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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위축, 무죄율 높다" 국민참여재판 노리는 성추행 피고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2월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이 A 교수 파면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 교수는 지난 2020년 8월 서울대학교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지 1년 9개월 만인 지난 5월 파면 징계를 받았다. 뉴스1

지난 2월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 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이 A 교수 파면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 교수는 지난 2020년 8월 서울대학교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지 1년 9개월 만인 지난 5월 파면 징계를 받았다. 뉴스1

 지난 2020년 제자를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서울대 음대 A 교수의 국민참여재판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부장 강혁성)는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을 토대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은 피해자 B씨에게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이틀에 걸친 재판 첫날인 지난 13일 증인석에 앉은 B씨는 검찰과 A교수 측의 질문에 답하는 내내 울먹였고, 14일 재판 말미에 B씨를 대리하는 서혜진 변호사(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는 발언기회를 얻어 피해자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진행된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유감을 표현했다. “성범죄 피해자들은 법정에 다시 오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사적이고 내밀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거나 바라는 피해자는 없다.”

A교수의 혐의는 지난 2015년 10월 공연 뒤풀이 후 “다음 약속 장소로 데려다주겠다”며 B씨를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자신의 차에 태운 뒤 강제로 입을 맞추고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팔을 잡아당겼을 뿐”이라고 혐의를 부인하면서 재판 내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피해자가 진술을 꾸며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다.

A 교수 측 변호인은 피해자 증인신문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은 것은 당시 남자친구와 헤어진 충격 때문이지 않으냐”고 묻거나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라 고소를 결심한 것은 아닌지” 추궁하기도 했다. 극심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심하게 살이 빠졌다는 피해자에게 “요가와 필라테스로 다이어트를 했을 가능성”도 거론했다.

A 교수 측은 수사기관과 피해자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대리기사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은 것도 집중적으로 문제삼았다. 변호인은 대리기사가 자신과의 통화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녹취록을 제시한 뒤 차량 내부 영상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줬다. 이어 “뒷좌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면 운전석에서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구조”라며 “법원 주차장 바로 앞에 차를 세워놨으니 혹시 궁금한 배심원분들은 가서 살펴보시라”고 말했다.

그들이 '배심원의 선택'을 원하는 이유는

컷 법원.

컷 법원.

A교수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성범죄 특히 성추행 피고인들의 국민참여재판 신청은 최근 대세로 자리잡는 추세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 2008년부터 2020년까지 국민참여재판으로 접수된 사건 7861건 중 성범죄 사건이 1856건(23.6%)을 차지했다. 신청을 철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일단 신청하고 보는 경향은 뚜렷해지고 있다는 게 법원관계자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이런 경향이 자리잡는 건 실익이 분명해서다. 2008년부터 2020년까지 성범죄 사건의 국민참여재판 무죄율은 21.88%로, 강도(8%)나 살인(1.68%)에 비해 현격히 높다. 성범죄 사건 변론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성추행 등은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다”며 “다른 강력사건에 비해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이나 신빙성을 문제 삼으면 배심원들의 유죄 심증을 깨기 쉽다”고 말했다. 국민참여재판에서 피해자를 대리한 경험이 있는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법관 앞에서 증인신문을 하는 것과 7~8명의 배심원 앞에서 증인신문을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며 “국민참여재판에 증인으로 나오는 피해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피고인 측은 피해자의 SNS 기록이나 사적인 대화를 증거로 신청해 사적 일상을 드러내 심리적 위축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펴는 게 최근 트렌드다.

최근 대법원이 피해자 중심주의 드라이브를 세게 걸어온 것이 역설적으로 성범죄 피고인들의 국민참여재판 선호를 자극했다는 분석도 있다. 지난 2018년 대법원은 성희롱 의혹으로 해임 당한 대학 교수가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상대로 낸 해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한 원심을 파기하면서 “(2심 재판부가) 피해자들이 처한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은연중에 가해자 중심적인 사고와 인식을 토대로 평가를 내렸다”고 원심 재판부를 꾸짖었다. 그러면서 “성희롱은 사회 전체의 평균이 아니라 피해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평균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형사사건에서도 같은 취지로 원심 무죄 판결을 파기하는 대법원 판결이 반복됐다. 익명을 원한 형사전문 변호사는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한 뒤로 단독 재판부에서 성추행 사건 무죄판결을 받는 게 어려워졌다”며 “그보단 일반인들이 유·무죄를 가르는 국민참여재판이 해볼만하다는 게 업계의 인식”이라고 말했다.

2차 가해 우려에도 물꼬 트고…딜레마에 빠진 법원

성범죄 피해자들을 당혹케 하는 건 ‘성인지 감수성’을 언명한 법원이 공개적인 2차 가해일 수 있는 국민참여재판을 피해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쉽게 열고 있다는 점이다. 한때는 성폭력 범죄 피해자가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재판부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규정(국민참여재판법 제9조 제1항 제3호) 때문에 성범죄는 국민참여재판의 열외처럼 인식됐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가 공개적으로 반복 확인되는 국민참여재판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참여재판 개최 여부를 피해자측의 의사를 존중해 결정하던 관행에 제동을 건 것도 대법원이었다. 대법원은 지난 2016년 ▶피해자가 국민참여재판을 원하지 않는 구체적인 이유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피해자의 나이나 정신상태 ▶기존 피해자 보호제도를 활용해 2차 피해를 방지할 수는 없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고 설시했다. “국민참여재판을 도입한 취지나 국민참여재판을 받을 피고인의 권리 등에 비추어 볼 때, 피해자의 요청을 근거로 배제 결정을 할 때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후 법원은 성범죄 피고인에 대한 국민참여재판 진행에 관대해졌다. A교수 사건의 피해자도 국민참여재판을 완강히 거부했지만 재판부는 “국민의 법감정으로 피해 진술에 대한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피고인의 신청에 따랐다.

이젠 법원 내부에서 성범죄 사건에서 국민참여재판 유행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박기쁨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8월 펴낸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과 국민참여재판에서의 배심원 지침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배심원들이 성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판사가 설명하는 절차나 지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배심원단이 무죄로 평결했지만 재판부가 유죄로 판결해 대법원이 확정한 사례 20여건을 들었다. 박 위원은 “피해자라면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도망치는 등 구조 요청을 해야 했다는 '피해자다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배심원들이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같은 발상이 국민참여재판의 취지와 배치된다는 비판도 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시민들의 상식에 따른 판단을 존중하는 게 국민참여재판의 전제”라며 “재판부가 배심원에 지침을 주는 건 유죄의 암시를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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