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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샹란에 홀린 아마카스 “연기 못하는 가수 없어” 영입 지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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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호 33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3〉

젊은 시절, 리샹란은 나이에 비해 조숙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 반대였다. 1940년 20세 때 만영 직원들과 베이징을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젊은 시절, 리샹란은 나이에 비해 조숙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 반대였다. 1940년 20세 때 만영 직원들과 베이징을 방문했다. [사진 김명호]

1904년, 중국 동북 지역에서 중국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이 승리했다. 부동항(不凍港)이 딸린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에서 창춘(長春)까지의 철도 운영권이 굴러들어왔다. 만철(滿鐵),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관동군이라는 철도수비대까지 거느린 만철의 등장은 일본 군국주의의 대중(對中) 정치, 경제, 문화 침투의 첫발을 의미했다.

만철에는 영화반이 있었다. 1931년 9월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사변의 전 과정을 촬영하고 예하에 영화방영반을 신설했다. 일본문화 소개와 만주국 건국의 당위성 선전이 주목적이었다. 만주국 선포 후에는 만·일 화합(滿·日協和),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을 주제로 기록영화를 제작해 영화관에 배포했다. 만주국 경내의 동북인들은 만철이 출품한 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중국 영화의 중심지 상하이(上海)와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미국 영화를 좋아했다. 반일(反日) 색채가 강한 영화일수록 극장에 인파가 몰렸다.

반일 색채 짙을수록 극장에 인파 몰려

리샹란의 양아버지 판위꾸이는 돈황문물 700여 점을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둘째 딸 웨화(月華·앞줄 왼쪽 셋째)는 리샹란의 평생지기였다. [사진 김명호]

리샹란의 양아버지 판위꾸이는 돈황문물 700여 점을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둘째 딸 웨화(月華·앞줄 왼쪽 셋째)는 리샹란의 평생지기였다. [사진 김명호]

관동군은 외래 영화의 반일선전 저지와 내지 점령 지역 중국인들에게 일본민족의 우수성을 각인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만주국 경무(경찰)국과 공동으로 국책선전기관 만영(滿映), ‘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를 설립했다. 초대 이사장은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특별시 시장 진비둥(金壁東·김벽동)을 임명했다. 진은 청 황실 복벽운동 하다 보니 친일파가 된 숙친왕(肅親王) 산치(善耆)의 일곱째 아들이었다.

만영이 만든 첫 번째 영화의 주인공은 농촌 청년이었다. 토비들의 노략질에 분노했다. 만주국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부모의 반대로 주저하자 약혼녀의 질책을 받았다. “만주의 영원한 번영에 나서지 않는 너 같은 놈과는 평생을 함께할 수 없다.” 만주국 군복을 입은 주인공은 전투에서 토비 두목을 쓰러뜨리고 부상을 입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후 일본 의료진과 애국부인회의 정성 어린 치료와 간호에 감동했다. 예쁘고 자상한 부인회원과 새끼손가락 걸고 의남매도 맺었다.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은 마을 입구에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기염을 토했다. “일본제국과 만주국에 목숨을 바치겠다.”

만주를 휘젓고 다닌 일본 애국부인회 회원들. [사진 김명호]

만주를 휘젓고 다닌 일본 애국부인회 회원들. [사진 김명호]

첫 번째 영화는 시장에서 완패했다. 관동군 눈치만 보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실의에 빠진 진비둥은 사람이 변했다. 날 저물면 여배우들 틈에서 술에 취해 흐느적거렸다. 관동군은 만영의 특수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를 물색했다. 프랑스에서 유학생활 하다 만주로 돌아온 헌병대위 출신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는 평소에 “선전영화는 우선 재미있고 교묘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 아마카스 외에는 적합한 인물이 없었지만 워낙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다. 감히 권하지는 못했다.

관동대지진 시절 무정부주의자 오스키 사카에(大衫榮)는 물론, 함께 있던 연인과 연인의 어린 조카까지 살해해 우물에 집어 던진 아마카스는 선망의 대상이던 육군대학 출신이었다. 군국주의자들로부터 ‘누구도 못 할 일을 혼자 해낸 인물’이라며 추앙을 받았다. 만영 출신 중국 여배우의 구술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마카스는 만주국의 태상황(太上皇)이었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관동군 사령관도 각하라고 부르며 존경을 숨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카스 취임 후 제작 환경 동양 제일

헌병 대위 시절 오스키 사카에 살인범으로 법정에 선 아마카스. [사진 김명호]

헌병 대위 시절 오스키 사카에 살인범으로 법정에 선 아마카스. [사진 김명호]

만주국의 태상황은 일반 군인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선전은 글이나 그림보다 영화가 더 효과가 있다. 영화 종사자는 문화인들이다. 개성이 강하다. 누가 문화선전기관을 장악할 수 있을지, 누가 진정한 역량이 있을지, 신중히 물색해야 한다”며 관동군 사령관에게 만영 이사장직을 자청했다.

아마카스 취임 후 만영의 영화제작 환경은 동양 제일이었다. 독일에서 수입한 최신식 촬영기는 영하 40도에서도 작동에 문제가 없었다. 녹음시설도 소련인이 감탄할 정도였다. 현상기와 암실은 할리우드를 그대로 모방했다. 방음이 완벽한 대형 녹음실은 악대 100여명이 연주해도 여유가 있었다. 17개 지하창고는 가관이었다. 5개조가 매일 14시간씩 작업해도 5년간 사용할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겨울내내 하루에 소비하는 난방용 석탄이 평균 125t이었다. 다롄, 펑텐(奉天), 하얼빈(哈爾賓), 지린(吉林)에 설치한 출장소도 직원만 100명이 넘었다. 영화관 231개를 신축해 만영이 만든 영화만 상영했다.

아마카스는 상인들이 좌지우지하는 일본 영화계에 불만이 많았다. 사고치고 만주로 도망 오다시피 한 영화 관련 종사자 중에는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능력만 있으면 과감히 기용했다. 경력이나 사상 따위는 문제삼지 않았다. 만영도 만주국의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였다. 중요 보직은 일본인 일색이었다. 중국인은 촬영, 녹음, 조명 할 것 없이 조수 이상은 없었다. 문제는 배우였다. 관객이 중국인이다 보니 걸출한 중국 배우가 필요했다. 중국인들은 애나 어른이나 능청맞기가 배우와 흡사해도 촬영기 앞에서는 뭔가 어색했다.

리샹란(李香蘭·이향란)의 노래를 들은 아마카스는 귀가 멍했다. 중국인인 줄 알았더니 일본인이었다. 톈진시장 판위꾸이(潘毓桂·반육계)의 수양딸이라는 소문도 틀리지 않았다. 성도 복잡하고 성장 배경도 단순하면서 복잡했다. 복잡한 시대와 딱 어울렸다. 당장 영입하라고 지시했다. 측근이 17세라는 나이가 배우가 되기엔 애매하고 현재 가수라며 이의를 제기하자 바보 멍청이라며 호통을 쳤다. “여자는 남자와 다르다. 나이가 따로 없다. 노래 못하는 배우는 있어도 연기 못하는 가수는 없다.” 리샹란의 시대가 열릴 징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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