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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병상의 코멘터리

시대착오적인 ‘증오의 사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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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인 김영식 신부가 14일 저녁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용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미사' 도중 희생자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인 김영식 신부가 14일 저녁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용산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미사' 도중 희생자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다. 사진 유튜브 캡처

1. 신부님들이 하느님의 사랑과 무관한 증오의 감정을 내뱉고 있습니다.
-대한성공회 김규돈 신부가 14일 SNS에 ‘(윤석열 대통령) 전용기 추락을 염원한다’는 글을 올렸다가 사제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가톨릭 박주환 신부도 지난 12일 SNS에 ‘전용기에서 대통령 부부가 떨어지는 이미지’에 ‘비나이다’라는 글을 달아 올렸습니다. 천주교대전교구는 곧 공식입장을 밝힐 예정입니다.
-가톨릭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14일 도심에서 ‘이태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미사’를 올리면서 희생자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고 ‘윤석열 퇴진’을 촉구했습니다. 유족의 동의 없이 이뤄진 명단공개에 비판여론이 높습니다.

2. 한국 가톨릭의 정치적 진보좌파 편향은 뿌리가 깊습니다.
한국 가톨릭은 로마 교황청의 지휘와 방침에 따릅니다. 보수 교황청의 진보전향은 1962년부터 1965년 사이 계속되었던 ‘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전세계 주교ㆍ신학자들이 모여 교리ㆍ의식 기본원칙을 논의하는 세기적 총회입니다.
2차대전 당시 나치와 전후 독재정권에 협조적이었다는 비판에 직면한 가톨릭은 정치적으로도 진보적 사회참여라는 대전환을 결의합니다.

3. 진보 가톨릭을 한국에 구현한 대표적 인물이 김수환(1922-2009) 추기경입니다.
김수환은 유럽좌파의 중심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유학하고 1964년 귀국, 가톨릭신문사 사장이 되면서 공의회 소식을 알렸습니다. 김수환은 1969년 한국최초, 세계최연소(47) 추기경이 돼 박정희ㆍ전두환 정권과 싸웠습니다.

4. 김수환 추기경의 영향과 후원으로 탄생한 가톨릭 진보단체가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직접적 계기는 1974년 지학순 원주교구장의 구속입니다. ‘10월유신’반대 조직(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됐습니다. 이에 항의하는 최초 촛불집회를 주도한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입니다.
사제단의 역할이 가장 빛나던 시기는 1987년입니다. 명동성당에서 열린 5ㆍ18 추모미사에서 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 축소은폐 음모를 폭로했습니다. 이후 6ㆍ29선언이 나오기까지 명동성당은 시위대의 피난처가 됐습니다. 독재의 무력진압을 막아선 사람이 김수환입니다.

5. 민주화 이후 사제단은 점점 더 강경한 진보좌파성향을 보여왔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 이후 정치참여를 자제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사제단은 추기경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비꼬았습니다. 김수환의 후임 정진석(1931-2021)추기경에겐 ‘자진사퇴’를 요구했습니다. 정진석의 후임 염수정(80) 추기경에 대해선 ‘성서적 기초가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는 3명의 추기경을 모두 욕보인 셈입니다.

6. 급기야 사제들이 대통령의 죽음을 염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민주화 이후 35년이 흘렀습니다. 성직자들의 순교자적 희생만이 살아숨쉬던 저항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사제 개개인의 신념은 양심의 자유라지만, 미사복을 입은 사제단의 정치적 좌편향은 시대착오적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시대를 이끌었지, 착오하지 않았습니다.
〈칼럼니스트〉
20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