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나와 멀쩡히 일하는데…혼자 10만원도 못뽑는 50대 사연 [가족의 자격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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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자격

가족의 자격을 새로이 법원에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족연(緣)을 끊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원은 어떤 해답을 줄까요. 또 법의 공백은 어떻게 채워야 할까요. 중앙일보가 새로운 가족의 자격을 묻습니다.


인터넷 쇼핑을 즐기던 50대 여성 김미현(가명)씨는 약 2년 전부터 10만원이 넘는 물건은 마음대로 살 수 없게 됐다. ATM으로 돈을 출금하는 일부터 일터에서 근로계약을 하는 일까지 누군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휴대전화 개통도 동의 절차가 필요해 그냥 가족 명의의 휴대전화를 쓰는데, 본인인증이 안 돼 코로나 19방역 패스나QR 체크인과 같은 시스템도 이용하지 못했다. 미현씨가 성년후견을 받는 '피한정후견인'이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거나 나이가 많아 일상적인 일 처리를 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법원에 성년후견인을 지정해달라고 신청할 수 있다. 치매에 걸려 재산을 관리하기 어려운 아버지를 위해 자녀들이 법원에 후견 개시 청구를 하는 방식이다. 자기도 모르게 지나치게 많은 돈을 꺼내 쓰거나 이상한 계약을 하지 못하게끔 특정 행위에는 성년후견인의 동의가 필요하다.

당사자의 능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등에 따라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임의후견으로 나뉜다. 성년후견인은 법원이 지정한다.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변호사나 법무사, 사회복지사 등의 전문가가 선임될 수도 있다.

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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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년후견 제도가 꼭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성년후견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미현씨 사례가 그렇다. 학창시절 괴롭힘을 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고등학교 때 조현병이 생겼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약을 빠뜨리지만 않으면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진학했고 매일 출근하는 일터도 있다. 최근에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약봉지마다 날짜를 적어 보관하고, 빈 봉지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면서 혹시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관리한다.

자신의 일상을 자유롭게 살던 미현씨가 2020년 갑자기 '피한정후견인'이 된 건 집안 형제 간 상속재산 다툼이 생기면서다. 언니와 오빠가 어머니의 유산을 두고 갈등을 빚으면서 불똥이 미현씨에게 튀었다. 30년 전 조현병 때문에 당장 10만원도 ATM에서 출금하지 못한 처지가 된 것이다. 미현씨의 후견인은 법원이 지정한 성년후견 전문법인에 소속돼 있다. 미현씨는 매달 60만원 정도의 후견인 보수도 내야 한다.

미현씨 측은 한정후견으로 인해 경제적 자립이 오히려 방해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은행 계좌 잔액 조회를 하려고 해도 은행에서는 후견인 확인이 필요하다고 하니, 자유롭게 금융 활동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후견인이 동의를 해주지 않아 은행에 1시간 넘게 있으면서도 조회조차 못 한 적이 몇 번이나 있다"고도 한다.

미현씨는 자신의 집을 장만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하는데 “후견인이 부동산 투기라며 집을 사는 걸 허락하지도 않았다”라고도 했다.

법원은 김미현(가명)씨에 대한 한정후견을 개시하면서 한정후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행위를 위와 같이 정리했다. 사진 김미현씨 제공

법원은 김미현(가명)씨에 대한 한정후견을 개시하면서 한정후견인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행위를 위와 같이 정리했다. 사진 김미현씨 제공

“이제 홀로 서고 싶어요” 법원 찾았지만…후견은 끝나지 않았다

미현씨는 결국 서울가정법원에 한정후견을 종료해달라고 했지만, 지난 5월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현씨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고,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점 등은 인정했다. 하지만 미현씨가 지금 언니와 사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또 전세보증금에 자신이 얼마를 보탰는지 모르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부동산 거래나 거액의 금전관리 등 복잡한 재산관리 사무를 수행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미현씨를 대리한 최정규 변호사(원곡 법률사무소)는 "당사자를 오랫동안 지켜본 주치의나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는데도, 가사 조사관과의 면담 시간에 잘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정후견을 유지한 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지적했다.

공동 한정후견인인 미현씨 언니도 "재판부가 사소한 것 하나를 꼬집어서 재산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며 "자산관리 자격증이라도 따오라는 거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재판부는 집안에 유산 분쟁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점도 언급했다. 하지만 미현씨는 “한정후견이 종료되어도 스스로 법률적인 조력을 받을 수 있고, 형제들을 상대로 유류분을 청구해야 한다면 직접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미현씨는 현재 항고한 상태다.

약 30년 전 조현병이 발병한 김미현(가명)씨는 스스로 철저하게 투약 관리를 하고 있다. 미현씨의 주치의는 ‘인지기능의 저하가 거의 없으며, 스스로 경제적 활동 중이며, 복약 순응도 양호하며 자기관리 및 일상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태로, 사회적·경제적 자립 가능한 상태입니다.'라는 소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사진 김미현씨 제공

약 30년 전 조현병이 발병한 김미현(가명)씨는 스스로 철저하게 투약 관리를 하고 있다. 미현씨의 주치의는 ‘인지기능의 저하가 거의 없으며, 스스로 경제적 활동 중이며, 복약 순응도 양호하며 자기관리 및 일상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태로, 사회적·경제적 자립 가능한 상태입니다.'라는 소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사진 김미현씨 제공

‘후견 꼬리표’ 언제까지?…“제도 잘못 이용돼”

성년후견 제도가 미현씨와 같은 사람들을 옥죌 수 있다는 지적은 학계에서도 꾸준히 제기됐다.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철웅 교수(한국후견·신탁연구센터장)는 "후견인이 선임되면 행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헌법상 기본권을 제한할 때는 필요성이 명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 교수는 "법원이 '앞으로 이 사람은 이런 행위를 못 할 것이다'하고 가정적으로 생각해 성년후견이나 한정후견을 개시해서는 안 된다"며 "미현씨의 경우 후견 필요성이 명확하지도 않다"고도 덧붙였다. "재산 분쟁이 있을 때 미현씨가 자신을 법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누구인지 찾으려고 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면 '판단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이 한번 결정한 한정후견을 종료하는 사례는 드물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한정후견이 종료된 사례는 지난해 가을에야 처음 나왔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지적장애인인 20대 남성 A씨 사건이었다.

장애인복지관을 다니던 A씨와 친구들은 지인에게 협박과 사기 피해를 보았는데, 수사과정 중 피해 보상을 위해 부득이하게 어머니를 한정후견인으로 선정하게 됐다. 하지만 A씨는 어머니 도움이 없이도 막힘없이 수사에 임할 수 있는 상태였다. 실제로 다른 친구들 대신 수사 기관을 다니며 피해 내용을 설명하고 계좌 명세를 제출하는 등 앞장섰고, 결국 가해자도 처벌을 받았다. 이 일을 겪은 A씨는 자신보다 더 힘든 발달장애인들을 돕겠다며 사회복지사 2급 자격 요건을 갖췄지만, 사회복지사가 될 수 없었다.

사회복지사업법상 한정후견이 개시된 사람은 사회복지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A씨는 법원에서 한정후견 종료를 받아냈고,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A씨는 사회복지사업법의 해당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도 청구해 헌법재판소에서 심리가 진행 중이다. 사회복지사업법 외에도 ‘피성년후견인’을 결격 사유로 보고 있는 조항은 수백개다.

이 사건을 대리한 배광열 변호사(사단법인 온율) “지금의 성년후견 제도는 당사자를 제외한 모두가 편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발달 장애나 조현병, 치매가 있다는 이유로 ‘이 사람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지어 당사자가 결정할 여지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들도 아플 때만 병원을 가고 집 계약을 할 때만 공인중개사를 찾듯, 당사자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 스스로 맡길 수 있는 제도가 돼야 한다”라고도 했다.

배 변호사는 “현재 제도는 법조인이 아닌 비장애인에게 영원히 변호사를 붙여주는 것과 똑같다”고 비유하며 “제도 취지와 다르게 잘못 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도 ‘무기한 후견’은 드물어…“법원 태도도 바뀌어야”

해외 사례는 어떨까. 독일·프랑스·영국 등은 후견 기간을 정해놓고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후견이 끝나거나, 후견인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하지 않을 때 후견을 끝낼 수 있다. 후견인의 권한도 비교적 제한적이다. 대신 다양한 '대리 제도'를 두고 있다. 당사자가 자신에게 후견이 필요한 상황을 대비해 스스로 대리인을 선임해,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고, 후견이 필요한 상황에 즉시 대리행위를 할 수 있어 당사자 이익에 부합한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우리 성년후견제도는 당사자의 의사와 달리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통제돼 '사회적 사망선고'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현행 민법은 한정후견 종료 사유를 ‘한정후견 개시의 원인이 소멸한 경우’로 보고 있는데, 조현병이나 발달 장애와 같이 완치가 어려운 정신장애가 있다면 사실상 죽을 때까지 후견이 끝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고령의 최중증치매 환자 등 꼭 필요한 경우에 성년후견을 개시하고, 그 외에는 최대한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 중앙포토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 중앙포토

제 교수는 법원의 태도도 바뀔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가정법원의 경우 비교적 가부장적(paternalism)인 성격을 띠어 피후견인을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혀 있다는 것이다.

제 교수는 “좋은 취지일 수 있지만 현실에서 작동되는 결과는 정반대”라며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보호받는 사람이 문제 해결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또 "스코틀랜드에서는 후견 사건을 담당하는 법관들이 주기적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UN 장애인 권리 협약에 따라 법관과 가사조사관들의 장애 인권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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