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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라 내려라… ‘관치금리’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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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연 6.5%면 피크(정점)야. 더 못 올라가. 여기서 꼭 가입해야 해.”
 “지금은 경쟁이 붙어서 이렇게 빨리 오르는 거지. 이렇게 빨리 오르기 힘들어요.”
 “이렇게 빨리 오르다가 언제 또 금리를 내릴지도 모른다니까.”

“예금금리 올려야” 압박하던 당국 #이젠 “인상 자제해야” 잇단 경고 #5%대 은행 정기예금 자취 감춰

 저축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연 6.5%를 기록했던 지난 10월 말.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한 저축은행 복도에서 치열한 ‘금리 대토론’이 벌어졌다. 토론 참가자는 지긋한 나이의 어르신 다섯 분. 이곳의 정기예금에 가입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던 이들은 경제와 금리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쏟아냈다. 현장 취재를 갔던 기자가 전해준 광경이다.

 심지어 한 어르신은 옆자리에 앉은 기자의 손에 번호표를 쥐여주며 “나는 이미 옆(에 있는 저축은행)에서 연 6.1% 상품에 가입했어. 6.5%보다 더 높게 받긴 힘드니 아가씨도 지금 해야 해”라며 번호표를 양보했다고.

 그때 저축은행 오픈런에 나선 이들이 맞았다. 지난달 24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올해 마지막 기준금리 인상분(0.25%포인트)까지 반영한 금리에 예금을 넣겠다며 계산기를 두드리며 나름 합리적 판단을 했던 이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시장금리도 오른다는 합리적 판단이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오판이 빚어진 건 서슬 퍼런 금융당국의 기세란 변수를 예상치 못했던 탓이다. ‘관(官)’의 기세가 등등한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패착이다. 역시, 이 땅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견뎌온 어르신들의 촉은 남달랐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동물적 감각이다.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수신금리 경쟁 자제를 당부하면서 주요 시중은행에서 연 5%대 예금 금리 상품이 사라졌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서울 시내 한 은행에 걸린 정기예금 금리 안내문. [연합뉴스]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수신금리 경쟁 자제를 당부하면서 주요 시중은행에서 연 5%대 예금 금리 상품이 사라졌다. 사진은 지난달 29일 서울 시내 한 은행에 걸린 정기예금 금리 안내문. [연합뉴스]

 ‘관치 금리’의 시대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5일 “금융권의 과도한 자금 확보 경쟁은 금융시장 안정에 교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과당 경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지난달 24일 “수신금리 과당 경쟁에 따른 자금 쏠림이 최소화되도록 관리·감독을 강화해 달라”고 했다.

 은행으로의 자금 쏠림이 야기하는 ‘돈맥경화’와 예금금리 상승에 따른 대출금리 오름세를 막기 위한 금융당국의 궁여지책성 경고지만, 금융당국 수장의 잇따른 ‘수신금리 인상 자제령’에 시중은행은 재빠르게 몸을 낮췄다. 이내 연 5%대 정기예금 상품은 자취를 감췄다. 저축은행 금리도 내려갔다. ‘파킹 통장’ 등에 돈을 넣어놓고 예금금리가 더 뛰길 기다렸던 이들만 황당할 지경이다.

 금융당국이 대놓고 예금금리 조정에 나선 게 처음은 아니다. 시곗바늘을 반년 전으로만 돌려도 금융당국의 입장은 정반대였다. 예금금리를 올리라고 은행의 등을 떠밀었다. 그 수단으로 구사한 것이 지난 7월 처음 도입한 ‘예대금리차 공시’다.

 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를 공시하며 줄 세우기를 했다. 은행들이 이자 장사로 막대한 이익을 낸다는 여론에 기댄 압박이었다. 각 은행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 결과 ‘1위가 될 수는 없어’를 향한 은행들의 치열한 눈치작전이 벌어졌다. 예금금리를 끌어올려야 했다. 그런데 이제 예금금리를 낮추라는 정반대의 주문이 몰아친다. 당국의 오락가락 주문에 은행은 난감하다.

 은행의 예금(수신)과 대출(여신) 금리를 결정하는 데 시장 상황보다 금융당국의 심기가 중요한 변수가 됐다. 금융당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관치 금리’가 시장의 가이드라인이 된 모양새다.

 ‘관치 금리’의 등장에 한은도 난감할 수 있다. 기준금리를 올리면 시장금리는 따라 오르기 마련이다.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하는 이유다. 하지만 한은이 지난달 24일 기준금리를 연 3.0%에서 3.25%로 0.25%포인트 인상했지만, 예금금리는 오히려 역주행했다. 통화정책과 엇나가고 있다.

 ‘관치 금리’가 시장을 지배하면 한은 금통위의 기준금리 결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볼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금통위원들도 금리 인상에 따른 가계와 기업 등의 이자 부담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어차피 금융당국이 시장금리를 적정 수준으로 지켜줄 테니 당국의 입만 바라볼 판국이다. '관치금리의 역설'이다.

 금리는 경제와 시장의 온도계 역할을 한다. 과열과 냉각의 수준을 가늠할 지표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개입은 시장 왜곡을 빚을 수 있고, 정부의 실패로도 이어질 수 있다. 온도계의 오작동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가능하면 손대지 말라는 가격에까지 손을 뻗는 금융당국의 “금리 올려, 금리 내려”가 더 큰 위험의 부메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