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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본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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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장원석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원석 증권부 기자

장원석 증권부 기자

연일 고조되던 은행 발(發) 위기가 UBS의 크레디트스위스(CS) 인수로 일단 진정됐다. 파산설이 흘러나오고, 딱 5일 만에 도장을 찍었다. 역사상 가장 신속한 인수합병(M&A)으로 꼽힌다.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자산 750조 원짜리 은행의 파산이 금융시장 전체의 시스템 위기로 확산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각론은 간단치 않다. 인수 계약에 따라 CS의 주주는 22.48주당 UBS 1주를 받는다. 이것도 헐값이지만 더한 피해자도 있다. 약 23조원에 달하는 신종자본증권(AT1)을 전부 상각하면서다. 한마디로 가지고 있던 CS의 AT1 채권이 휴짓조각이 됐다는 뜻이다.

신종자본증권은 회사채의 일종이다. 회계상 부채가 아니라 자본으로 잡히기 때문에 자기자본비율에 민감한 은행이나 보험사가 주로 발행한다. 코코본드라고도 불리는데 귀여운 별명과 달리 내용은 살벌하다. 유사시 이자 지급을 제한하거나 더 심하면 상각 또는 주식으로 강제 전환한다는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는 경우나 CS처럼 파산에 직면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코코본드는 예전엔 기관 투자자나 헤지펀드가 주로 샀지만, 요즘엔 개인에게도 인기가 많다. 일단 예금이나 일반 채권보다 금리가 높다. 기간별로 이자를 지급하는데 정기적인 현금 흐름이 필요한 투자자에겐 특히 좋은 대안이다. 만기가 없지만 발행한 쪽에서 채권을 되사는 콜옵션(통상 5년)을 걸기 때문에 중도 상환도 가능하다. 이런 매력에 올해 국내 4대 금융지주가 발행한 코코본드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금융사가 주로 발행하니 안정적이란 평가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지난해 흥국생명은 2017년 발행한 코코본드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콜옵션 시점이 오면 일단 정리하고, 다시 발행하는 게 불문율인데 당장 자금이 쪼들린다는 걸 자인한 것이다. 뒤늦게 수습했으나 당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로 흔들리던 채권시장이 크게 휘청거렸다.

파산하면 사라진다는 조건에도 돈이 몰리는 데에는 ‘설마 금융사가 망하겠느냐’는 믿음이 깔렸다. 하지만 세계 10대 투자은행(IB)이 불과 일주일 만에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15년 전 ‘리먼의 악몽’도 소환됐다. 또 한 번 되새기지만, 투자의 세계에 ‘무조건’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