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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피로스의 승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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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형수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박형수 국제부 기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연금개혁을 관철했다. 정년 및 연금 수령 연령을 현재 62세에게 64세로 2년 늦추고, 보험료 납입 기간을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린 게 골자다. 마크롱 정부는 올 9월부터 정년을 3개월씩 늘려, 2030년까지 64세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연금개혁은 ‘화약통에 불붙이는 일’에 비유된다. 특히 직종과 관계없이 연금을 받고, 연금만으로도 퇴직 전과 비슷한 생활이 보장되는 프랑스인에게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보험료를 내고, 연금은 더 늦게 받아가라’는 개혁안은 역린을 건드리는 꼴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첫 집권기인 2019년에도 유류세 인상과 연금개혁을 꺼내 들었다가  ‘노란 조끼’ 시위로 물러난 바 있다. 이후 코로나19와 맞물려 논의가 흐지부지되는가 싶더니,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직후 연금개혁이란 화약고를 다시 건드렸다.

여소야대의 불리한 정국, ‘노란 조끼’ 시위의 트라우마가 겹친 탓일까.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엔 헌법 제49조 제3항(정부가 긴급하다고 판단한 상황에 직권으로 법안 처리)을 발동하는 초강수를 뒀다. 의회 입법 절차마저 건너뛰자 시민들을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고 야당은 일제히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불신임안이 모두 하원 문턱을 넘지 못하자, 도리어 연금개혁안이 사실상 의회를 통과한 효력까지 얻게 됐다.

프랑스 역대 정부가 한 번도 성공 못 한 연금개혁을 재수 끝에 통과시켰지만, 평가는 엇갈린다. 로이터통신은 이를 ‘피로스의 승리’에 비유하며 폄훼했다. 고대 그리스 에피로스의 왕 피로스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뒀지만, 유능한 장수를 잃는 치명적 희생을 거듭한 탓에 결국 최후 전쟁에선 패망했단 일화에서 나온 말로, ‘실속 없는 승리’ ‘상처뿐인 영광’을 뜻한다.

반면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매년 100억 유로(약 14조원)의 재정 적자가 뻔히 예상되는, 소위 거덜 난 연금 곳간을 방치하고 퍼주는 대신 “맑은 정신을 가졌다면 가야 할 길은 오직 하나, 더 오래 일해야 한다”며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국민을 속여 달콤한 지옥으로 이끄는 쉬운 방법보다 가시밭길을 택했단 평가다. 연금개혁은 당장 우리의 급선무이기도 하다. 우리 정치권이 제시할 “가야 할 길”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