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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놈들' 이런 전략 쓴다…성범죄 형량 낮추는 뜻밖 '두 구멍' [밀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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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Too 5년 : 대한민국 성(性) 법률시장 리포트 ②]

“합의 노력도 없이 무턱대고 돈부터 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공탁인가요?”

만 13세 미만인 딸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지인을 고소한 A(41) 씨는 “가해자가 제대로 된 사과나 합의 시도도 없이 대뜸 1000만원의 공탁금을 걸었다”며 분개했다. 결국 지난해 12월 재판을 앞두고 “가해자를 엄벌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한 그는 “공탁금 때문에 우리 뜻과 무관하게 가해자가 감형 받을까봐 걱정했다. 공탁 제도가 가해자의 면피 도구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법원에 납부하는 형사 공탁금 제도는 본래 피해 회복의 신속을 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공탁금이 실제 피해 회복에 기여했다고 판단되면 법원도 이를 유의미한 감형 요소로 다룬다.

그래픽 남윤우 인턴

그래픽 남윤우 인턴

 그러나 지난해 12월 개정 공탁법(형사공탁 특례제도)이 시행되면서 성범죄 피의자들의 ‘묻지마 공탁’이 논란이 되고 있다. 법 개정 전엔 피해자의 동의가 선행돼야만 형사 공탁금을 낼 수 있었던 까닭에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턱대고 찾아가는 등 2차 가해가 문제였다. 이에 사건번호만 알면 공탁할 수 있도록 공탁법이 바뀌었는데 이제는 합의없는 공탁이 피해자가 원치 않는 감형으로 이어지는 부작용이 부상한 것이다. “재판 진행을 지연시켜 개정 공탁법 시행 후 항소심이 선고되도록 해 큰 폭의 감형을 이루어냈다”고 홍보하는 로펌이 등장할 정도다.

 법원 판결도 부작용 확대에 일조했다. 법원이 성범죄에 대한 엄벌기조를 강화하고 있지만 한켠에선 ‘묻지마 공탁’을 감형 사유로 인정하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개정 공탁법 시행일인 지난해 12월 9일부~지난 3일 약 2달간 전국 법원 판결 중 ‘공탁’ 키워드가 포함된 194건을 확인한 결과,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의 공탁 사실을 판결문에 양형사유로 언급한 사례가 15건이었다. 대부분(12건) 피해자와 합의 없이 한 묻지마 공탁이었다. 판결문에 언급하지 않더라도 판사가 참작하는 경우까지 고려하면 묻지마 공탁의 효과는 이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공탁=감형’ 공식이 성립되자 피해자들은 ‘엄벌탄원서’ 제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12살 딸과 9살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를 받는 전 남편이 재판 과정에서 1인당 500만 원씩 공탁금을 건 사실을 알게 된 B씨도 최근 법원에 엄벌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진심 어린 사과 없이 공탁금만 넣은 건데 혹시 판결에 반영될까 걱정”이라며 “그야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허탈해했다. 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공동사무처장은 “공탁금을 원하는 피해자는 드물다”며 “엄벌이 우선이고 손해배상이 필요하면 별도로 민사 소송을 청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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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남윤우 인턴

그래픽=남윤우 인턴

억울하면 참여재판…2차 가해 현장된 법정

 무죄를 다투는 성범죄 피의자들은 국민참여재판을 재판 전략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20년까지 국민참여재판으로 접수된 사건 7861건 중 성범죄 사건이 1856건(23.6%)을 차지했다. 대법원이 2016년 피해자가 반대한다고 무조건 국민참여재판을 배제해선 안 된다는 취지의 결정을 내린 뒤에 성범죄 국민참여재판이 크게 늘어난 결과다.

성범죄 피고인 입장에서 국민참여재판의 실익은 분명하다. 2008년~2020년 성범죄 국민참여재판 무죄율은 21.88%로, 강도(8%)나 상해(6.24%)에 비해 현격히 높다. 이승우 법무법인 현강 변호사는 “성범죄는 은밀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객관적인 증거보다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게 된다”며 “피해자 진술을 물고 늘어져 배심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최근 성범죄 재판은 너무 피해자 중심’이라는 세간의 통념을 역이용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 과정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현장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않다는 점이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소한 거 아니냐”“정신과 진료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충격 때문이지 성추행 피해 때문은 아니지 않느냐” 등의 공세가 이어지곤 한다. 성범죄 국민참여재판에서 피해자를 대리해 본 서혜진 변호사는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배경 삼아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모는 시도가 계속 된다”며 “피고인 측이 피해자의 지인들을 증인으로 불러 평소 행실과 연애 경력 등 사건 본질과 무관한 질문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법원

 ‘가해자의 방어권’과 ‘피해자 보호’라는 가치 사이에 선 법원의 고민도 깊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2월 공중밀집추행 혐의 항소심에서 “성범죄에서 피해자가 합의를 완강히 거부했는데 거액의 공탁금을 낼 경우 이를 과연 양형에 반영해야 하는 것인지, 한다면 얼마나 반영할 것인지 상당히 고민“이라면서도 ”피고인으로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조차 무시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감형(징역8월→징역6월) 요소로 참작했다. 한 성범죄 재판 전담 고법 판사는 “재산 범죄와 달리 성범죄는 금전으로 피해 회복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전적 피해 회복에 대한 중요성을 폄하할 수도 없다 보니 판단이 어렵다”고 말했다.

국민참여재판 변론 전략에 대해선 박기쁨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8월 펴낸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과 국민참여재판에서의 배심원 지침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배심원들이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판사가 설명하는 절차나 지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배심원이 심증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법관이 선입견을 형성할 정도의 개입을 해선 안된다는 게 배심재판의 대원칙”이라며 “피해자 의사에 반하는 국민참여재판을 자제하고 법관의 의한 재판이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한다는 인식을 바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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