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SVB, 제2 리먼 사태?…"15년 전 악몽 겪었다" 그때와 다른점

중앙일보

입력

총자산 2090억 달러(약 277조원) 규모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초고속으로 파산하면서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촉발했던 리먼 브러더스 파산의 트라우마가 고개를 들고 있다. 금융 위기로 번져나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른 잠재적 리스크에 대응하지 못한 금융기관이 파산하는 등 유사한 흐름을 보여서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게 시장의 조심스러운 전망이다.

국내 증시 전문가들은 “사태의 파장을 더 지켜봐야 한다”면서도 “지금까지 드러난 상황만으로는 파생 상품을 통해 글로벌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위험이 전이된 2008년 때와는 달라 시스템 리스크(위험)로 번질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로이터=연합뉴스

"Fed의 고금리 전환 후 부주의한 경제 주체들은 항상 문제"  

SVB 사태는 저금리 환경에서 고금리로 전환되는 국면에서 은행이 향후 노출될 위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 금융 시장의 전반적인 분석이다.

Fed는 닷컴 버블 등으로 인한 경기 침체를 겪은 2001년 이후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년간 기준금리 4.25%포인트 인상했다.

가파른 기준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시장의 불안은 커졌고, 2007년 초부터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위기가 촉발됐다.

이번 SVB 사태의 발단도 Fed의 급격한 금리 인상이다. Fed는 거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지난해부터 여덟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4.5%포인트 올렸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경제 회복을 위해 이어지던 저금리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직격탄을 맞은 건 저금리 상황에서 성장을 이어오던 IT 업체나 스타트업 등이다. 돈줄이 마르면서 신규 자금이 끊긴 데다 금리 부담이 커지는 등 자금 경색에 빠진 이들 업체가 예금 인출에 대규모 인출에 나섰다.

그 여파가 벤처캐피털이나 스타트업 등에서 예금을 유치하며 몸집을 불려왔던 SVB로 번지며 파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예금 지급을 위해 과거 비싸게 샀던 채권을 낮은 가격에 파는 등의 어려운 상황이 시장에 알려지며 폐쇄에 이르게 됐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Fed가 금리를 급격히 올릴 때는 부주의했던 경제 주체들에 항상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간판 내리는 리먼 브러더스. 중앙일보DB

간판 내리는 리먼 브러더스. 중앙일보DB

"2008년엔 신용 위험, 이번엔 금리 위험을 과소평가"

다만 파산을 야기한 원인은 세계금융위기 당시와 다르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남강 한국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두 사태와 관련해 "금융위기 때는 저신용자의 신용 위험을 과소평가했지만, 이번 SVB 사태는 금리 위험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금융위기 직전 미국 은행들은 상환 능력 등이 검증되지 않은 대출자에게 집 살 돈을 무차별적으로 빌려주면서 엄청난 규모의 신용 버블을 만들었다. 이것이 문제가 된 서브 프라임 모기지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는 우량 대출자(프라임 등급)가 아닌 비우량 대출자(서브 프라임 등급)를 상대로 한 주택담보대출이다. 당시 상당수 금융기관은 대출 신청자의 직업과 소득, 월 상환금 충당 방법 등 신용 이력과 무관하게 거의 모든 신청자에게 대출을 승인했다. 그 결과 미국 가구당 주택담보대출액은 2001년부터 2007년까지 63%나 급증했다.

이번 SVB 사태는 예금주에 저금리를 주고 단기 자금을 끌어모아 장기 자산에 투자하는 수익 구조가 문제가 됐다. SVB는 매도가능증권(AFS·만기 전 매도할 의도로 매수한 채권과 주식)의 약 70%가 만기 10년 이상의 장기 채권이었는데,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라 보유 채권 가격의 평가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지난 10일 SVB의 발표에 따르면 이 규모가 18억 달러(약 2조3000억원)에 달했다.

이 이코노미스트는 "SVB가 매도가능증권을 만기 때까지 보유할 수 있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예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돼 문제가 된 것"이라며 "금리 위험을 과소평가해서 발생한 일"이라고 분석했다.

AFP=연합뉴스

AFP=연합뉴스

SVB, 2008년과 달리 파생상품까진 손 안 대

불행 중 다행인 점은 SVB가 아직 이자율 위험 등을 기반으로 파생상품을 개발하고 유통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의 경우 월가에서 묶여 있는 대출 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모기지유동화증권(MBS)'이라는 이름의 파생상품을 만들었다.

이는 '저위험 고수익 상품'으로 둔갑해 투자자들에게 팔려나갔다. 부동산 버블이 터지자 당국과 월가도 파악하기 어렵게 얽히고설킨 파생상품이 문제가 위기를 가속화했고, 국제 금융시장이 무너졌다.

김학균 센터장은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 때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금융 구조화가 많이 돼 누가 부실을 들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며 "아직까진 그것과 비교해선 문제의 구조가 심플(단순)하다"고 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가장 큰 차이점은 이번엔 겪어 봤다는 것"  

전문가들은 SVB 사태 발생 초기 미국 재무부와 Fed가 직접 소방수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 과거와 크게 다르다고 분석했다. 2008년의 교훈 덕분에 SVB 사태가 자칫 시스템 위기로 번질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12일(현지시간) 재무부와 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공동으로 내놓은 성명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SVB에 고객이 맡긴 돈을 보험 대상 한도(최대 25만 달러)와 상관없이 전액 보증하고 유동성이 부족한 금융기관에 자금을 대출하기로 했다.

윌리엄 더들리 뉴욕 연방준비은행 전 총재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이번 조치로 예금주를 안심시키는 작업이 훨씬 더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마경환 GB투자자문 대표는 "이번 사태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때는 처음이고, 지금은 겪어봤다는 것"이라며 "2007년 중반부터 부정적 이슈가 있었지만, 당국이 시장에 맡기고 화끈한 대책을 내놓지 않았는데, 이번엔 즉각적이고 강력한 대책으로 시스템 리스크로의 전이를 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남중 대신증권 수석연구위원도 "미 정부와 당국이 재빠르게 대응하고 있어 은행 전반의 신뢰도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SVB는 JP모건 등 상위 은행과 비교하면 규모가 10분의 1 수준이라 금융 시스템 전반으로 위험이 전이되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발생할 확률은 낮지만, 한 번 발생하면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는 '꼬리 위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SVB처럼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자산 건전성이 악화한 은행이 더 있을 수 있어서다. 실제로 12일(현지시간)엔 뉴욕주 규제 당국이 예치금 886억 달러(약 117조원) 규모의 시그니처은행을 폐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