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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임직원, 화장품·즉석카레에도 달러 숨겨 밀반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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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이 북한에 800만 달러(약 100억원) 이상을 송금한 과정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3일 기소된 김 전 회장의 공소장을 보면 쌍방울은 2019년 한 해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조선아태위)의 송명철 부실장 등에게 800만 달러를 전달했다.

이 가운데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의 방북 초청을 목적으로 김 전 회장이 대납했다는 300만 달러는 2019년 11월 27일부터 12월 18일까지 약 3주에 걸쳐 쌍방울그룹 임직원 수십 명을 통해 중국 선양으로 밀반출됐다. 이들은 각자 받은 달러를 화장품 케이스나 책 사이에 숨겨 출국한 뒤 선양공항 화장실에서 대기 중이던 방용철 그룹 부회장이나 직원에게 전달했다. 알루미늄 재질로 된 즉석 카레 포장지에 달러를 밀봉해 세관 검사를 피하려는 시도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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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방북 비용 대납’ 시점은 경기도지사 직인이 찍힌 방북 요청 공문 일자와 일치한다. 경기도는 2019년 11월 27일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 직인이 찍힌 ‘민족협력 사업 협의와 우호증진을 위한 경기도대표단 초청 요청’ 공문을 시행했다. 공문 말미엔 “도지사를 대표로 하는 경기도 대표단의 초청을 정중히 요청하는 바이며, 우리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귀 위원회의 헌신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수신처는 조선아태위 위원장, 결재선은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전결이었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이 방북 비용을 대납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공소장에 썼다. 김 전 회장은 2019년 7월 필리핀에서 개최된 제2회 아태평화 국제대회에 참석해 조선아태위 이종혁 부위원장, 송명철 부실장 등과 남북경제협력사업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이재명 지사의 방북을 성사시키려면 300만 달러 정도의 비용이 필요하다”는 제안을 받고, 이화영 등 ‘경기도 관계자’와 상의한 뒤 비용을 전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 공소장엔 경기도가 2018년 10월 북한과 합의한 남북교류협력사업 중 ‘농림복합사업’ 비용으로 500만 달러를 대납한 경위도 나와 있다. 김 전 회장은 2019년 1월 23~24일과 같은 해 4월 두 차례에 걸쳐 외화를 북한으로 밀반출했다. 1월 대북 송금 당시엔 아태평화교류협회의 안부수 회장이 등장한다. 검찰은 안 회장이 1월 북한으로 보냈다는 200만 달러 중 50만 달러에 관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전직 아태협 관계자는 “안 회장이 50만 달러 중에서 7만 달러는 2018년 12월 말 쌍방울그룹 계열사에서 아태협 후원 계좌로 받은 3억원 중 8000만원(7만 달러)을 인출해 달러로 바꾼 뒤 직접 평양에 들어가 조선아태위에 전달했다”며 “나머지 43만 달러 중 14만5000달러는 ‘쪼개기’로 환전해서 옮긴 것이고, 환치기로 180만 위안(약 3억3000만원)을 중국에서 받아 그날 저녁에 바로 송명철에게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이 방북 비용 대납을 위해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던 칼라스홀딩스 법인에서도 자금을 만들었다고 적시했다. 2019년 4월 경기도 스마트팜 사업 대납 비용으로 300만 달러를 만들 당시 김 전 회장의 전 매제이자 금고지기로 불리던 김모 재경총괄본부장이 관여했고, 이 돈을 마카오로 밀반출한 뒤 송명철 부실장에게 전달했다는 내용이 공소장에 담겼다.

검찰은 지난 11일 도피 생활 8개월여 만에 태국에서 귀국한 김 전 본부장에 대해 12일 오후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김 전 본부장은 오랜 국외 도피에 피로감을 호소하다 최근 김 전 회장이 “국내로 돌아와 사실대로 진술하라”고 지시하자 귀국을 결심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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