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신생아 중 2㎏ 넘는 경우 거의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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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충남의 한 탈북자 대안학교. 14~18세의 학생 20여 명이 고입.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몸집은 책상에 비해 유달리 작다. 책상이 가슴 높이까지 올라왔다. 이들은 일주일 전 견학 수업차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았다.

박순애(18.가명)양은 그곳에서 자존심 상하는 경험을 했다. 입구에서 M고교 배지를 단 남학생이 다가와 "초교생처럼 보이는데 몇 살이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박양의 키는 153㎝. 2년 전 탈북 당시엔 145㎝였다. 박양은 "북에 있을 때 평균 키는 됐기 때문에 작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김형진(17.가명)군. 15세 때 키가 크다고 해서 중학교 축구구락부 선수로 뛰었다. 김군은 "당시 158㎝였는데 반에서 둘째로 컸다"고 했다. 반면 한국기술표준원이 2004년 12월 발표한 '제5차 인체치수 조사'에 따르면 15세 한국 남성의 평균 키는 169.2㎝나 된다. 대안학교 관계자는 "탈북 학생들이 입학할 때 평균적으로 여학생은 150㎝, 남학생은 160㎝를 넘는 경우가 드물다"고 했다. 남과 북은 이제 체제.이념.언어.생활 양식만 다른 게 아니다. 체격과 얼굴 생김새에서까지 차이 나고 있다.

?자라는 남, 멈춘 북=박순영(인류학) 서울대 교수는 "인체계측학 측면에서 키는 영양.보건 등 생활 조건의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삶의 질이 개선됨에 따라 키도 커진다는 의미다.

남북한은 전 세계에서 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한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신장 증가 속도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낳고 있다. 20대 초반의 평균 신장은 2000년대 들어 일본을 추월했다.

반면 북한의 키 변화는 미미하다. 함경도.양강도.자강도 등 일부 지역에선 오히려 체격 조건이 뒷걸음질하고 있다.

1996년 12월 아내와 딸.아들을 데리고 함북 무산에서 두만강을 넘었던 탈북 남성 B씨(42)의 증언이다. "95년은 정말 심각했다. 밀가루로 멀건 죽을 만들어 애들에게만 먹였다. 어느 날 옆집 여자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가 보니 여섯 살짜리 아들이 배가 산처럼 부른 채 죽어 있었다. 소나무 껍질 속살로 죽을 만들어 먹였는데 소화를 못 시켜 항문이 막혀 배가 부풀어 오르다 죽은 것이다. 애 엄마는 땅을 치고 우는데 애 아빠는 마루에 누워 담배만 피우더라. 그 순간 탈북을 결심했다. 애들을 굶겨 죽이나, 강을 건너다 잡혀 죽으나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다."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인 한비야씨는 지난해 7월 북한에 갔다가 백두산으로 행군하던 청소년 대열과 마주쳤다. 한씨는 "덩치는 초교 6학년(12세) 정도였는데 번쩍거리는 눈빛을 대하니 그게 아니었다"며 "그들은 중학교 상급반(14~15세)이었다"고 회고했다. 질병관리본부의 탈북자 신체계측 결과도 동일하다. 청소년기(15~19세)에 남자는 14.1㎝(남한 173.5㎝ 대 탈북자 159.4㎝), 여자는 8.4㎝(남한 160.5㎝ 대 탈북자 152.1㎝)나 차이 난다.

?"체격을 통합의 상처로 만들지 말아야"=세계식량계획(WFP) 아시아지부의 폴 리슬리 대변인은 "정확한 측정 자료는 없지만 북한 어린이들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는 "어릴 적에 겪었던 고난이'키'라는 흔적으로 남고 그 때문에 남북 통합 시 북한 주민들의 취약한 신분이 육안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 주민이 장기간 영양 결핍에 시달리게 되면 다리가 상체보다 짧아져 남북 간의 신체 비율이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영양가 없는 딱딱한 음식을 오래 씹으면 광대뼈와 턱이 강해져 얼굴의 각이 날카로워질 가능성이 크다. 외모 중시 풍조 속에서 북한 출신 젊은이들이 느낄 상대적인 박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세브란스병원의 전우택 정신과 과장은 "북한 아이들이 병적으로 작은데 이는 심리적 위축 등 정신 건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인도적 지원을 중단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크다. 강영훈 전 총리는 "같은 동포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식량 지원을 계속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의 성장기 아동을 먹이고 치료하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단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 북한 통계의 한계와 대안=통일부와 통계청 관계자는 "북한은 웬만한 주민 통계를 국가 기밀로 간주해 내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체지수 같은 분야는 탈북자를 통해 북한 전체의 통계를 유추하는 방식이 동원된다. 문제는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힘들게 살았던 계층인 데다 표본 수가 작아 북한 주민의 정확한 실상과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이다. 남북 신장 변화 연구를 주도한 정우진 연세대 교수는 "예컨대 변경 지방의 탈북자들이 평양 주민보다 신체지수가 열악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의 특권 계층은 10% 안팎에 불과해 통계의 큰 흐름을 바꾸기 어렵다고 한다. 예컨대 질병관리본부의 탈북자 신체 계측 조사와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의 두 차례 북한 현지조사는 어린이 발육 부진이 심각하다는 결론에서 일치했다.

특별취재팀=이양수 팀장, 채병건.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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