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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차 문도 못 연 채 사망…"블랙스완" 전문가도 놀랐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완전히 배우 하정우가 나오는 영화 「터널」 그거였다.”
 29일 경기 과천 제2경인고속도로 위에서 벌어진 ‘터널 참사’를 목격한 견인업자 김모씨는 현장을 전하면서 재난 영화를 끄집어냈다. 갑자기 연기로 가득 찬 터널 천정에서 떨어지는 불똥비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넘어지고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 대한 묘사였다. 사망자와 중상자가 몰린 안양 한림대 병원에서 치료중인 50대 남성은 “차는 다 녹았고 문을 열고 나오니 빵 터지는 소리가 났다. 동승자는 차에 끼어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차량에서 시작된 불이 방음터널을 녹여 불바다에 수십대의 차량이 갇히는 상황은 전례 없는 유형의 재난이다. 채진 목원대 소방안전학 교수는 이같은 현상을 “재난계의 블랙 스완(검은 백조)”이라고 말했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이 용어는 주로 경제 분야에서 쓰인다. 채 교수는 “설마 그런 곳에서 방음벽 천장이 급격하게 타들어가는 상황을 누가 생각했겠느냐”며 “이같은 일은 반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기도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방음터널 화재 현장에서 30일 오전 경찰과 소방 등 관계자들이 현장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경기도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북의왕IC 인근 방음터널 화재 현장에서 30일 오전 경찰과 소방 등 관계자들이 현장을 살피고 있다. 연합뉴스

 경험칙이 없기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예측 불가능성은 그 자체로 피해를 키운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화재로 숨진 전모(66)씨의 친구인 또다른 전모(67)씨는 “운전기사였던 친구가 마지막에 모시는 사모님께 ‘터널 속에서 연기를 마시고 있다’고 전화를 했다더라. 왜 빨리 차를 버리고 나가지 못했는지 마음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조성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 교수는 “방음터널에는 방송으로 대피 신호를 주는 시설도 없다. 다급한 상황 속에서 사태를 파악하던 도중 변을 당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채진 교수는 “방음터널이 그렇게 빠르게 연소될 것이라고는 현장에 있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사고가 발생하면 궁금하기도 하고, 집단 심리가 작용해 대피가 늦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화재로 숨진 5명의 사망자가 발견된 차량도 모두 최초 발화 지점의 반대편 차선을 지나고 있었다는 점도 이같은 진단을 뒷받침 하는 정황이다.

사고 직후 터널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뉴스1

사고 직후 터널 안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뉴스1

 경찰과 소방당국은 5명이 차 문을 열지도 못한 채 사망한 직접적 원인을 질식으로 보고 있다. 플라스틱 재질의 방음판이 타들어가며 쏟아낸 치명적 유독가스 때문에 생긴 결과다. 채 교수는 “유독가스는 반 모금만 마셔도 의식이 흐려지고, 행동이 제약되기 때문에 화재를 인지하는 즉시 차량을 버리고 연기가 없는 쪽으로 대피해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 교수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대피용 방독면을 차량에 미리 구비해 놓는 것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피 요령도 전국 50곳 이상의 밀폐형 방음터널에 안일한 안전 규정이 적용되고 있는 한 무용지물이란 지적도 있다. 제2경인고속도로 방음터널은 철제 뼈대 위에 아크릴 소재인 폴리메타크릴산메틸(PMMA) 재질의 반투명 방음판을 덮은 구조다. 가격이 저렴하고 성형이 용이하지만 휘발성 유기물질을 포함하고 있어 쉽게 불에 타고 불이 붙으면 다량의 유독가스가 발생한다. 공하성 교수는 “방음터널의 소재를 기존 것까지 모두 소급해 강화유리 등 불연 소재로 바꾸지 않으면 똑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완진된 후 터널 상부. 거의 뼈대만 남아 있다. 연합뉴스

완진된 후 터널 상부. 거의 뼈대만 남아 있다. 연합뉴스

 국토교통부가 2012년 발간한 도로설계편람 속 ‘방음시설 설계기준’은 투과 손실, 흡음률, 가시광선 투과율 등에 대한 규격을 마련했을 뿐 화재 대비에 관한 내용은 담기지 않은 점도 논란이 되고 있다. 1999년 발간된 도로설계편람 초판에는 “방음벽에 사용되는 재료 중 외부는 불연성 또는 준불연성이어야 하고 내부의 흡음재료는 자기 소화성으로 연소시 화염을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포함돼 있었지만 이후 개정 과정에서 삭제됐다. 국토부 관계자에 이유를 물었지만 “도로설계편람이 오래 전에 개정돼 정확한 수정 이유는 알기 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

한편, 국토부는 30일 대책회의를 열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55개 방음터널과 지자체가 관리하는 방음터널을 전수조사 하겠다고 밝혔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비용을 이유로 안이한 방법으로 현상유지를 하는 관성적 태도를 버리겠다”며 “공사 중인 방음터널에 화재에 취약한 소재를 쓰고 있다면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화재에 튼튼한 소재와 구조로 시공법을 바꾸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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