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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 후견 받는다고 '당연퇴직'…헌재는 공무원 눈물 닦아줬다

중앙일보

입력

공무원이 성년후견을 받게 된 경우 당연퇴직하도록 한 국가공무원법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제동을 걸었다. 22일 헌재는 재판관 6:3의 의견으로 국가공무원법 제69조 제1항 등이 “공무담임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성년후견 제도는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많아 일상적인 일 처리를 하기 어려운 사람에 대해 법원이 성년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피성년후견인이 이상한 계약을 하거나 지나치게 많은 돈을 꺼내 쓰지 않도록 특정 행위에는 성년후견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과거 금치산·한정치산제도를 보완해 생겨난 제도인데, 피후견인의 의사판단 능력 수준에 따라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등으로 나뉜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 뉴스1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 뉴스1

성년후견 이유로…“공무원 아니니 월급 뱉어내라”

 검찰 서기보로 임용돼 25년간 공무원으로 일해온 A씨는 지난 2015년 돌연 쓰러져 저산소성 뇌 손상을 입었다. A씨의 치료가 길어지자 가족들은 A씨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년후견을 신청했다. A씨의 재산을 처분해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는데, 의식이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 법원은 A씨의 아내를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다.

이후에도 A씨의 건강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A씨의 아내는 평소 남편이 명예퇴직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던 점을 고려해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그러나 지난 2018년 소속기관인 검찰은 A씨에 대해 명예퇴직 부적격 판정을 내리는 한편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A씨가 피성년후견인이 된 2016년 12월 31일부로 당연퇴직이 된 상태”라고 알려왔다. 당연퇴직은 공직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손상하고 원활한 공무 수행에 어려움을 초래해 공익을 해할 우려가 있는 공무원을 공직으로부터 배제하는 제도다.

A씨가 당연퇴직 통보를 받은 이후,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 미납액 340여만원을 내라는 청구서가 날아왔다. 병원 치료를 받을 때 받은 공무원 단체보험금 970여만원도, 병가와 질병휴직을 낸 기간 급여도 다시 뱉어내라는 연락이 왔다. 모두 당연 퇴직한 2016년 12월 31일 이후 시점부터 계산된 것들이었다. 일단 이 돈을 갚은 A씨와 가족들은 공무원 지위를 확인해달라는 소송과 돈을 다시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피성년후견인은 당연퇴직하도록 한 국가공무원법 조항이 위헌”이라며 위헌법률 제청을 신청을 받아들여 지난 2020년 사건은 헌재로 향했다. A씨 측은 “당연퇴직은 대부분 공무상 비위나 범죄로 불명예스럽게 퇴직하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25년이 외면당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그사이 숨졌다.

헌재 “공무담임권 침해이자 차별”

 헌재는 성년후견을 받는다는 이유로 공무원의 신분을 박탈하는 것은 위헌적이라고 봤다. 헌법 제25조는 ‘공무담임권’을 기본권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공직에 임명돼 국가나 공공단체의 직무를 담당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헌재는 “공직 취임 기회에서 배제되는 것 뿐 아니라, 신분을 부당하게 박탈당하는 것 역시 공무담임권이 침해되는 것”이라며 “당연퇴직은 별도 요건 없이 바로 퇴직하는 것이라 법적 지위가 가장 예민하게 침해받는 경우”라고 짚었다.

헌재 “피성년후견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공무원들에 비해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는 A씨 측 주장도 받아들였다. 국가공무원법은 정신상 장애로 일할 수 없는 공무원에 대해 먼저 휴직 명령을 내리고, 휴직 기간이 끝난 뒤 여전히 일을 감당할 수 없다면 직권면직하고 있다. 만약 피성년후견인이 아니라면 곧바로 당연퇴직 되지 않고 이처럼 회복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헌재는 “이런 절차를 보장하는 것에 별도 조직이나 시간 등 공적 차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며 “당연퇴직을 시키지 않더라도 공무의 원활한 수행이라는 국가공무원법 입법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헌재는 또 “성년후견을 받는다고 해서 영구적으로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며 민법에 명시된 성년후견 종료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런데도 성년후견이 개시된 공무원을 즉시 당연퇴직시킨다면, 성년후견인의 도움이 필요한 공무원이 성년후견 제도를 이용하는 것을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이선애·이은애·이종석 재판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국가공무원의 직무는 공익을 위한 것이라, 사무처리능력이 결여된 공무원을 공직에서 배제해 피해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직무에 복귀할 수 있을 만큼 당사자의 업무 처리 능력이 남아있는 경우 성년후견보다 후견 범위가 적은 특정 후견이나 한정후견을 받을 테고, 이는 당연퇴직 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봤다.

현장에선 “수백개 법 조항 여전히 남았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사단법인 두루·사단법인 온율 관계자들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300여개나 되는 법조항이 피성년후견인에 대한 결격 조항을 두고 있다며 법 개정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사단법인 두루·사단법인 온율 관계자들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들은 300여개나 되는 법조항이 피성년후견인에 대한 결격 조항을 두고 있다며 법 개정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A씨를 대리한 배광열 변호사(사단법인 온율)는 “진작 법이 바뀌었어야 하는 사안”이라며 “국가공무원법 외에도 많은 법 조항들이 직업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정후견을 받는다는 이유로 사회복지사 꿈을 이루지 못한 20대 남성 B씨가 관련 사회복지사업법 조항에 대해 낸 헌법소원도 현재 심리 중이다. 배 변호사는 “성년후견이나 한정후견을 받는다는 이유로 일괄적으로 자격을 박탈하기보다, 당사자가 가진 직업적 능력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철웅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후견·신탁연구센터장)도 지난해 9월 A씨 사건 공개변론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성년후견을 결격사유로 보는 조항으로 인해 성년후견제도의 활성화가 저해되고, 성년후견이 꼭 필요한 이들이 제도를 회피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일본은 지난 2019년 이 같은 결격 사유 관련 조항을 관련 법에서 일괄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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