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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대표의 90도 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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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효식 기자 중앙일보 사회부장
정효식 정치에디터

정효식 정치에디터

대통령의 시간은 여당의 시간과 다르게 흐른다. 대통령 입장에선 국정 과제를 하루빨리 추진하고 싶은 마음이 급한 데 ‘손발’이 따라주지 않는다. 대통령은 5년 단임인데 여당 국회의원은 4년마다 고용계약 연장을 심판받으니 ‘대·당·정 일체’를 외친다고 한 몸이 되기 쉽지는 않다.

10여 년 전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 상황도 비슷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170석이 넘는 거대 여당이었지만 당내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끄는 50석 넘는 비주류 친박계가 강력한 비토권을 행사했다. 80석 소수 야당인 민주당으로 가기 전 당내 야당에 제동이 걸렸다. 그러니 이 전 대통령이 임기 4년 차까지 친이계 당 대표나 원내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당청 회동을 할 때면 MB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호통’을 듣기 일쑤였다. 입법 과제 리스트와 추진 일정표까지 숙제를 받았다. 일방통행식 당청관계에서 속도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국민의힘 지도부와 만찬에서 김기현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이 13일 국민의힘 지도부와 만찬에서 김기현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결과는 대통령 마음 같지 않았다. 현재 4개 종합편성채널을 출범시킨 방송법 개정안은 2009년 7월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수정을 거친 뒤 야당의 국회 공성전을 뚫고서야 가까스로 입법됐다. 이듬해 6월 세종시 수정안은 박 전 대통령이 직접 반대 토론에 나서 반대 164표로 부결됐다. 이후 당청 사이의 권력관계도 달라졌다.

직전 노무현 정부의 당청관계는 극단적 반대 사례다. 노 전 대통령은 “당 총재의 공천권, 당직 임명권을 당원에 주겠다”며 임기 내내 당청분리 원칙을 고수했다. 열린우리당이 요구한 고위당정회의, 정무회의 등 대통령이 여당과 직접 접촉을 아예 거부했다. 대신 여당과 협의는 정책조정회의란 이름으로 ‘책임 총리’와 장관들에 맡겼다. 결국 그도 임기 말 여당이 대통령 비판에 앞장서자 “당이 대통령 흔들어 놓고 대통령 박살 내놓고 책임 없는 정치가 돼 버렸다. 당정 분리를 재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

옳고 그른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은 방식은 달랐지만 국민에 책임지는 정치를 하자는 의도였다. 그제 윤석열 대통령이 신임 여당 지도부를 용산 대통령실로 초청해 3시간 넘게 만찬 회동한 뜻도 같을 거다. 노동·연금·교육개혁, 한·일관계 개선,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대응까지 대통령이 당에 주문한 것도 많았다고 한다. 그중 김기현 대표와 월 2회 정례 회동을 약속한 건 당청이 책임정치 주체가 되는 출발이 될 것이란 기대를 낳게 한다. 다만 평소 예의가 몸에 밴 김 대표라고 해도 당청관계의 첫 단추를 끼우는 자리에서 대통령에 90도 인사를 한 건 아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