험으로 이어졌던 2017년 상황과는 차이가 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21년 10월에 평양 3대혁명전시관에서 열린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 김정은 연설에서 "우선 강해지고 봐야 한다"며 국방력는 최중대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뉴스1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21년 10월에 평양 3대혁명전시관에서 열린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 김정은 연설에서 "우선 강해지고 봐야 한다"며 국방력는 최중대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뉴스1

6년 전인 2017년 9월 북한은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의 입장에서 당시 핵실험은 미국과의 '핵담판'을 이끌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실제 북한의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김정은 정권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에 임했다.

그러나 '하노이 노딜'로 핵협상은 실패로 귀결됐고, 이후 북·미 간에는 불신의 골이 깊어진 상황이다. 7차 핵실험과 같은 북한의 중대 도발은 대화는커녕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로까지 번질 수 있는 위험한 카드가 된 셈이다. 실제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북한의 7차 핵실험 예상과 관련해 핵 사용 시 "북한 정권 종말"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은 긴 호흡으로 미국과의 대화와 협상 가능성이 분명해지는 타이밍을 기다리며 국방력 강화에 매진할 것으로 보인다"며 "기본적으로 핵·미사일의 고도화를 통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는 전략을 가졌지만, 김정은과 좋은 '케미스트리'를 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길 원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역시 핵 프로그램과 관련해 "우선 강해지고 봐야 한다"며 '장기전'을 암시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2021년 10월 국방발전전람회 연설에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무적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계속 강화해 나가는 것이 당의 드팀 없는 최중대 정책이고 목표이며 드팀없는 의지"라고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20년 9월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수해현장을 찾아 논벼의 생육 상태가 시원치 않은 데 대해 심려를 표하며 직접 낱알을 확인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20년 9월 황해북도 은파군 대청리 수해현장을 찾아 논벼의 생육 상태가 시원치 않은 데 대해 심려를 표하며 직접 낱알을 확인하는 모습. 연합뉴스

발등에 불 떨어진 식량 문제

일부 지역에서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심각해진 식량난이 김정은 정권의 '무모한 선택'을 강하게 억제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와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국경봉쇄가 이어지면서 1990년대 '고넌의 행군' 이후 최대의 역성장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먹는 문제는 김정은 정권에 떨어진 '발등의 불'이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봄 가뭄과 낮은 일사량에 모내기 철인 5월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식량 작물 생산량이 전년보다 3.8%(18만t) 감소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중·러의 지원으로 식량난에 따른 민심 이반 가능성을 관리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춘궁기인 3~4월이 김정은 정권의 중대 고비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정유석 IBK경제연구소 북한경제팀 연구위원은 "북한은 코로나 유입을 막기 위한 국경 봉쇄가 3년째 이어지면서 내부자원이 고갈된 상황"이라며 "자체역량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국제 곡물·비료의 가격이 오른 것도 당국의 부담을 키우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정 위원은 이어 "김정은 집권 초기에 이룬 경제성장으로 재정적 여력을 축적하고 있었던 2017년과 달리, 최근 경제난은 막대한 군비 확충에 대한 민심의 절대적 지원을 강요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7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7차 전원회의 확대회의 2일 차 회의에서 농업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모습.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27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7차 전원회의 확대회의 2일 차 회의에서 농업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모습.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북한 경제는 2017년부터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지만, 당시에는 김정은 집권 초기부터 달성해 놓은 경제성장과 해외노동자 파견 등으로 재정적인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고,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 대외무역의 90%를 차지하는 북·중 교역도 정상적으로 가동되고 있었다. 사실상 국경이 봉쇄돼 '홀로서기'를 강요받고 있는 현재와는 상황이 다르다.

실제 북한 당국이 식량 문제를 체제 안정이나 김정은의 리더십의 위협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달 극히 이례적으로 농촌 문제를 단일 안건으로 상정한 노동당 전원회의 확대회의(8기 7차)를 개최했다. 이는 먹고 사는 문제가 정권 차원에서도 절실하다는 방증이다. 이와 관련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당장 먹는 문제 해결을 시급한 과제로 상정해 놓은 상황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할 가능성이 크다"며 "식량난으로 군량미까지 방출했다는 소식이 나오는 상황에서 민심 동요에 대한 우려도 최근 북한의 행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믿을 건 '군대' 뿐

김정은 정권은 핵·미사일 고도화를 목표로 국방력 강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경제·농촌·방역 등 주요 문제 해결 등 두가지 주요 목표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런 국가적 비상경영체제에는 군(軍)이 총동원된 상태다. 군의 역량이 국방과 민생에 분산됐다는 의미다.

북한군의 군의부문(의료부문)이 지난해 5월 의약품의 24시간 공급을 위해 평양에 위치한 약국에 투입된 모습.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당시 의약품 공급이 제때 이뤄지고 있지 않다면서 군을 투입해 약 공급을 하라는 '특별명령'을 하달했다. 뉴스1

북한군의 군의부문(의료부문)이 지난해 5월 의약품의 24시간 공급을 위해 평양에 위치한 약국에 투입된 모습.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당시 의약품 공급이 제때 이뤄지고 있지 않다면서 군을 투입해 약 공급을 하라는 '특별명령'을 하달했다. 뉴스1

김정은은 지난해 5월 북한 내에서 코로나가 확산하자 특별명령으로 의약품 보급을 위해 군을 투입했다. 북한에서 국방 분야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성과를 내고 있다고 선전하는 건축사업도 사실상 군병력을 동원한 결과로 분석된다. 뿐만 아니라 열악한 관개시설로 인해 매년 반복되는 수해 지역의 복구 작업에도 군 장병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고 있다.

북한은 식량 문제 해결에도 군을 전면에 내세우는 분위기다. 지난달 26일부터 1일까지 진행한 전원회의 결론에서 제시한 농촌문제 해결의 대안은 관개공사 추진, 농기계 보급, 간석지 개간 등인데, 경제 시스템이 붕괴된 북한에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주체는 현실적으로 군이 유일하다. 실제 김정은이 지난해 9월 황해남도 지역으로 보냈다는 농기계 5500여대 역시 군수공장에서 제작한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최근 "80만 명의 청년들이 군입대·재입대를 결의했다"는 보도를 내놨는데, 이에 대해 사실상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군 병력을 대폭 늘리겠다는 의도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이와 관련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북한이 군 복무 기간을 남녀 모두 3년 연장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CIA는 최근 '월드 팩트북'에서 북한의 남녀는 모두 17세쯤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하며, 최대 군 복무기간이 남성은 10년, 여성은 8년이라고 밝혔다. 기존 북한 군인들의 복무기간은 남성이 7~8년, 여성은 5년이었는데, 북한이 올해 들어 군 복무 규정을 개정해 3년 간 농사를 지어야 군 복무를 마친 것으로 인정하면서 군 복무가 길어졌다는 게 대북 소식통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최근 김정은의 유일한 지원군인 군인들의 1인당 곡물 배급량을 기존 620g에서 580g으로 줄였다. 군인들에 대한 배급량을 줄인 시점과 맞물려 북한은 그간 주민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각종 미사일 도발 사실 등을 관영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김정은이 직접 군 관련 시설을 방문하는 등 군 내부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선전선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9월 본격적인 수확기를 맞아 군수 공업 부문에서 제작한 농기계 5500대를 곡창지대인 황해남도에 보냈다. 사진은 농기계 증정행사를 하는 황해남도 주민들의 모습. 뉴스1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9월 본격적인 수확기를 맞아 군수 공업 부문에서 제작한 농기계 5500대를 곡창지대인 황해남도에 보냈다. 사진은 농기계 증정행사를 하는 황해남도 주민들의 모습. 뉴스1

그러나 일각에선 갈수록 코너에 몰리고 있는 북한의 상황이 오히려 무모한 도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군 소식통은 "북한이 한·미 연합훈련에 맞서 언제라도 기습적인 국지도발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방심해선 안 된다"며 "북한이 도발을 감행할 경우 가용한 자산을 모두 투입해 즉각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임을 경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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