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노래·연기 일품 리샹란 숨지자, 중 “중·일 우호 공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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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51〉

만주영화공사 대표단과 서울(당시는 경성)을 방문한 리샹란(앞줄 중앙). 이 사진으로 한국인이라 오인한 사람이 많았다. 1941년 봄, 명월관. [사진 김명호]

만주영화공사 대표단과 서울(당시는 경성)을 방문한 리샹란(앞줄 중앙). 이 사진으로 한국인이라 오인한 사람이 많았다. 1941년 봄, 명월관. [사진 김명호]

1990년 홍콩 유명가수 장쉐요(張學友·장학우)가 신곡 ‘리샹란(李香蘭·이향란)’을 선보였다. ‘빛바랜 사진 속, 비록 붉은 빛은 없어도 꽃 같은, 따뜻하지만 얼음 같은 모습’이라는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당시 홍콩인들에게 리샹란은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잠시였다. 리샹란이 누군지 알려지자 반응이 급변했다.

홍콩 가수 장쉐요 노래 ‘리샹란’ 주인공

찰리 채플린과 야마구치 요시코. 서로가 열렬한 팬이었다. [사진 김명호]

찰리 채플린과 야마구치 요시코. 서로가 열렬한 팬이었다. [사진 김명호]

2014년 9월 12일 일본 참의원을 18년 역임한 전 환경청 차관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 언론이 일세를 풍미한 여배우이며 명가수이며 반전운동가이며 정치가였던 한 여인의 화려하고 비극미 넘치던 삶을 대대적으로 조명했다. 69년 전 사형을 선고해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던 중국도 외교부 명의로 성명을 냈다. “리샹란 여사가 향년 94세로 서거했다. 전후 중·일 우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혁혁한 공헌을 남긴 여사의 서거에 애도를 표한다.” 중국의 대도시와 만주국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노인들의 대화도 한동안 리샹란이 빠지지 않았다. “아직 리꼬랑이 살아 있었구나. 우리는 리꼬랑이 중국인인 줄 알던 시절이 있었다. 찰리 채플린이 지하에서 만나면 반가워하겠다.” 일제의 식민지를 직접 경험한 한국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리꼬랑의 노래와 연기는 일품이었다. 미모는 말할 것도 없었다. 허름한 복장도 리꼬랑이 걸치면 빛이 났다. 나는 이향란이 한국인인 줄 알았다. 눈 내리는 밤 정동교회 인근 밀크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이향란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같은 시대의 해와 달을 함께했어도 호칭은 제각각이었다. 리꼬랑은 알아도 리샹란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선양(瀋陽) 중심가에 있는 랴오닝호텔은 리샹란의 죽음 발표와 동시에 부산을 떨었다. 메인 홀 정면에 무대를 만들고 설명문까지 내걸었다. ‘1933년 11월 15일 리샹란의 모친은 이곳에서 열린 친구 생일 축하연에 딸을 데리고 참석했다. 이날의 주인공은 리샹란이 노래 잘한다는 것을 알고 한 곡을 청했다. 여성지배인에게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샹란은 13세 교복 차림이었다. 잠시 리샹란을 훑어본 지배인은 인근에 있는 전당포로 달려갔다. 고량주 한 병 주고 잡화상 집 딸이 저당 잡힌 치파오를 빌렸다. 치파오로 갈아입은 리샹란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요절한 작곡가 타키 렌타로(瀧廉太郎)가 영문학자 도이 반스이(土井晩翠)의 시에 곡을 붙인 황성의 달(荒城の月)을 4절까지 불렀다.’

외조부, 경성서 조선 청년에게 맞기도

촬영장에서 자태를 뽐내는 리샹란. [사진 김명호]

촬영장에서 자태를 뽐내는 리샹란. [사진 김명호]

리샹란, 야마구치 요시코, 리꼬랑, 이향란은 동일인이었다. 판수화(潘淑華·반숙화)라는 중국 이름도 있었다. 이름도 복잡하고 국적도 불분명했다. 리샹란도 이 점을 인정했다. “나는 만주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성장했다. 18세 되던 해 가을, 단기간 도쿄를 여행하기 전까지 일본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일본인 틈에 있을 때는 일본어를 쓰고 리샹란이라는 중국 이름이 생긴 후에는 중국어로 말하고 중국어로 노래하고 연기했다. 국적이 분명하지 않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하나는 조국이고 다른 하나는 고국이기 때문이다. 어디가 조국이고 어디가 고국이냐 물으면 대답을 못 한다. 우물거리다 우는 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나는 두 나라에서 사랑을 받았고 나도 두 나라를 사랑한다. 내 조국과 고국은 서로 대립하고 작전을 폈다. 열두 살 때 푸순(撫順)에서 목도한 사건은 너무 끔찍했다.”

리샹란은 1920년 2월, 랴오닝(遼寧)성 선양 인근의 베이옌타이(北煙台)에서 태어났다. 백일이 되기도 전에 강보에 싸여 푸순으로 이사했다. 사가(佐賀)현 출신인 부친은 한학자(漢學者)였던 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릴 때부터 회초리 맞으며 중국 고전과 중국어 교육을 받았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중국 땅을 밟았다. 베이징에서 노닐며 리지춘(李際春·이제춘), 판위꾸이(潘毓桂·반육계)와 안면을 텄다. 두 사람은 일본 패망 후, 친일 부역자를 단죄한 한간(漢奸)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친일파의 거두였다. 리샹란의 부친은 일본 지인의 소개로 만철에 일자리를 얻었다. 주 업무는 만철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중국어 교육이었다. 푸순현 고문도 겸직했다.

리샹란의 모친은 선박을 이용한 물류업자의 딸이었다. 외조부는 철도 운송이 발달하자 생계가 여의치 않았다. 일가족 데리고 조선으로 이주했다. 경성 골목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얻어맞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주행을 결심했다. 이유가 분명했다. “젊은 놈들이 불쑥 나타나 아무 이유 없이 몽둥이 휘두르며 나를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입에 침을 튀며 ‘언젠가 일본 왕을 머슴으로 부리고 왕비는 첩으로 삼다가 하녀로 부려먹고 일 못 하면 똥둑간에 던져버리겠다’는 무지막지한 노래 부르고 도망가더니 다시 와서 내 얼굴에 오줌을 쌌다. 조선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 언제 귀신도 모르게 맞아 죽을지 모른다.”

만주에 온 리샹란의 외조부는 푸순에 정착했다. 모친은 자유 연애의 신봉자였다. 소나기 피하러 다리 밑에 갔다가 미래의 남편을 만났다. 비 그친 후 맑은 하늘에 무지개가 뜨자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10개월 후 딸이 태어났다. 야마구치 요시코, 이름만 평범했다. 삶은 곡절이 많았다.

요시코는 어학과 음악에 재능을 발휘했다. 수학과 체육은 거의 빵점에 가까울 정도였다. 가정교육도 일반 일본 부모들과는 달랐다. 다도나 꽃꽂이, 요리, 재봉 따위는 가르칠 생각도 안 했다. 만철 고문이나 푸순현 고문 등 하는 일이 뭔지 추측 불가능한 직업도 바라지 않았다. 정치가의 비서나 통역을 거친 후 정치가나 기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1932년 9월 중순 요시코의 운명을 바꿀 참극이 푸순 탄광에서 벌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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