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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저금리 시대의 관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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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그래도 경쟁률이 10대 1은 될 줄 알았는데….”

최근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 재건축 단지의 청약 결과가 나오자 업계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둔촌 주공은 이른바 ‘강남 4구’에서 나오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다.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었다지만 이런 상징성에 업계에선 내심 청약 열기의 부활을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1순위 청약 경쟁률은 평균 3.7대 1에 그쳤다. 2순위 청약에서도 일부 평형은 공급 가구의 5배인 예비 당첨자 수를 채우지 못했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의 1순위 경쟁률이 평균 164 대 1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전국의 미분양 주택 수도 어느새 지난해 말의 두 배를 훌쩍 넘겼다.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이 부쩍 매서워졌다. 기후변화가 아무리 극심하다 해도 계절은 바뀌고, 겨울은 오기 마련이다. 우리 경제가 돌아가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이상 열기를 내뿜던 시장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냉기가 감돈다. 투자는 물론 소비도 빠르게 움츠러드는 모양새다. 목돈이 들어가는 내구제부터 차곡차곡 재고가 쌓이고 있다. 새 차를 사기 위해 늘어서 있던 긴 대기 줄에서도 이탈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자동차 할부 금리가 10%대까지 오르면서 계약을 포기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금리 한파에 경기 움츠러드는데
정치권은 정쟁 몰두, 정부는 느긋
‘길고 혹독한 겨울’ 경고 외면하나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모두 돈값이 올라가며 벌어지는 풍경이다. 연초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초저금리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2008년 금융위기로 시작돼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에 한 차례 수명이 연장됐으니 장장 14년 만이다.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초저금리가 이대로 굳어져 어쩌면 새로운 정상 상태(New normal)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이 모든 환상을 단숨에 깨버렸고, 저금리의 종언은 현실이 됐다. 문제는 속도다. Fed가 ‘자이언트 스텝’을 성큼성큼 밟고, 한국은행이 보조를 맞추는 사이 우리 경제의 성장률 전망치는 뚝뚝 떨어지고 있다. 올해 2% 중반에서 내년엔 1% 초반으로 급전직하할 것이란 게 투자은행(IB)들의 예상이다.

이처럼 환경이 빠르게 변하다 보니 경제 주체들도 적응이 쉽지 않다. 틈만 나면 널뛰는 증시가 이를 대변한다. 지난달 말에도 제롬 파월 Fed 의장이 꺼낸 긴축 속도 조절론에 글로벌 증시가 한 차례 뜀박질했다. 하지만 자이언트 스텝(0.75%포인트 인상)에서 보폭을 좀 줄여봐야 빅 스텝(0.5%포인트)이다. 게다가 물가 안정을 위에선 ‘더 오랫동안, 더 높은 수준’으로 금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단서도 붙어 있었다. 이런 현실 자각에 증시는 금세 고꾸라졌다. 그러자 월가에선 오랜 상승 랠리에 미련을 못 버린 투자자들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는 분석이 나왔다.

저금리 시대의 관성에 젖어 일종의 ‘인지 부조화’ 증상을 보이는 곳은 또 있다. 불안해하는 시장을 앞장서 안심시켜야 할 정치권과 정부다. 내년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한 해가 될 것이란 경고에도 국회는 여전히 정쟁에만 몰두 중이다. 예산안의 법정 처리 시한을 훌쩍 넘기고도 여야가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규제를 풀고 세금 부담을 낮춰 투자와 일자리를 살려보자는 법안들 역시 표류를 거듭한다.

경제를 볼모로 힘자랑하는 거대 야당의 오만이 볼썽사납다는 건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의 대응 역시 지나치게 느긋해 보인다. 이른바 ‘레고 사태’로 파문이 일고, 채권 시장이 흔들리는 데도 금융당국의 대응은 한참 늦었다. 또 가계를 향해선 빚을 줄이라면서도 시장에 부담을 주는 한국전력공사의 빚덩이를 해소할 근본적인 방안은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저금리 시절이던 지난 정부에선 수많은 정책적 시행착오를 ‘퍼주기’로 메우며 그럭저럭 버텨 나갔다. 넘쳐나는 돈이 충격과 마찰을 흡수하는 일종의 윤활유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번 정부에선 그런 행운을 기대하긴 어렵다. 완충재가 사라진 시장에선 조금만 삐끗해도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파열음은 증폭된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길 바라는 시장을 향해 파월 의장은 “고통 없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고 일찌감치 못을 박았다. 이제는 길고 고통스러운 겨울이 올 것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부터 저금리 시절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