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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경제위기의 이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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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부 기자

조현숙 경제부 기자

미국 경제사에서 최악의 위기는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벌어진 주가 폭락이 신호탄이었다. 금융시장이 붕괴했고 뒤이어 기업들이 쓰러졌다. 불과 3~4년 만에 산업생산이 반 토막 나며 1000만 명 넘는 실업자가 쏟아졌다. 대공황은 이후 10년간 계속되면서 미국 경제를 무너뜨렸다.

지금도 미국에선 위기 조짐 때마다 대공황이 소환된다. 한국인에게 트라우마로 박힌 IMF 외환위기와 비슷하다. 미 경제지표가 나빠질 때마다 ‘대공황 이후 얼마 만에’란 수식어가 단골로 등장한다.

대공황이란 말을 대중에 널리 알린 건 미국 제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다. 대공황 초기에 대통령을 지냈다. 후버는 그전까지 경제가 어려울 때 흔히 쓰이던 위기(crisis)나 공포(panic)란 단어를 피했다. 대신 우울(depression)이란 용어를 연설에 주로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덜 위협적으로, 덜 두렵게 느껴지는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시장의 과도한 불안감을 진정시키려는 전략이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미국에 닥친 위기의 강도를 오판한 탓이었다. 이렇게 위기의 이름은 우연에 필연이 더해져 탄생해왔다.

15년 전에도 그랬다. 시작은 2007년 미국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위기였다. 그 여파로 2008년 미국 5대 은행 중 베어스턴스·메릴린치·리먼브라더스가 차례로 무너지며 금융위기로 진화했다. 미국에서 출발한 위기는 전 세계로 번졌다. 현재 고유명사처럼 자리 잡은 글로벌 금융위기(The Global Financial Crisis)란 용어가 만들어진 과정이다.

대공황과 금융위기에 이어 올해 위기의 그림자가 다시 세계 경제에 드리웠다. 미국 중소은행인 실리콘밸리은행(SVB) 폐쇄가 발단이었다. 벼랑 끝에 선 유럽 대형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를 UBS가 인수하기로 하며 한고비 넘겼지만 조짐은 여전히 좋지 않다. SVB 사태가 터진 지 2주도 안 됐는데 벌써 은행위기(Banking Crisis)란 용어가 등장했다.

이번 사태가 초대형 위기로 확산하는 걸 막으려는 각국 금융 당국과 대형 금융사의 분투가 한창이다. 하지만 위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늘 탐욕의 패배였다. 그래서 아직 오지 않은 결말이 더욱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