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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항일 토비 ‘홍창회’ 머물던 촌락 주민 3000명 도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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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2〉

1930년대 푸순의 노천 광산.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 후부터 40년 동안 석탄 2억t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사진 김명호]

1930년대 푸순의 노천 광산.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 후부터 40년 동안 석탄 2억t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사진 김명호]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반성하는 담화를 냈다. 전 참의원인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는 담화문을 꼼꼼히 살폈다. 장문의 의견서를 발표했다. “진정성이 없다. 반성을 했으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고 공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국과 중국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준다. 자제하기 바란다.” 이듬해 8월 15일 요시코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고이즈미가 야스쿠니를 찾았다. 8년 후 요시코도 세상을 떠났다.

요시코 “야스쿠니 참배, 한·중에 상처”

영화계 데뷔 직후의 리샹란 부녀. 1936년, 펑텐(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영화계 데뷔 직후의 리샹란 부녀. 1936년, 펑텐(지금의 선양). [사진 김명호]

만철(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은 중국인과의 소통을 중요시했다. 일본 직원들은 베이징 방언을 익혀야 한다는 규정을 뒀다. 만철 푸순(撫順)지사 중국어 교사의 딸 요시코는 중국어가 완벽한 것 외에는 평범했다. 당시 만주의 일본 여자애들은 매달 한 차례, 친한 친구 세 명이 같은 신발에 같은 머리, 같은 가방 메고 어울렸다. 요시코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평화롭고 즐거웠다. 어른들 사회는 전운이 감돌았다. 1931년 9월, 푸순에서 50㎞ 떨어진 선양(瀋陽) 교외에서 일본군이 자작극을 연출했다. 철로를 폭파하고 동북군을 범인으로 몰았다. 15년간 계속된 중·일 전쟁의 막이 올랐다.

소학(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요시코는 자신이 전란 시대의 여자애로 변한 것을 알 턱이 없었다. 폭파사건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 1년 후 평생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는 무서운 일을 목격했다. 회고록에 이런 내용을 남겼다. “여름날 밤, 엄마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다. 정장을 한 아버지는 외출 직전이었다. 엄마에게 애들을 깨우라고 재촉했다. 내게도 절대 엄마 옆을 떠나지 말고 동생들을 잘 돌보라고 당부한 후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엄마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떼로 몰려 뛰어다니고 노천 탄광 쪽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명과 함께 붉은 기운도 서서히 사라졌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중학 1학년, 열두 살 때였다.”

1930년대의 푸순. [사진 김명호]

1930년대의 푸순. [사진 김명호]

집 건너편에 실업협회 건물이 있었다. 협회 광장은 애들 놀이터였다. 잠에서 깨어난 요시코는 운동장에 사람이 몰려있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말리는 엄마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허리춤에 총 끼워놓은 남자들이 고성 지르며 분주하게 오갔다. 눈가리개를 한 남루한 복장의 중국 청년 뒤에 일본 헌병과 무장한 사복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사복들이 청년을 소나무에 동여매자 헌병이 다가갔다. 우악한 손으로 턱을 올리고 중국어로 목청을 높였다. 청년은 앞만 바라보며 입을 열지 않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돼도 마찬가지였다. 헌병이 차고 있던 긴 칼을 뽑았다. 고개를 잠깐 든 청년이 눈을 떴다. 요시코와 눈이 부딪히자 씩 웃었다. 화들짝 놀란 요시코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 요란하던 참새들의 재잘거림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밤 요시코는 악몽에 시달렸다. 동틀 무렵 이불을 걷어차고 광장으로 달려갔다. 목이 터질 것 같은 모친의 부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국 청년이 묶여있던 소나무 뿌리 인근에 응고된 피를 흙으로 덮었다. 헐떡이며 달려온 모친의 품에 안겨 울부짖었다. 다음날도 그랬고, 그다음 날도 또 그랬다. 훗날 당시 상황을 구술로 남겼다. “내가 중국 청년의 참변을 목도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푸순 탄광지역에는 토비(土匪)가 자주 출몰했다. 일본인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멀리 나가지 않았다. 일본의 푸순 수비는 허술했다. 만철의 재향군인들이 조직한 민간수비대와 거리마다 있는 자경단이 다였다. 토비들 중에도 대도회(大刀會), 홍창회(紅槍會), 마점산군(馬占山軍)의 세력은 웬만한 나라의 군대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긴 창에 붉은 천을 호신부로 달고 다니는 홍창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이들을 토비, 마적, 산적이라 부르며 악독한 강도 취급했다. 중국인들은 달랐다. 순수한 항일 유격대였다.”

중국 이름 ‘리샹란’으로 영화계 데뷔

만영 이사장 시절의 아마카스. [사진 김명호]

만영 이사장 시절의 아마카스. [사진 김명호]

1932년 9월 15일은 중추절이었다. 홍창회는 일본인들이 술 마시고 달 구경을 즐길 때 광산 습격을 도모했다. 1000여명이 광산에 진입해 10개 사무소 중 4개를 박살 내고 불바다를 만들어버렸다. 사무소 소장과 일본인 7명을 저승으로 보냈다. 날이 밝자 일본군의 보복이 시작됐다. 16일 오전 푸순의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 헌병, 광산 경비대 등 200여명이 14일 밤 홍창회가 머물렀던 핑딩산(平頂山) 촌락의 주민 3000여명을 도살했다. 오후에도 살상은 계속됐다. 인간 지옥을 탈출해 산속을 헤매는 민간인 300여명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요시코가 목도한 중국 청년도 마을로 도망 나온 촌락 주민이었다.

요시코의 부친은 평소 중국인과 교류가 빈번했다. 항일유격대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푸순현 고문직에서 쫓겨났다. 지인들이 많은 만주국 최대의 도시 펑톈(奉天)으로 이주했다. 노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요시코는 만영(滿映), 만주영화협회주식회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만주국의 태상황(太上皇) 아마카스(甘粕正彦)가 일본 선전영화에 적합한 중국 여배우를 물색했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요시코를 발견하자 무릎을 쳤다. 요시코는 리샹란(李香蘭·이향란)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영화계에 등단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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