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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반도체 기업의 20조 뚝심, 정치가 찬물 끼얹진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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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삼성전자, 자회사 돈 빌려 반도체 투자 지속 선언

반도체법 국회 논의 서둘러 투자 효과 극대화하길

반도체 혹한기를 맞아 수출과 이익이 큰 폭으로 감소하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반도체 투자를 이어가겠다는 뚝심을 보여줬다. 삼성전자가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을 빌려 반도체 투자를 위한 재원을 확보했다. 그룹의 ‘맏형’인 삼성전자가 자회사 돈을 빌린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삼성전자의 현금성 자산은 120조원이 넘지만 상당 금액이 해외 자산이어서 환차손과 세금 등을 고려해 해외 자산을 가져오는 대신 자회사 차입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이 1983년 2월 8일 이른바 ‘도쿄 선언’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지 40년 만에 반도체 사업이 최대 위기라고 한다. 증권가는 올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지난해(43조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7조원으로 추정한다. 삼성전자 안에서 반도체를 담당하는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은 아예 올해 적자를 예상한다. 반도체 적자에도 불구하고 공격적 투자를 이어가겠다는 삼성전자의 판단에서 위기 극복의 기업가 정신을 읽는다.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은 최근 “지금이 경쟁력 확보의 마지막 기회”라며 “지금 우리가 손 놓고 다른 회사와 같이 가면 좁혀진 경쟁력 격차를 (다시) 벌릴 수 없다”고 임직원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반도체 수출 악화 기조가 이달도 이어지고 있지만 기업들은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silver lining)을 찾아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은 어제 반도체 관련 심포지엄에서 챗GPT를 비롯한 AI 시대에는 데이터 저장과 처리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반도체 수요의 새 장이 열릴 것으로 내다봤다.

반도체 기업은 악전고투 중이지만 지금 정치권에선 이 같은 긴장감을 느끼기 힘들다. 우여곡절 끝에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를 반영해 반도체 등 국가 전략기술에 대한 시설투자 세액공제율을 더 높이는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대기업 특혜라는 야당의 반발에 진전이 없다. 이 와중에 반도체 같은 국가의 전략산업을 다루는 국회 첨단전략산업특별위원회에 무소속 몫으로 삼성전자 출신의 반도체 전문가인 양향자 의원 대신에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위해 더불어민주당을 위장 탈당했던 민형배 의원이 선임됐다. 미국·대만은 글로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반도체 기업에 파격적인 지원책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데 우리 국회는 돕기는커녕 기업의 뒷다리만 잡고 있는 격이다.

김기남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은 어제의 심포지엄에서 “미국은 반도체 육성 예산 527억 달러 중 390억 달러를 반도체 제조 인센티브로 편성한다”며 “세제 혜택, 인프라 지원, 보조금 지원 등 정책적 지원이 있어야 기업의 투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삼성전자의 투자 결단에 정치권이 찬물을 끼얹는 일만은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