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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색' 젤렌스키 "민주주의에 투자를"…81년 전 처칠을 잇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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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1일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직후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장병들이 서명한 국기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선물했다. A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1일 미국 의회에서 연설한 직후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장병들이 서명한 국기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선물했다. AP=연합뉴스

국방색 라운드넥 스웨트셔츠에 카고 바지, 황토색 부츠. 21일(현지시간) 약 8000㎞를 날아 미국 의회의사당 연단에 오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옷차림은 전날 최격전지인 돈바스 지역 바흐무트를 찾았을 때 그대로였다. 지난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내년 1월 새 출범하는 미 연방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전시(戰時) 대통령’은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의 돈은 기부(charity)가 아니라 세계 안보와 민주주의에 대한 투자입니다. 우리는 가장 책임 있는 방식으로 그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300일 만에 처음으로 조국을 떠나 미국을 극비 방문한 이유가 이 한마디로 요약됐다.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450억 달러(약 57조원)가 포함된 1조7000억 달러(약 2167조원) 규모의 2023 회계연도 정부 예산안 통과를 간곡히 부탁하면서 “상ㆍ하원의원들은 수백만 명 목숨을 구하는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지금까지 미국이 제공한 군사ㆍ금융 지원에 감사를 표하면서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계속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스웨트 셔츠·부츠 '전투복' 차림으로 백악관·의회 누벼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날 정오께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전쟁 중에 빠져나오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위해 백악관은 미군 사령관이나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공무출장에 사용하는 공군 수송기를 내줬다. 젤렌스키가 탄 공군 수송기 C-40B는 우크라이나에 가까운 폴란드 도시 제슈프에서 이륙했다.

오후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질 바이든 여사와 함께 현관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맞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푸른색과 노란색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질 여사는 하늘색 코트를 입었다. 하늘색과 노란색은 우크라이나를 상징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한 뒤 의회의사당으로 이동해 연설했다.

'무제한 지원' 반대 설득하려 영어로 20분 연설  

젤렌스키 대통령은 메시지의 힘을 위해 통역을 쓰는 대신 영어로 20여분 간 연설했다. 전직 코미디언답게 유머를 섞고, 우크라이나인들이 보낼 크리스마스를 언급하며 미국인들이 ‘내 일’처럼 느끼도록 하는 데 공을 들였다.

젤렌스키가 전쟁 승리를 위한 미국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우리에겐 대포가 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충분하냐고요? 솔직히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의회 일각에서 백지 수표식 지원에 제동을 거는 목소리가 나오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더 달라고 압박하는 현실을 유머로 승화했다.

"전기 없어 촛불 켜는 크리스마스, 불평 않겠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틀 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서 우크라이나인들은 아마도 촛불을 켤 텐데, 로맨틱해서가 아니라 전기가 없기 때문”이라며 러시아가 에너지 인프라를 파괴해 수백만 명이 난방도, 수돗물도 없는 상태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불평하거나 누구의 삶이 더 편한지 비교하지 않겠다면서 "미국의 안녕이 미국이 독립을 위한 투쟁과 여러 승리를 통해 얻은 국가안보의 결과물이듯 우크라이나인들도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전쟁을 존엄과 성공으로 치러 승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세계는 너무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이어서 이런 전투가 계속될 때 옆에 비켜서서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다”면서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해 러시아에 맞설 것을 주장했다. 조약 동맹이 아닌 우크라이나와 미국을 두고 젤렌스키가 “우리 두 나라는 이 전투에서 동맹”이라고 말한 것은 러시아를 향한 경고의 표현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1일 미국 정부가 제공한 공군 수송기를 타고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AFP=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1일 미국 정부가 제공한 공군 수송기를 타고 워싱턴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AFP=연합뉴스

미 공군 수송기로 워싱턴 도착…"젤렌스키, 처칠의 뒤를 잇다"

이번 방미가 81년 전인 1941년 12월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전쟁 중 워싱턴을 방문한 것을 연상시키면서 “젤렌스키가 처칠의 뒤를 이었다”(BBC)는 평가도 나왔다. 처칠 총리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상회담,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 후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을 제압하기 위한 미국과의 동맹을 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하며 한 연설을 인용하기도 했다. 루스벨트의 연설 중 "미국 국민은 정의로운 힘으로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구절을 낭독한 뒤 "우크라이나 국민도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국민, 절대적으로 승리할 것" 

젤렌스키는 바흐무트 전장의 군인들이 서명한 우크라이나 국기를 펠로시 의장에게 전달했고, 펠로시 의장은 이날 의사당에 게양한 성조기를 나무함에 담아 답례했다. 상·하원 의원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의사당에 입장한 뒤 2분여간 손뼉을 치며 환영했고, 연설 중간중간 여러 차례 기립박수로 지지를 표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美, 패트리엇 미사일 포함 2조3000억원 지원 발표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185억 달러(약 2조3000억원) 규모 추가 군사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지원 패키지에는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가 포함된다”면서 “패트리엇 포대를 훈련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이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방어하는 또 다른 핵심 자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은 “미국은 얼마가 걸리든(as long as it takes) 용감한 우크라이나 국민이 러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계속해서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전념할 것”이라고 거듭 약속했다. 장거리 지대공 미사일 시스템인 패트리엇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무기 가운데 가장 첨단으로, 단지 우크라이나의 전력 강화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굳건한 연대를 상징한다.

미·우크라, 장기전 가능성 시사

바이든 대통령은 젤렌스키를 초대한 배경에 대해 “미국 국민과 전 세계가 2023년까지 계속해서 단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쟁이 금방 끝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해석했다. 젤렌스키 역시 전쟁 종식 방안에 대한 기자 질문에 "단지 평화를 위해 내 나라의 영토와 주권, 자유에 대해 타협할 수는 없다"고 답해 전쟁 장기화를 각오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전쟁 중이지만…유머 섞인 기자회견·의회 연설

정상회담과 의회연설을 포함해 불과 10여 시간 머무른 긴박한 일정이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솔직한 발언과 부드러운 태도로 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를 설치하고 나면 패트리엇을 더 많이 받고 싶다는 신호를 바이든 대통령에게 또 보낼 것”이라고 말하자 좌중의 폭소가 터졌다. 우크라이나가 계속 군사 지원을 요구하는 데 대한 미국 내 비판적 시각을 유머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기자가 전쟁 초기 미국이 지원을 거절한 패트리엇을 이젠 주기로 했다고 지적하면서 “차라리 우크라이나가 필요한 모든 군사력을 줘서 일찌감치 모든 영토를 해방할 수는 없느냐”고 묻자 바이든 대통령은 젤렌스키를 가리키며 “그의 대답은 ‘예스’일 거다”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동의한다”고 받아쳐 또 폭소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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