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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하루키처럼 무모한 도전 하자” 삼성의 다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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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선언’ 40년, 다시 반도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준비를 한 다음에 글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루키식(式)으로 무모하고 과감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경계현 삼성전자 DS(반도체)부문 사장은 지난 1일 경영 설명회에서 6만여 임직원에게 유명 일본 소설가를 예로 들며 이렇게 주문했다. 서사가 복잡한 장편소설도 어떤 결말을 정하지 않은 채 공격적으로 써내려가는 하루키식 작법처럼, 삼성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 ‘무모한 도전’을 통해 반전을 노려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이날 경 사장은 지난해 4분기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는 적자였지만, 파운드리 부문의 호실적에 기대 겨우 영업흑자를 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삼성 안팎에서는 ‘메모리 분기 적자’에 대해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더구나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신기록을 기록한 파운드리 분야 역시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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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비전 선포 후 3년10개월이 지났지만 삼성의 ‘파운드리 성적표’는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볼 수 없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파운드리 세계 1위인 대만 TSMC의 점유율은 60%, 삼성전자는 13%로 나타났다. 두 회사의 격차는 지난해 1분기 39%포인트에서 47%포인트로 더 크게 벌어졌다.

“하루키, 소설 결말 안 정하고 공격적으로 글 써…우리도 파운드리서 반전 노려야”

경 사장은 이에 대해 “파운드리는 기술 서비스가 핵심인데 그동안 메모리처럼 일했다”며 “올해에도 TSMC가 1등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비스가 중요한 업(業)의 특성을 간과했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소품종 대량생산을 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파운드리는 고객 맞춤형 반도체로, 파트너 기업과 신뢰·소통이 관건이다.

파운드리는 제조사가 갑이 아닌 철저히 을이 되는 비즈니스다. 예컨대 화장품 회사가 ‘청량감이 있는 남자 스킨’을 의뢰하면 만들어주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을 연상하면 된다. 호·불황의 경기 사이클이 뚜렷한 메모리와 달리 꾸준한 성장성과 안정적인 수익성도 특징이다. 시장조사업체인 옴디아에 따르면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2025년 4773억 달러(약 601조원)로 메모리(2205억 달러)보다 두 배 이상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그동안 삼성전자가 보여온 파운드리 전략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SMC는 아무리 규모가 작은 회사라도 이들이 나중에 커 대형 고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며 “삼성전자엔 작은 회사들이 설계도를 들고 찾아가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뚜렷한 수익원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약점이다. 삼성전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메모리는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이전 것은 큰 의미가 없어진다. 기존 라인을 없애고 새 라인에 투자하는 프로젝트를 반복해야 한다”며 “파운드리는 구형 라인에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계속 창출한다. 삼성은 첨단 라인만 고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을 기반으로 3나노미터(㎚·10억 분의 1m) 2세대 공정, 2나노 1세대 공정을 통해 고객사를 늘리겠다는 게 기본 구상이다.

이 회장이 강조하는 ‘기술 초격차’ 전략이다. 실제로 지난해 6월 세계 최초로 GAA 기술을 적용, 3나노 파운드리 공정을 기반으로 한 초도 물량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도 시스템 반도체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파운드리는 하이닉스 전체 매출에서 5% 미만이지만, 이미지센서(CIS) 등 다양한 제품군에서 성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기술적으로 TSMC보다 동등하거나 우위에 있다는 시그널을 주면서 고객을 늘려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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