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잡에 갇힌 투혼, 발차기로 깨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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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란 여자 태권도 대표 선수들이 리라컴퓨터고교 체육관에서 ‘루사리’를 쓴 채 발차기 연습을 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지난 주말 오후, 서울 예장동 리라 컴퓨터고교 실내체육관에서 이 학교 태권도부 선수들과 함께 한 무리의 외국 여자들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뒤로 빠지지 말라고 했지? 정신 못 차려!"

코치로 보이는 여성이 한국말로 큰 소리를 질렀다. 선수들은 차려 자세로 서서, 머리를 크게 숙이며 '알았다'는 몸짓을 취했다.

이들은 신동선(31.여.사진) 감독이 이끌고 있는 이란 여자 태권도 대표선수였다. 13일 한국에 왔고, 일주일간 전지훈련을 한 뒤 20일 출국했다.

이란 선수들의 '파이팅'은 대단했다. 겨루기에서 고교 최강 리라고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리라고 선수 유자영(3년)은 혀를 내둘렀다. "기합 소리가 달라요. 악착같다니까요."

훈련을 마친 이들이 헤드기어를 벗자, 또 하나의 '기어'가 나왔다. 이란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쓰는 히잡의 일종인 '루사리'였다. 땀이 루사리를 타고 밖으로 흘러나올 정도로 훈련은 격렬했다. 그러나 어떤 선수도 루사리를 벗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 밖으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꼼꼼하게 머리를 감쌌다. 이슬람 율법상 남자 앞에서 머리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신 감독이 이란 선수들을 데리고 한국을 찾은 것은 "종주국의 선수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실전 감각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란 태권도협회 엄 헤리(48) 부회장은 신 감독의 전지 훈련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난해 6월 팀을 맡은 신 감독이 단 석 달 만에 출전한 2005 코리아오픈 국제태권도대회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2개를 따자 이란 협회는 신 감독을 적극 지지하기 시작했다. 신 감독은 "이란 여성들에게 태권도는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 문을 더 넓히려면 좋은 성적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신 감독은 지난해 5월 대한태권도협회 홈페이지에 나온 이란 여자팀 코치 모집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다. 그녀는 "이란이 태권도 강국이어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건 모두 남자만의 이야기였다"며 "여자 선수들은 남자들이 훈련할 때는 체육관에 절대 들어갈 수 없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번 하려면 2~3주 전에 신청해야만 가능했다"고 말했다.

좋은 성적이 나오자 여자 대표팀을 위한 훈련 시간이 따로 배정됐다. 그러나 불편함은 여전하다.

"여자들만 있으면 루사리를 벗고 훈련해요. 남자가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면 관리실에서 알려주죠. 그럼 선수들이 루사리를 쓰느라 난리예요."

2002 부산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인 하디 사에 마루즈(21.미들급)는 '한국 선수 킬러'인 이란 태권도 영웅 하디 사에 베네코할(30)의 친동생이다. 마루즈는 "오빠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보며 태권도를 시작했다. 예전보다 조건이 좋아져 행복하다. 아시안게임 메달은 한국 선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꿈"이라고 말했다.

강인식 기자 <kangis@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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