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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의영화만담] 악마는 왜 프라다를 입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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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군요. 세계 최고 패션 잡지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리프)말입니다. 신참 비서 앤드리아(앤 해서웨이) 눈에 천생 악마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도도한 패션 리더께서는 많고 많은 명품 브랜드 중 왜 하필 프라다를 입게 된 걸까요?

제 생각엔 이렇습니다. 프라다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여성의 연약함이나 성적 매력을 드러내는 옷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여성스러움을 극대화하기보다 일하는 여성의 자신감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 여성을 위한 옷이 바로 프라다'이므로, 자연스럽게 그 브랜드의 상징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았겠나, 뭐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죠. 뭘 믿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요? '이것이 명품이다'(시지락)라는 책에 실린 프라다 탄생 비화를 믿고 하는 소리입니다.

1918년 가죽 제품 전문 브랜드 프라다를 설립한 마리오 프라다는 무척 보수적인 사람이었답니다. 집안 여자들은 가게에 드나들지도 못하게 하더니 아버지 일에 별로 관심도 없던 아들에게 회사를 넘기고 58년 숨을 거두죠. 그때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회사는 78년, 우여곡절 끝에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에게 넘어간 뒤 기사회생했답니다. 패션의 '패'자도 모르던 이 여인은 아주 단순한 믿음으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죠? 바로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이면 남들도 입고 싶어 할 거라는 확신이었습니다.

두 아이를 둔 어머니이자 일하는 여성이던 미우치아는 숱한 디자이너들이 목숨 걸고 구현하려는 '여성의 섹시함'이라는 게 실은 아주 거추장스러운 스타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같은 여자들이 입어서 편한 옷, 한마디로 "심플하고 우아하되 실용적인 옷"을 만들어 90년대 이후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되었다네요. 가업을 물려받기 전 밀라노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과격한 페미니스트이자 무언극 배우였다는 미우치아. 왕년의 과격한 페미니스트는 결국 패션으로 자기 철학을 실천한 셈입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쌍둥이 엄마이면서 일하는 여성의 가장 극단적 모델로 그려진 미란다가 '과격한 페미니스트'의 패션 철학에 동조하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영화의 실제 모델이 된 미국 보그지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늘상 프라다만 입는 것도 아니고, 미란다 역시 영화에서 다른 명품 브랜드를 제법 자주 걸치고 등장합니다. 그러나 원작 소설은 물론 영화의 제목으로 간택되는 영광만은 오직 프라다의 몫으로 남겨 놓은 데는, 사람들이 캐릭터의 성격을 단박에 눈치 채는 데 프라다의 상징성이 꽤 유용할 거라는 계산이 깔린 게 아닐까요?

영화 속 의상과 소품은 그저 예쁘게 보이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하지요. '친절한 금자씨'의 물방울 원피스도, '괴물'의 박강두가 입는 트레이닝복도 다 이유와 목적이 분명한 제작진의 '선택'이죠. 그래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었습니다. 영화 '세렌디피티'의 여주인공 사라의 푼수 친구는 그래서 하필 '프라도' 짝퉁 지갑을 들고 다닌 거고요.

김세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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