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
194

기자에게 보내는 응원은 하루 1번 가능합니다.

(0시 기준)

구독
264
  • 쿠데타 하루 전 “다 모여라” 전두환 가족 만찬서 남긴 말 유료 전용

    「 한남동의 총소리 」     ■  「 12·12는 관련자들의 주장이 극적으로 갈리는 사건입니다. 객관적 사실은 정리하고자 다양한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1차 자료로 전두환 회고록, 정승화 장태완 회고록 등 직접 관계자들이 남긴 자료와 인터뷰 등 증언. 2차 자료로 중앙일보 연재 ‘청와대 비서실’ 등 언론보도와 돈 오버더퍼의 ‘두 개의 한국’ 등 국내외 연구자료, 그리고 재판 관련 자료까지 챙겼습니다. 특히 미국의 역할과 관련해 1979년 당시 주한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글라이스틴과 그의 후임 제임스 릴리, 도널드 그레그의 회고록과 그 사이 비밀 해제된 국무성 자료도 참고했습니다. 」    「 1회. ‘세상에서 가장 긴 쿠데타’의 시작 」   12·12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날 있었던 객관적 사실은 한 가지다. 출발은 한남동의 총성이었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 서울 한남동 참모총장 공관 응접실에 두 명의 대령이 들어섰다. 10·26 수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의 허삼수(육사17기) 조정통제국장과 우경윤(육사 13기) 수사 2국장이었다. 허삼수는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우경윤은 육군본부범죄수사단장인데 합수부에 파견근무 중이었다. 허삼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직속부하, 우경윤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직속부하인 셈이다.      ━  참모총장 공관의 총격전   1979년 12월 12일 합동수사본부에 강제연행된 정승화 전 참모 총장이 수갑을 찬 채 헌병에 이끌려 재판을 받으러 가고 있다. 중앙포토   이들은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긴급보고할 사안이 있다며 찾아왔다. 응접실로 들어서는 두 사람은 무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무장한 병력을 대동해 공관 주변을 이미 장악했다. 연행 책임자 허삼수는 수도경비사령부(사령관 장태완) 소속으로 합수부에 파견돼 있던 33헌병대 소속 헌병 60명과 무장한 수사관 7명을 차출했다. 헌병대와 무장 수사관들은 공관 입구 초소 경비병을 제압하고, 공관 안쪽 본관 건물 입구를 에워쌌다. 수사관 2명은 건물 내 부관실에서 응접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승화는 두 대령이 “김재규로부터 돈 받은 것과 관련해 (정 총장의) 진술을 받아 녹음을 해야하니 같이 가야겠다”고 하자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 “대통령 재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두 대령은 “각하의 윤허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들이 총장공관에 도착하기 30분 전인 오후 6시 30분 삼청동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으러 갔다. (최규하는 유신헌법에 따라 12월 6일 대통령으로 뽑혔으나 총리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 30분이면 재가를 받아낼 것이라 예상해 오후 7시에 총장공관 방문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그 시간까지 재가를 받지 못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국방장관 불러와라”며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승화는 미심쩍은 마음에 부관을 불러 “총리 공관에 전화 연결하라”고 지시했다. 부관이 현관 쪽 부관실로 뛰어 들어간 직후 총성이 울렸다. 부관이 전화를 걸려는 순간 합수부 수사관이 총을 쏘았다. 부관과 함께 있던 총장 경호장교도 총에 맞았다. 수사관의 오인 사격으로 같은 편인 우경윤 대령도 총에 맞아 쓰러졌다.   총성이 나자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건물 앞에 있던 수사관이 대형 유리창을 깨고 응접실로 뛰어들었다. 공포를 쏜 다음 정승화 가슴에 총구를 겨눴다. 허삼수가 다른 수사관과 함께 정승화의 양쪽 팔을 끼고 나와 현관 대기중이던 승용차에 밀어 넣었다.   차는 10분 만에 보안사 서빙고 수사분실에 도착했다. 허삼수는 보안사령부에서 정보 허브 역할을 하고 있던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에게 ‘연행 성공’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은 대한민국 군권을 장악했다. 아직 정권 장악은 아니었지만 그 시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쿠데타’가 시작된 셈이다.    ━  전두환의 비장한 가족 만찬   5공 초기인 1981년 청와대가 공개한 전두환 대통령 공식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효선, 재국,재만,재용. 전두환은 1979년 12월 11일 밤 가족들을 모아 놓고 사실상 유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중앙포토   정승화 총장 연행은 전두환 입장에서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그의 비장한 심경은 12·12 하루 전인 11일 저녁 식탁에서 자녀들에게 당부한 말에서 확인된다.   시해범의 공모자로 밝혀진 사람이 너무 막강해 그를 수사하려다 자칫 나의 자리와 명예,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것까지 걸어야 할 수도 있다. 결코 너희들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맡겨진 역사적 임무를 비겁하게 포기할 수가 없다.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 (전두환 회고록)   전두환이 모험을 결심한 것은, 1차적으로 박정희 시신 앞에서 “진상을 기필코 밝히겠다”고 맹세한 충성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두환은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공범으로 간주했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으로 있는 한 10·26 수사를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김재규를 처벌(사형)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최악의 경우 김재규가 ‘민주화 영웅’으로 둔갑해 풀려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더 주목할 대목은 군부 내 파워 게임이다. 당시 전두환과 정승화는 군내 파벌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전두환은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최초 육사 졸업생인 11기 선두주자다. 육사 1기부터 10기까지는 6개월 단기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정규 4년제 교육은 최초의 미국식 장교양성 과정이었다. 그래서 11기는 스스로 ‘진짜 육사 1기’라고 자부했다. 전두환은 11기 이하 진짜 육사의 대표라는 자긍심에 가득 찼다. 육사 엘리트 조직인 하나회의 리더였다.    반면 육사 5기 정승화는 비(非)육사 출신과 가까웠다. 육사 2기 김재규는 정승화를 참모총장에 추천했다. 두 사람의 인맥은 겹쳤다. 정승화 인맥의 대표가 비육사(육군종합학교) 출신 선두주자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재규 인맥의 대표가 육사 9기 정병주 특전사령관이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10·26으로 계엄사령관이 된 이후 군내에서 제거해야 할 김재규 인맥을 오히려 강화한다고 의심했다.   정승화는 10·26으로 계엄사령관이 되자마자 육본 교육참모부 차장이던 장태완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했다. 정승화는 또 김재규의 안동농림학교 후배로 1975년부터 특전사령관이란 요직을 맡아온 정병주를 경질하지 않고 유임시켰다.   이는 곧 전두환 인맥의 배제를 의미했다. 전두환은 자신도 곧 ‘제거’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실제로 정승화는 전두환을 강원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12월 9일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노재현은 “시해사건 수사중인 상황에서 합수부장을 경질하면 오해 받는다”고 반대했다. 전두환은 이미 정승화가 자신을 내쫓고 후임 보안사령관에 장태완의 단짝을 앉히려 한다는 구체적 첩보까지 입수했다.   12·12는 군내 파벌의 헤게모니 다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세대교체를 불러왔다. 정승화는 구(舊)군부였고, 전두환은 신(新)군부였다.      ━  경복궁에 초대된 신군부 9인방     12·12는 10·26 이틀 뒤부터 시작됐다. 전두환은 10월 28일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한 직후 수사국장 이학봉과 다음 단계 수사에 대해 협의했다.   핵심은 정승화 수사 방안이었다. 이학봉은 당연히 구속수사를 주장했다. 전두환은 당장 연행을 어렵지만 구속수사 원칙에 동의했다. 심복 허화평 비서실장 등과 구체적 연행 방안을 협의했다.   전두환은 동시에 자신과 가까운 원로그룹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을 직접 만나 ‘군내 의견수렴’이란 형식으로 지지세력을 규합했다.     전두환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정승화 연행’ 계획을 보고한 것은 11월 3일이다. 노재현이 “나라를 좀 더 안정시킨 다음에 조사하자”며 반대했다. 이후 두 차례 더 보고했으나 모두 퇴짜 맞았다.    전두환은 직접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정승화를 연행하는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타이밍이 중요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온 최규하가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는 12월 6일 이후가 좋았다. 정식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것이 구속력이 있기 때문이다. 12일엔 신현확 국무총리가 국회 동의를 받았고, 그날 밤 최규하 대통령과 내각구성을 최종협의해 발표할 예정이었다. 12일은 또 군 장성 진급심사 발표일이었다. 진급심사가 차질 없이 끝날 필요도 있었고, 심사 발표에 따른 축하연과 위로연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느슨한 타이밍도 적절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무력충돌이 벌어질 경우 쿠데타 세력을 결집하고 대응할 수 있는 ‘지휘 캠프’ 구성이다. 장소는 30경비단이 최적이었다. 단장이 전두환의 분신 장세동(육사16기)대령이었기에 완전 신뢰가 가능했다. 청와대를 경비하는 30경비단은 경복궁 경내에 자리잡고 있어 비밀리에 움직이기 편했다. 총리 공관, 보안사령부와 가까워 신속 대응에 유리했다.   1979년 12월 13일 아침, 광화문 앞에 주둔한 신군부 쿠데타군. 노태우 사단장이 동원한 제9사단 예하 제29연대 병력으로 추정된다. 담장 뒤쪽은 철거 이전의 중앙청 건물. 중앙포토 지휘 캠프 초청대상은 확실한 동지, 병력 동원에 필요한 핵심 지휘관 9명이었다.   전두환보다 선배인 3성 장군 3명. 황영시 1군단장, 유학성 군수차관보,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사전 교감을 나눈 후원자들. 이들 중 황영시가 병력동원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당시 공수부대를 제외하고 실제 동원된 병력은 거의 모두 황영시 휘하 부대였다.    핵심 무력은 공수부대다. 서울 인근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동력과 전투력이 뛰어나다.   특히 공수부대는 미군(한미연합사)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했다. 한미연합사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기에 전방 전투부대 이동은 사전에 연합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서울 인근 3개 공수여단장이 그날 경복궁 30경비단에 초대받았다. 1공수 박희도(육사 12기), 3공수 최세창(육사 13기), 5공수 장기오(육사 12기)여단장이었다.    이밖에 계엄 업무에 동원돼 이미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 박준병 사단장, 그리고 71훈련단장 백운택 준장 등이 모였다.   청와대 외곽 경호를 맡고 있는 33경비단 김진영 단장(대령)은 장세동 30경비단장의 요청에 따라 9명의 손님을 맞이하는 안내자 역할로 미리 와 있었다.     조홍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장도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이다. 조홍은 이날 헌병으로 유일하게 장군 승진했다. 전두환은 조홍의 승진을 축하하는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12일 저녁 신촌의 고급 한식집(요정)에 조홍의 직속상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진급을 도와준 정병주 특전사령관, 그리고 헌병 병과 상관인 김진기 헌병감을 초대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초대받은 3명은 정승화측 핵심 3인방이다. 승진 축하 파티는 전두환이 만약의 경우 예상되는 반대세력 지휘부를 묶어두는 자리였다.   전두환은 치밀한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하고 오후 6시 30분 총리공관으로 직진했다. 그러나 현실은 시나리오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 🔎 등장인물 「 ◆김진영=1938년 경남 통영 출신. 육사 17기 대표화랑으로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청와대 외곽경비 담당인 33경비단 단장으로 쿠데타군에 가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나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로 강제 퇴임.   ◆노태우=1932년 경북 달성 출신. 육사 11기. 전두환과 절친으로 하나회 핵심. 12·12 당시 9사단장으로 병력 출동. 대장 예편 이후 내무부 장관과 민정당 대표 역임.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당선. 퇴임 후 반란죄로 무기징역. 2021년 사망.   ◆류병현=1924년 충북 청원 출신. 육사 7기. 초대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12·12 당시 신군부에 협력해 합참의장으로 영전. 주미대사 역임. 2020년 사망.   ◆문홍구=1924년 경남 합천 출신. 일제 강제징집돼 일본군 복무. 6·25 전쟁통에 육사 9기로 임관. 12·12 당시 쿠데타군에 반대해 강제전역. 에너지공단 이사장. 2019년 사망.   ◆박준병=1933년 충북 옥천 출신. 육사 12기로 하나회 멤버. 대장 예편 후 민정당 국회의원 사무총장. 자민련 부총재. 2016년 사망.   ◆박희도=1934년 경남 창녕 출신. 육사 12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제1공수여단장으로 병력 출동해 국방부와 육본 점령. 육군 참모총장. 보수우익 활동가.   ◆백운택=1932년 대구 출신. 육사 11기로 하나회 창립멤버. 12·12 당시 71 훈련단장으로 가담. 1982년 1군단장 재직중 사망.   ◆우경윤=육사 13기. 12·12 당시 육본 범죄수사단장으로 합동수사본부에 파견. 정승화 총장 연행 중 총상 입어 하반신 마비. 육본 헌병감 역임. 소장 예편.   ◆유학성=1927년 경북 예천 출신. 1949년 정훈 1기로 임관.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12·12 쿠데타군에 참여. 대장 예편. 중앙정보부장. 민정당 국회의원. 군사반란 유죄선고 받고 대법원 최종심 기다리던 1997년 사망.   ◆장기오=1932년 서울 출신. 육사 12기 하나회 멤버. 12·12 당시 5공수여단장으로 병력 동원. 중장 전역. 총무처 장관. 김영삼 정권에서 군사반란 재판이 시작되자 미국행.   ◆장세동=1936년 전남 고흥 출신. 육사 16기 하나회. 전두환의 최측근. 12·12 당시 30경비단장으로 쿠데타 지휘부에 장소 제공. 전두환 대통령 경호실장과 안기부장 역임.   ◆장태완=1931년 경북 칠곡 출신. 1950년 갑종 소위로 임관. 10·26 직후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발탁. 12·12 당시 쿠데타 세력과 대립. 2000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2010년 사망.   ◆정병주=1926년 경북 영주 출신. 육사 9기로 1950년 임관 참전. 1975년 특전사령관 취임후 1979년 12·12 당시 쿠데타 세력과 대립. 총격 입고 부상 후 강제 예편. 1989년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돼.   ◆차규헌=1929년 경기도 평택 출신. 육사 8기. 박정희 5사단장 시절 참모 인연으로 5·16에 참가. 수도군단장 시절 12·12에 참여. 대장 예편. 교통부 장관. 2011년 사망.   ◆최세창=1934년 대구 출신. 육사 13기. 하나회 멤버. 제3공수여단장으로 12·12 당시 전두환 지시에 따라 병력출동 시키고 직속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대장 예편. 국방부 장관.     ◆허삼수=1936년 부산 출신. 육사 17기 하나회. 보안사 인사처장으로 12·12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 강제연행. 전두환 정권 사정수석비서관. 친인척 비리 처벌 주장하다가 사직 후 미국행. 1992년 민자당 국회의원. 장애인 인권운동가로 변신.   ◆황영시=1926년 경북 영주 출신. 육사 10기. 1군단장으로 12·12에 적극 참여, 휘하 3개부대 병력 불법동원. 5공 정권 육군참모총장 감사원장 역임. 2022년 사망.   」   

    2024.04.15 15:45

  • 美 우려에 동조했던 김재규, 박정희 암살 한 달 전 만난 남자 유료 전용

    「 궁정동의 총소리 」   「 6회. 한·미 갈등의 약한 고리 김재규 」   정상회담은 잘 짜여진 약속대련이다. 그런데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약속 따윈 존중되지 않은 최악의 정상회담이었다. 한국의 최고권력자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까지 가르치려 들었다.      ━  아슬아슬했던 한·미 정상회담   1979년 6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만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카터 대통령과 축배를 하고 있다. 이날 오전 살벌한 정상회담을 했으나 오후 들어 협상이 타결되는 바람에 만찬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중앙포토   당시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 회고록에 따르면, 어렵사리 카터 대통령의 철군 결심을 바꿔놓은 미국 외교관들은 박정희가 정상회담에서 카터를 자극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한국 측에 ‘박정희가 철군 관련 언급을 자제해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회담장에서 직접 작성한 육필 원고를 꺼내더니 무려 45분간 안보 강의를 했다. 주한미군은 북한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 등으로부터 한국과 일본, 나아가 미국까지 지키는 보루라는 요지다.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는 어리석은 결정이란 결론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예상치 못했던 강의에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떨기 시작했다. 배석했던 밴스 국무장관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박정희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주한미군을 전원 철수시키겠다.   그리고 카터는 당초 예정됐던 ‘철군 중단’ 약속을 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원하던 말을 않는 대신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서 ‘긴급조치 9호 해제’를 요구했다.    카터는 회담을 끝내고 미국대사 관저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폭발했다.   카터는 자신의 리무진에 밴스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보좌관, 그리고 글라이스틴 대사를 같이 태웠다. 차를 타자마자 글라이스틴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삿대질까지 하면서 ‘철군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리무진이 대사관저에 도착해서도 카터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글라이스틴을 몰아세웠다. 밴스 국무장관이 글라이스틴 편을 들었다.     직속 상관의 지원을 받은 글라이스틴은 용기를 내 카터에게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철군의 대가로 박정희에게 요구하는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라고.  답은 ‘괄목할 만한 인권 신장’과 ‘국방비 지출 증대(예산 6%)’였다.     글라이스틴은 즉시 청와대에 문의했다. 박정희는 두 가지 모두 ‘OK’ 사인을 보냈다. 카터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카터는 다음 날 회담장에서 박정희에게 “(미군 철수와 관련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면서 “인권 상황 개선은 양국 관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쐐기를 박았다. 미국은 3주 뒤 ‘주한미군 철수 연기’를 공식 발표했다.      ━  카터, 김장환 목사를 박정희에게 소개     1973년 여의도에서 열린 부흥회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김장환(왼쪽) 목사가 통역하고 있다. 김장환 목사는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란 별명에 걸맞게 한국 보수 기독교계를 대표하면서 보수 정치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중앙포토.   카터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서 길가에 늘어선 수십만 인파의 환송에 매우 기분이 좋아졌다. 카터는 동행하던 박정희에게 뜬금 없는 질문을 던졌다. “각하는 종교가 있습니까?” 박정희가 “없습니다”고 하자 카터는 “각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면서 “김장환 목사를 보내 우리의 신앙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습니다”고 말했다.   김장환 목사는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인플루언서다. 김 목사의 별명은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다.   빌리 그레이엄(1918~2018)은 미국 보수 기독교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목사다. 그는 네 차례 방한해 초대형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중에서 세칭 ‘100만 인파’가 여의도(당시 5·16광장)에 모였던 1973년 대회가 유명하다. 당시 그레이엄의 설교를 동시통역했던 목사가 김장환이다.     1973년 미국의 복음주의 전도사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설교한 전도대회(여의도 광장)엔 세칭 '100만 인파'가 모이는 대성황을 기록했다. 중앙포토   김장환 목사는 “통역이 설교보다 낫다”는 극찬을 받으면서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 됐다. 김장환의 영어가 탁월했기도 했지만 그의 보수 성향과 정치적 영향력도 별명에 걸맞았다.   김장환은 미국 보수 기독교 지도자 및 정치인과의 깊은 인맥을 바탕으로 한국의 보수 정치에 영향력을 미쳤다. 박정희 대통령과도 만났지만, 전두환 대통령 이후 역대 보수 대통령 모두와 가까웠다. 2021년 당시 윤석열 대통령 후보를 조용기 목사 장례식장으로 불러 개신교 거물 목사들을 소개하고, 안수기도를 받게 해준 것도 김장환 목사다.   미국 보수 기독교 복음주의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계를 통해 한국 보수 정치권에 영향을 미쳐 왔다. 오늘날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광화문 태극기집회 참가자들이 미국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모습도 일맥상통한다.    ━  박정희, 주한미군 사령관과 내통     박정희 대통령이 1976년 한미연합군사령관에 부임한 베시 대장에게 사령부 기를 수여하고 있다. 사병으로 출발해 4성장군에 오른 베시 사령관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했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만족했다. 카터가 탄 비행기가 떠나자 박정희는 드문 미소를 지으며 글라이스틴 대사를 가볍게 포옹했다. 주위가 모두 놀랐다.     박정희의 만족은 주한미군 철수를 막았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일찌감치 주한미군 철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한미군사령관과 내통했기 때문이다.   미군 사령관 특별고문 하우스먼이 연결고리였다. 하우스먼은 5·16 직후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경력을 의심하는 미국 정부와 군부를 설득한 인물이다.   카터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공식화하는 명령서에 서명한 것이 1977년 5월 5일. 5월 17일 하우스먼이 김재규 정보부장 특보를 통해 연락해 왔다. 베시 주한미군사령관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 입장을 몰래 설명하면서 김재규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베시 사령관은 5월 19일 김재규와 만나 카터의 ‘미군 철수’ 고집을 꺾을 비방을 귀띔해 줬다.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공모, 미군 철수에 부수되는 보완조치(주한 미 공군 전력강화) 비용을 매우 비싸게 계산해 미국 의회에 내놓은 방안이었다. 이미 미군 철수에 반대하고 있는 의회이기에 보완조치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면 예산 지원을 거부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같은 날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주한미군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싱글러브는 “카터의 계획대로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반드시 전쟁이 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카터는 당장 싱글러브를 소환했다.     주한미군 고위 장성들의 조직적 반발이었다. 미군 장성들이 미군 철수에 반대하기 위해 박정희와 내통한 셈이다. 박정희는 이들을 통해 철군에 반대하는 미국 내 움직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  ‘한국적 민주주의’에 막힌 인권 개선     문제는 인권이었다. 사실 박정희는 인권과 관련해 ‘조속한 시일 내 개선’을 약속했지만 내심은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서구적 민주주의’ 반대말이다. 미국과 같은 서구 선진국들과 한국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에 민주주의 역시 다르다는 주장이다.    박정희는, 한국은 ‘북한의 위협에 따른 생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 특수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생존권은 국가존립의 기본 전제일 뿐 아니라 모든 개인적 기본권의 바탕입니다.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민주주의와 자유 등 기본권을 수호해야 합니다. (중략) 국력 배양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길입니다.” (1974년 국민교육헌장 선포 6주년 기념식 치사)   박정희는, 한국의 처지가 다르기에 처방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에겐 유신헌법이 정답이다. “유신체제는 자주적이고 자립을 위한 창의적인 체제이며, 유신체제의 정신적 기조는 주체의식과 애국심입니다.” (1974년 12월 26일 통일안보 보고회 치사)   박정희는 유신헌법 체제인 대한민국엔 인권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어떤 인권 문제가 있는가. 미국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답을 못 합니다. 인권침해란 법에 의하지 않고 재판도 않고 탄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유신)헌법에 따라 3심까지 재판해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인권침해라고 할 수 있는가” (1977년 5월 22일 비서진 오찬)   이처럼 박정희의 인권의식은 카터와 천양지차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는 미국에 약속한 ‘인권 개선’ 숙제를 풀 책임자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지목했다. 그런데 카터가 다녀간 이후 민주화 인사 석방 등 인권 개선 움직임이 일자 재야와 야당 정치인들이 기세를 올렸다. 박정희는 금방 강경으로 돌아섰다. 김재규는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민주 인사를 풀어주는 한편 강경해진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더 많은 민주인사를 잡아 가둬야 했다.   미국은 ‘인권 개선’ 책임자 김재규를 계속 압박했다. 김재규는 10·26 꼭 한 달 전인 9월 26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국 정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글라이스틴은 ‘두 가지 우려’를 말했다. 첫째, 정치적 대립이 첨예화돼 정치 불안이 조성될 수 있다. 둘째, 유신헌법 아래에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어렵다. 김재규는 “아주 정확하다”며 동의했다. 김재규는 미국 측의 주장과 압력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회고록에서 ‘박정희 암살에 미국이 개입한 것은 전혀 없다’면서도 ‘미국은 자신들의 행동과 말이 부지불식간에 박정희 몰락에 일조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고 적었다.   미국은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미국이 독재정권의 급소(인권)를 누르자 권부 핵심의 약한 고리(김재규)가 터진 셈이다. 철옹성 같던 권력이 순식간에 몰락했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 🔎 등장인물 「 ◆그레이엄=빌리 그레이엄. 1918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출신. 개신교(남침례교) 목사.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휩쓴 반공 보수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21세기까지 이어진 막강한 영향력으로 ‘개신교계의 교황’이라고 불릴 정도. 2018년 사망.   ◆글라이스틴=윌리엄 글라이스틴. 1926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미국인. 예일대 졸업 후 30년간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 마지막 공직이 주한 미국대사. 1978년부터 81년까지 근무. 2002년 사망. ◆김장환=1934년 경기도 수원 출신. 한국전쟁 당시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들어가 일하던 중 미군 목사의 눈에 띄어 미국 유학,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고 귀국. ‘한국의 빌리 그레이엄’이란 별명처럼 한국 보수 기독교계를 대표해 정치적 영향력 행사.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극동방송 사장, 침례교세계연맹 총재 역임. ◆밴스=사이러스 밴스. 1917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변호사에서 외교관으로 변신. 77년 카터 행정부 국무장관으로 중동평화협정 등에 기여했으나 80년 이란 테헤란에 억류된 미국 인질 구출작전 실패로 사퇴. 2002년 사망. ◆베시=존 베시. 1922년 미국 미네소타 출신. 사병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중 현지에서 소위 임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 참전. 76년 주한미군사령관.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 레이건 정부 합참의장. 2016년 사망. ◆브레진스키=즈비그뉴 브레진스키. 1928년 폴란드 출신. 하버드대 철학박사. 정치학자로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 보좌관. 미국식 가치관을 전파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외교 이론가. 2017년 사망.   ◆싱글러브=존 싱글러브. 1921년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군인. 한국전쟁에 대대장으로 참전. 77년 주한미군 참모장(소장)으로 카터 대통령의 철군에 정면 반대하는 언론(워싱턴포스트) 인터뷰로 소환돼 1년 후 예편. 2022년 사망. ◆카터=지미 카터. 1924년 미국 조지아 출신. 민주당 출신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77년부터 81년까지 재직. 이상주의·도덕주의 정치를 강조하며 한국 내 미군 철수와 인권 상황 개선을 강조하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과 시종 갈등을 겪음. 퇴임 후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 ◆하우스먼=제임스 하우스먼. 1918년 미국 뉴저지 출신. 46년 미군 대위로 한국에 파견돼 조선국방경비대 창설. 56년 주한미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이후 81년 퇴임까지 최고의 한국군 전문가로 활동. 96년 사망. 」 

    2024.04.08 15:28

  • 김재규 총 쏘자 '박정희 양아들'이 떴다…그 이름, 전두환

      ■ 추천! 더중플 - 전두환 비사 「 영화 ‘서울의 봄’의 악당 전두광(황정민 분). 이름은 한 글자 바꿨지만 그 모델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는 건 누구나 압니다. 한국사에 남을 빌런이지만 영화에서도 그랬듯 사람을 끌어모으는 힘이 있는 인물이었죠. 오늘의 ‘추천! 더중플’에선 이 문제적 인물 전두환을 탐구하는 시리즈 ‘전두환 비사’(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18)를 소개합니다.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는 지혜롭고 지적인 독자들을 위해 중앙일보의 역량을 모아 마련한 지식 구독 서비스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 구독 후 보실 수 있습니다.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중 앞에 처음 나타난 장면. 1979년 10월 28일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대표적 인물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두환 비사’는 이 문제적 인물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위한 탐구다. 인물 탐구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다.     ━  ‘박정희 양아들’이라 불린 군인 전두환     군인 전두환은 일찌감치 눈에 띄었다.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생도 시절 육사 참모장이었던 이규동(육사2기)이었다.  이규동은 내심 전두환을 사윗감으로 점 찍어두고 후원했다. 당시 후원이라고 해봐야 가난한 생도들이 주말 외출 나왔을 때 집밥 한끼 해먹이는 정도였다.  넉살 좋은 전두환은 그 때부터 동료 생도들을 몰고와 같이 신세를 졌다. 이런 전두환을 이규동의 딸 이순자(당시 중학생)가 “아저씨”라며 따랐다.   이규동은 1959년 사위 전두환 중위를 6관구 박정희 사령관에게 소개했다.  박정희는 “내 부관 하라”며 잡았지만 전두환은 사양했다. ‘강한 군인’을 꿈꾸던 전두환은 미국으로 유학, 특수전(레인저)교육을 받고 귀국해 공수부대(1공수) 창설에 참여했다.     박정희와의 인연은 5·16 쿠데타로 본격화됐다. 전두환은 5·16이 터지자 육사생도들을 설득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성사시켰다. 불안하던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굳히는 결정적 공을 세운 것이다.     박정희는 전두환을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에 임명했다. 얼마 뒤 전두환이 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기 위해 사직하자 박정희는 다시 전두환을 붙잡으려 했다. 박정희가 “전역해서 국회의원 출마하라”고 권했지만 전두환은 ‘직업 군인’의 길을 고수했다.   ▶[전두환 비사] 청와대 향해 조명탄 날렸다…‘박정희 양아들’ 만든 사건 셋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5997    ━  ‘직업 군인’에서 ‘정치 군인’으로   이후 전두환은 ‘군인의 길’을 열심히 달렸지만 박정희와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전두환은 19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1·21 사태) 당시 청와대 경비를 맡은 30경비대대장으로 결정적 공을 세웠다. 전두환은 1978년 제1사단장 시절 제3땅굴을 발견해 미군철수 압박에 시달리던 박정희에게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박정희는 1979년 봄 마치 10·26을 예감이라도 한 듯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발탁했다.    전두환은 10·26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0·26은 12·12를 불러왔고, 12·12는 5·17을 불러왔으며, 5·17은 현대사의 비극 5·18을 초래했다.   ▶[전두환 비사] 전두환 “군인은 멸사돌진”…김재규 체포 때도 그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4342    ▶[전두환 비사] ‘박정희 위험’ 눈치챈 전두환…직보 사흘 전 10·26 터졌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642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와 죽음으로 ‘정치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10·26은 돌발 사건이었지만, 12·12는 쿠데타의 시작이었으며, 그 쿠데타는 1980년 8월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으로 완성됐다. 세상에서 가장 긴 쿠데타였다. 전두환은 박정희로부터 군부정권을 이어받았다는 점에서 진정 양아들이었다.     ▶[전두환 비사] 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2757    그러나 군부독재의 역사적 유효기간은 이미 끝났다. 역사를 거스르며 군부통치 8년을 연장했던 전두환의 몰락은 집권 과정 이상으로 드라마틱했다. 그리고 그 결정적 순간마다 미국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전두환 비사] 가택연금 DJ ‘깜짝 외출’ 뒤엔, 박정희 미워하는 카터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445    ‘전두환 비사’는 중앙일보가 1990년부터 4년간 연재했던 ‘청와대 비서실’을 업데이트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30년이란 세월 탓에 업데이트 작업은 새로운 글쓰기가 됐다. 30년간 미국의 역할이 많이 드러났다. 주한 미국대사들의 회고록이 출간되고, 국무부 비밀문서들이 비밀해제되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이 계엄령 대신 629선언으로 물러난 배경엔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새로운 팩트를 충실히 반영하고자 했다. 읽기 편하도록 주요 사건 중심으로 풀었다. 매회 말미에는 등장인물 약력을 첨부했다.     ■ 목차 「 〈전두환 비사: “이젠 각하라 불러”…5공 신군부 권력비사〉 지금까지 연재를 소개합니다.  ※네이버 뉴스페이지에서는 하이퍼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래 링크를 복사해 주소창에 입력해주세요.    〈제1부〉 궁정동의 총소리   1회. 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2757   2회. 전두환 “군인은 멸사돌진”…김재규 체포 때도 그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4342   3회. 청와대 향해 조명탄 날렸다…‘박정희 양아들’ 만든 사건 셋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5997   4회. ‘박정희 위험’ 눈치챈 전두환…직보 사흘 전 10·26 터졌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642   5회. 가택연금 DJ ‘깜짝 외출’ 뒤엔, 박정희 미워하는 카터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445     」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4.03 21:00

  • 가택연금 DJ ‘깜짝 외출’ 뒤엔, 박정희 미워하는 카터 있었다 유료 전용

    「 궁정동의 총소리 」   「 5회. 보이지 않는 손, 미국 」   해방 후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한 결정적 변수는 미국이다. 한·미 관계의 핵심 이슈는 주한미군 철수다. 박정희 대통령 말년의 한·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61년 11월11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는 그의 좌익경력에 대한 미국의 의혹을 해소하는 첫 계기였다. 11월 14일 방미중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는 박의장.   박정희는 미국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박정희는 5·16 이틀 후인 18일 용산 8군 영내에 있는 주한미군사령관 특별보좌관인 하우스만(James Hausman)을 찾아갔다. 사실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부터 하우스만을 만나고자 연락관을 보냈으며, 만남이 이뤄지기까지 이틀 동안 연락관을 통해 하우스만과 소통하고 있었다.     “공산당 연루 혐의로 체포됐지만, 나는 사실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박정희는 6·25 직전 군내 좌익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아픈 과거를 스스로 꺼냈다. 미국이 5·16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공산주의자 경력은 미국 입장에서 5·16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정적 포인트였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우스만은 6·25전쟁 전부터 박정희를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당시 구명운동을 했던 장본인이다.   하우스만은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릴 정도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1946년 대위 시절 한국에 파견돼 한국군(조선국방경비대) 창설을 주도했다. 한국군을 가장 잘 아는 미국인 하우스만은 1980년대까지 미군 사령관 고문으로 근무하면서 한·미 관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우스만, 나를 위해 미국에 좀 갔다 오지 않겠소?” 박정희는 미국의 승인을 받고 싶었다. 당시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은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무력진압을 공언했다.  쿠데타에 성공했지만 주체세력들은 ‘역(逆)쿠데타’ 가능성에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본토에서도 국방부와 국무부, 합참 등에서 쿠데타 대응방안을 두고 설왕설래하던 상황이었다.   박정희의 요청을 받은 하우스만은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합참의장 등 고위 관계자들을 만나 박정희와 5·16을 변호했다. 미국은 박정희의 사상에 대한 의심을 풀었고, 5·16을 인정했다.  그 최종 승인 절차가 1961년 11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회담이었다.     하우스만은 미국으로 떠나는 박정희에게 “무조건 민정이양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는 약속을 지켰다. ‘민정(民政)이양’이란 ‘군부 정권’에서 ‘민간인 정권’으로 정부를 넘긴다는 의미다.   박정희는 정권을 넘기는 대신, 자신이 스스로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어 대통령이 되는 방식으로 ‘민정이양’ 모양을 갖췄다. 미국은 이를 약속 이행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전두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이후 1960년대 10년간 한·미 관계는 순항했다.    ━  ‘주한미군 철수’와 고슴도치론     1971년 한·미 관계에 적신호가 켜졌다.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다. 남은 2사단도 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72년 닉슨은 공산국가인 중국을 방문해 국교정상화를 위한 정상회담을 했다.   같은 해 베트남에서 전쟁 중이던 미군이 철수했다.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군 2개 사단이 여전히 베트남에서 피를 흘리던 상황에서 미군의 전격 철수는 박정희에게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1973년 월남파병 부대의 귀국 환영식이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파병 지휘관들이 박정희 대툥령에게 귀국신고를 하고 있다. 뒤쪽으로 박정희 얼굴 카드섹션이 보인다. 중앙포토   한·미 관계의 급변은 박정희에게 미국에 대한 불신과 함께 안보 위기의식을 불러왔다. 박정희는 강경 돌파를 선택했다. 고슴도치론이다.   “우리같이 작은 나라는 고슴도치가 돼야 한다. 온몸을 바늘로 둘러싸 큰 동물이 작다고 깔보고 함부로 짓밟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박정희는 고슴도치가 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1972년 독재권력을 강화하는 ‘10월유신’을 선포했다. 군사적으로 자주국방을 위한 무기 개발, 그중에서도 최종병기 핵 개발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두 가지 모두 미국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  박정희의 꿈, 핵개발의 좌절     핵무기 개발은 어차피 한국 자체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미국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미국의 감시를 피해 추진해야 했다. 북한도 비슷한 시기 핵개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찾은 대안은 프랑스였다. 비밀교섭 끝에 1974년 10월 핵폭탄 2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재처리 시설 1차 설계도가 완성됐다.   재처리 시설을 만들자면 1차 개념 설계, 2차 기본 설계, 3차 상세 설계까지가 필요하다. 겨우 1차가 끝난 셈이다. 그게 끝이었다.   마침 그해 5월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했다. 유엔 상임이사국 (미국·소련· 중국·영국·프랑스) 외에 핵실험 성공은 처음이었다.  놀란 미국이 전 세계 핵무기 관련 유통망을 전부 뒤졌다. 한국이 핵 관련 기술과 자재를 빨아들이고 있음이 확인됐다. 미국은 한국의 핵 개발을 막기 위해 전방위적 압박을 가해 왔다.   1975년 말 프랑스에서 계약을 파기하자고 연락이 왔다. 박정희는 1976년 1월 프랑스와의 계약을 취소해야만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핵개발 연구인력들을 한국핵연료개발공사라는 새 조직으로 옮기고 발전용 핵연료봉을 만들게 했다. 박정희는 숨지기 직전까지 “1981년이면 핵무기 개발을 완료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 꿈이 실현 가능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박정희는 끝까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핵개발 이슈는 박정희 말년까지 한·미 갈등의 한 축으로 살아 있었다.     ━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집념     1977년 미국의 도덕주의자 카터 대통령의 등장은 한·미 갈등의 양상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켰다. 초특급 이슈는 주한미군 철수였다.  카터는 대통령 후보 시절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했다. 카터는 취임 첫 해인 1977년 5월 철군 명령을 내렸다. 1978년 말까지 2사단 1개 여단 철수. 이어 1980년 두 번째 여단과 지원병력 철수. 1982년까지 완전 철수. 한국정부에는 일방 통보됐다.    결과적으로 철군은 없었다. 카터의 참모들이 모두 반대했기 때문이다. 카터 대통령의 최측근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이 1978년 카터의 자존심을 구기지 않으면서 사실상 철군을 철회하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철군을 ‘취소’하는 대신 ‘축소’하는 대안이었다. 1차 철수 대상이 전투부대 1개 여단(6000명)에서 1개 연대(800명)로 줄어들었다. 이후 철수는 흐지부지됐다.   주한미군 철수를 번복한 결정적 계기는 북한군 탱크의 급증 때문이었다. 휴전선 이북 지역의 이상 현상이 처음으로 포착된 것은 1975년 5월.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정보분석관이 항공사진 속 북한군 탱크 숫자를 하나씩 세다가 과거보다 훨씬 많아진 사실을 확인했다. 수년간 탱크가 80%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주한미군은 북한 군사력 전반에 대한 정밀재검토를 국방부에 요청했다.   국방부는 1969년 이후 촬영된 모든 항공사진과 전기통신 정보를 샅샅이 대조했다. 1978년 중순 완성된 비밀보고서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북한군 전력이 10년 전보다 두 배로 늘었다. 탱크 부대가 휴전선 인근에 집중 배치됐다.   1979년 1월 초 보고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됐다. 의회가 반대 입장을 명백히 했다. 철군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  카터의 ‘인권’ 압박과 김대중 석방     이런 상황에서도 카터는 외견상 철군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 카터의 관심사는 ‘인권’이었다.  전문 외교관 글라이스틴 대사는 카터가 집착하는 ‘인권’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한 묘안을 짜냈다.   어차피 불가능해진 ‘미군 철수’ 카드를 외교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철수 안 한다’고 한국 정부에 생색을 내면서, 대신 ‘인권상황 개선’을 요구하는 방안이다.     ‘인권 개선’에 반색한 카터가 그토록 미워하던 독재자 박정희를 직접 만나기로 했다. 글라이스틴은 1978년 10월 박정희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미국이 요구한 인권 개선안은 ‘긴급조치 9호 해제’와 ‘민주인사 석방’이었다. 대표적인 민주인사는 김대중이며, 김대중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 중이었다.     1979년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를 접견하고 있다. 미국 대사가 야권 인사를 공개적으로 만나는 것은 박정희 정권의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재야인사 김대중은 가택연금중이라 만날 수 없었다. 중앙포토. 박정희도 적극적이었다. 1978년 말 김대중을 석방했다. 가택연금으로 외부 활동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대중은 신민당 총재를 뽑는 전당대회 전날인 1979년 5월 29일 밤 김영삼 지지자 단합대회장에 등장했다.   유신 이후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김대중의 깜짝 등장에 함성이 터져 나왔다. 김대중은 김영삼 후보의 경쟁 상대인 이철승 후보의 중도통합론을 비판했다.   “이철승씨의 중도통합론은 말이 되질 않는다. 택시 합승을 하더라도 방향이 같아야 된다. 독재는 북쪽이고 반독재는 남쪽인데,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 어떻게 중도 통합하는가. 내일 전당대회는 ‘친 유신파’와 ‘반 유신파’의 대결이다. 반드시 김영삼 동지를 총재로 당선시켜야 한다.”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들은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김대중이 지지 연설하면 김영삼 당선된다”고 보고했다. 외출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다.  그러나 김재규는 끝내 김대중의 외출을 막지 않았다. 결국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돼 강경투쟁에 나섰다. 김재규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 꼭 한 달 전. 카터가 박정희에게 ‘정상회담 전 인권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는 가시적 조치를 보여달라’고 압박하던 상황이었다.   김재규는 정치공작 책임자로서 김영삼의 당선을 막아야 했지만, 다른 한편 미국의 ‘인권 개선’ 압박에 김대중의 외출을 막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카터의 방한 이전 상황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카터와 박정희의 정상회담은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 🔎 등장인물 「 ◆글라이스틴=윌리엄 글라이스틴. 1926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미국인. 예일대 졸업 후 30년간 외교관 생활의 대부분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 마지막 공직이 주한 미국대사. 1978년부터 81년까지 근무. 2002년 사망.   ◆닉슨=리처드 닉슨. 1913년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69년 대선에 승리해 미국 37대 대통령 취임. 베트남 철군 공약을 이행하면서 중국과 정상회담을 하고 한국군 7사단까지 철수시킴. 반전 여론의 지지를 받아 71년 대선에서 승리했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 94년 사망.   ◆매그루더=카터 보위 매그루더. 190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미국인. 미국 육사 졸업 후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에서 주로 근무. 59년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서울에 부임. 5·16에 반대해 쿠데타군 진압을 시도했으나 한국군 병력 동원에 실패. 1961년 전역. 1988년 사망.   ◆브레진스키=즈비그뉴 브레진스키. 1928년 폴란드 출신. 하버드대 철학박사. 정치학자로 카터 행정부 국가안보 보좌관. 미국식 가치관을 전파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외교 이론가. 2017년 사망.     ◆카터=지미 카터. 1924년 미국 조지아 출신. 민주당 출신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77년부터 81년까지 재직. 이상주의·도덕주의 정치를 강조하며 한국 내 미군 철수와 인권상황 개선을 강조하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과 시종 갈등을 겪음. 퇴임 후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   ◆하우스만=제임스 하우스만. 1918년 미국 뉴저지 출신. 46년 미군 대위로 한국에 파견돼 조선국방경비대 창설. 56년 주한미군사령관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 이후 81년 퇴임까지 최고의 한국군 전문가로 활동. 96년 사망.  」 

    2024.04.01 15:32

  • ‘박정희 위험’ 눈치챈 전두환…직보 사흘 전 10·26 터졌다 유료 전용

    「 궁정동의 총소리 」   「 4회. 정치공작 실패가 초래한 비극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1회 공판에 참석한 김재규 피고인. 오른쪽 한 사람 건너 앉아 있는 이가 김계원 전 비서실장. 중앙포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왜 박정희 대통령을 쏘았을까.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술자리에서 총격 직전 오간 대화에서 당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차지철 경호실장이 강경론으로 김재규를 몰아붙이고 있다.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신민당 공작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김재규는 “주류들이 강경해서 시끄럽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옆에서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싹 탱크로 깔아뭉개야 합니다”고 끼어들었다.   둘째, 박정희 역시 강경론으로 차지철 편을 들면서 김재규를 질책했다.  박정희는 특히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관련해 “김영삼이를 미국 브라운 국방장관 오기 전에 기소하라고 했는데, 류혁인(정무수석)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 한·미 국방장관 회의고 나발이고 볼 거 없이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냔 말이야. 미국 놈은 범법한 놈 처벌 안 하나”라고 말했다.     김재규가 “각하, 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당한 것으로 국민들이 이미 처벌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속한다면 김영삼을 두 번 죽인다는 인상을 줄 겁니다”라고 반대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박정희는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라며 질책했다.    ━  강경파 김영삼의 총재 당선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1979년 국회에서 제명된 뒤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당시 김영삼은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겼다. 중앙포토   당시 정치 핫이슈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신병처리 문제였다. 김영삼은 야당의 강경파 리더였다. 온건파 리더는 이철승 의원이었다.   박정희는 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강경파 김영삼의 총재 당선을 막으려 했다. 김재규와 차지철이 앞다퉈 정치공작을 벌였지만 실패했다. 18년 독재권력에 균열이 생겼다.    유신체제에서 박정희는 사실상 국회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재적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했다. 박정희가 뽑은 의원들의 모임인 유신정우회(유정회)가 원내 제1당이다. 유정회 대표가 국회의장까지 맡았다.  이에 더해 박정희가 만든 공화당이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박정희는 국회의석 3분의 2를 직접 휘하에 두었기에 마음대로 국회를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국회의석 3분의 1에 불과한 야당마저 지배하고자 했다. 군인 박정희는 일사불란한 상명하복을 최고가치로 여겼다. 박정희가 생각하기에, 정치는 혼란과 비효율이며, 정치인은 말썽꾸러기 협잡꾼에 불과했다.    당시 야권 지도자는 3명. 온건파 이철승, 강경파 김영삼, 그리고 장외 김대중이다.   박정희는 당연히 이철승을 좋아했다. 김영삼이나 김대중처럼 ‘유신철폐’를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월 전당대회에서도 이철승 당선 공작을 지시했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늘 손발이 묶여 있었다. 5월 전당대회 당시 김대중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가택연금’ 상태였다.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김대중은 형 집행정지로 나와 있으니까 떠들면 언제든지 감옥에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김영삼도 싫어했다. 박정희는 5월 전당대회 직전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영삼은 전당대회 끝나면 이거야!”라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박정희는 이철승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정치공작은 공식적으로 중앙정보부가 맡았다. 그런데 정권 말기 증상이 짙어지면서 차지철 경호실장이 정치공작에 더 영향력을 발휘했다. 차지철은 정치자금을 주물렀다. 비밀리에 정보조직까지 운영했다.    정치공작은 실패했다. 1차 투표에서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 등. 누구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2차 투표에서 신도환과 이기택 표가 어디로 가느냐가 승부의 관건이었다.   차지철은 이런 사태를 예상해 이철승 후보를 지원하는 한편 신도환 후보를 집중 공략했다. 신도환은 반공청년단장 출신으로 우파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 고향이 대구인지라 박정희와도 잘 아는 사이다. 당연히 차지철이 일찍부터 신도환을 챙겼다. 신도환은 야당 의원이면서 청와대 경호실을 들락거렸다. 차지철의 공략에 신도환은 “2차 투표에서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물론 신도환은 생전 인터뷰에서 “정보부 간부와 김재규 정보부장, 마지막으로 차지철 경호실장까지 접근해 왔지만 모두 뿌리쳤다”며 매수설을 부인했다.)   당시 김영삼은 김대중의 지지까지 받아 이철승을 ‘사쿠라’(일본말로 벚꽃. 정권에 매수된 야당 정치인이란 의미)로 몰아붙이며 바람을 일으켰다. 2차 투표가 시작되자 3위 득점자인 이기택이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다. 이기택은 원래 신도환 계열이었는데 강경 바람에 올라타 김영삼 편에 섰다.   그런데 신도환은 이철승 지지 선언을 하지 않고 한참을 망설였다. 뒤늦게 지지 선언을 했지만 이미 신도환 지지표 상당수가 바람을 타고 김영삼으로 넘어갔다. 결국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됐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영삼도 강경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김영삼은 9월 16일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명백한 선택을 해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유리된 소수의 독재 정부냐,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이냐”면서 “미국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의 응답은 ‘김영삼 의원직 제명’이었다.  유정회와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10월 4일 야당이 점거한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의사당 146호실에 모여 김영삼 제명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의정 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당시 김영삼이 남긴 명언이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      ━  김재규 “부마 사태는 민란”   1979년 10월 부마 민주항쟁 당시 계엄령 선포에 따라 부산 시청 앞에 진출한 장갑차와 탱크. 중앙포토   김영삼의 제명은 그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지역구)과 마산(고향)을 들끓게 했다. 부마 사태가 터졌다. ‘부마 민주항쟁’이다.  10월 15일 오전 학내 시위를 벌이던 부산대 학생들이 오후에 시내로 진출했다. 광복동 좁은 골목을 휘젓는 숨바꼭질 시위가 계속되면서 시민들까지 합세했다. 시위가 과격해지면서 밤새 파출소 10여 곳이 파괴됐다.  18일 0시 부산 지역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자 부산 지역 시위는 가라앉았다. 대신 김영삼의 고향 마산으로 시위가 번졌다.    시위현장을 둘러보고 온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 만찬 직전 김계원에게 “부마 사태는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민란”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이어 “이런 심각한 상황을 차지철이 각하께 왜곡해 보고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김계원은 “차지철이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어”라며 동조한다. 이때 김재규가 한 말이 “그 자식 해치워 버릴까요”다.     온건파 김재규는 1차적으로 차지철을 제거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에서 박정희까지 암살한 셈이다.  단순 우발 사건이 아니다. 정치적 사건이며, 권부 내 노선싸움이기도 하다. 김재규는 차지철을 제거할 경우 박정희 암살도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부를 혁명위원회로 격상시키면서 본인이 의장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할 구상까지 했다.    이에 대해 전두환은 1987년 대통령 시절 “1979년 3월 보안사령관으로 가서 권력 주변을 보니 형편없었다. 김재규와 차지철의 암투가 심각해 박정희 대통령이 위험해 보였다”라고 측근들에게 말했다.  전두환은 두 사람의 알력 문제를 대통령에 직접 보고하고 '차지철 경질'을 건의하기 위해 10월 29일 보고 일정까지 잡았다. 그러나 보고를 불과 사흘 앞둔 10월 26일 모든 게 끝났다.   결국 국내정치, 즉 내치의 실패가 독재정권의 명운을 재촉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시점, 박정희는 외치에서도 실패했다는 점이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다. 미국은 늘, 잘 보이지 않지만,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   ■ 🔎 등장인물 「 ◆김대중=1924년 전남 신안 출신. 1971년 신민당 대선후보로 낙선. 유신 이후 해외망명. 1973년 일본 도쿄에서 납치돼 피살 직전 미국 도움으로 풀려나 귀국.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대선 도전했으나 낙선. 1997년 4번째 도전해 15대 대통령.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노벨평화상 수상. 2009년 사망.   ◆김영삼=1929년 경남 통영 출신. 1954년부터 1979년까지 국회의원 연임. 1987년 통일민주당 대선후보로 낙선. 1990년 3당 통합으로 집권 민자당 대표최고위원. 1992년 민자당 국회의원(9선. 역대 최다선) 겸 총재로 대선 출마해 당선. 14대 대통령. 2015년 사망.   ◆류(유)혁인=1934년 경북 안동 출신.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 1973년 청와대 정무수석. 5공에선 정치규제 받다가 6공 출범 후 포르투갈 대사, 공보처 장관 역임. 장남이 보수논객 류석춘 연세대 교수. 1999년 사망.   ◆브라운=해럴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 1927년 뉴욕 출신. 1977년부터 1981년 카터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한 핵물리학자. 1979년 10월 18일 한·미 국방장관 회담으로 방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주인사 석방 요구 압력을 넣었다. 2019년 사망.   ◆신도환=1922년 경북 의성 출신. 일제하 메이지대·도쿄대 유학. 1958년 무소속 국회의원으로 자유당 입당. 1959년 우익단체인 대한반공청년단 단장. 부정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8년간 수감생활. 1970년 신민당 입당,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 2004년 사망.     ◆이기택=1937년 경북 포항 출신. 1960년 4·18 고려대생 시위 주도. 1967년 야당인 신민당 의원으로 정계 입문. 양김(김영삼·김대중)시대  ‘제3의 선택’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2016년 사망.   ◆이철승=1922년 서울 출신. 전북 전주에서 성장. 해방 후 우파 학생운동가. 1954년 무소속 당선 후 야당 활동. 1970년 양김과  ‘40대 기수론’ 주장. 유신 시절 ‘중도통합론’을 주장한 온건파로 ‘사쿠라’(매수된 야당 정치인) 비판 받아. 2016년 사망. 」 

    2024.03.25 15:13

  • 청와대 향해 조명탄 날렸다…‘박정희 양아들’ 만든 사건 셋 유료 전용

    「 궁정동의 총소리   」 「 3회. ‘박정희 양아들’ 전두환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등장하자마자 박정희 대통령의 양아들이란 소문이 나온 것은 그만큼 박정희가 전두환을 총애했기 때문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전두환은 박정희를 위해 3가지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  육사생도 5·16 지지 퍼레이드     1961년 5월 18일 오전 서울 태평로.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이 5·16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생도들의 오른쪽에 덕수궁 돌담과 대한문의 지붕이 보인다. 몰려나온 시민들 앞엔 계엄군이 착검한 총을 들고 서 있다. 5·16은 육사를 비롯한 3군 사관생도들의 거사 지지로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진 국가기록원 첫 번째는 5·16 직후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을 벌인 공이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과 쿠데타군은 성공적으로 서울 시내로 진입, KBS 라디오를 통해 ‘혁명 성공’을 선포하고 육군본부에 군사혁명위원회까지 차렸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당시 군부 사정으로 보자면 5·16은 일부 불만세력이 일으킨 도발이었다.    당시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은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지도자로 모시겠다’는 제안을 받고서 거부했다. 거꾸로 “이만하면 됐으니 복귀하라”고 명령했다. 서울·경기 일대 실병력을 보유한 이한림 1군 사령관은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선언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계엄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장면 총리는 행방불명이었다.  결정적으로 주한미군 매그루더 사령관은 “미군이 보유한 작전지휘권 침해”라며 ‘쿠데타 무효’를 선언했다.     쿠데타가 흔들리는 긴박한 상황에서 5·16 주체세력들은 지지여론 조성을 위해 육사생도들을 동원해 시가행진을 벌이고자 했다. 실제로 일부 대령이 생도들을 동원하고자 육사로 찾아갔다. 그러나 육사교장 강영훈이 “생도들을 정치도구로 이용하면 안 된다”며 가로막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때 전두환 대위가 등장했다.  쿠데타 세력이 용산 육군본부를 장악한 직후인 16일 오전 8시 전두환은 벌써 육본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두환은 당시 서울대(현재 대학로 위치) ROTC 창단 준비위원이었다. 전두환은 쿠데타 세력의 리더가 박정희 장군인 것을 확인하고 지지세력 규합에 발 벗고 나섰다.   전두환은 이미 박정희를 잘 알고 있었다. 장인 이규동 덕분이다.  이규동은 일제하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국 육군으로 근무했다. 해방을 맞아 귀국한 다음 육사 2기로 지원했다. 경리감까지 지내고 육군준장으로 전역했다. 박정희와 경력이 겹친다. 육사 동기에다 같은 만주군 장교 출신이다.     이규동은 육사 참모장 시절 축구 골키퍼이자 축구부장인 전두환을 눈여겨봤다.  주말마다 집으로 불러 밥을 먹였다. 생도들이 주말에 외출해도 돈이 없어 밥을 사 먹기 힘든 시절이었다. 당시 여중생 딸이 전두환을 좋아했다. 이규동은 1958년 이순자가 대학(이화여대)에 입학하자 곧바로 결혼시켰다.    이규동은 1959년 사위 전두환을 친구 박정희 장군(당시 6관구 사령관)에게 소개했다.  박정희는 전두환이 마음에 들었는지 당장 “내 부관 하게”라고 붙잡았다. 그러나 전두환은 “부관 체질이 아니다”며 거절했다.  당시 전두환은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전두환은 195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포트브래그 특수전학교에서 심리전을 배웠다. 이어 1960년 미국 조지아주 포트배닝 보병학교에서 레인저(공수)훈련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전두환은 공수부대(특수전)로 잘 알려졌지만 심리전에도 상당히 전문가다.    전두환의 돌진이 시작됐다.  전두환은 가까운 육사 동기들을 모아 ‘혁명 지지’를 결의했다. 이어 17일 육본(용산)을 찾아가 “육사생도들의 지지 데모를 만들 테니 지원해 달라”며 차량을 지원받아 곧바로 육사(태릉)로 달려갔다.  육사 간부 장교들을 모아놓고 시가행진 계획을 짰다. 이어 강영훈 육사 교장이 시가행진 반대입장을 설명하려 육본에 갔다는 얘기를 듣고 뒤따라 육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박정희를 만나 “강영훈이 가로막는 바람에 생도들이 지지 데모를 못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강영훈은 반대로 “생도들도 반대가 많아 억지로 행진시키면 불상사가 우려된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반대하는 생도도 있었지만 박정희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박정희는 강영훈에게 “혁명을 반대하는 거요”라고 면박을 준 뒤 잡아 가뒀다.     다음 날인 18일 육사생도 800명 전원이 ‘혁명 지지 데모’를 벌였다.  동대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시청광장으로 이어지는 도심 퍼레이드였다. 쿠데타에 궁금해하던 시민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들었다. 장도영 참모총장이 “국가 재건의 새 역사를 만들게 됐다”며 이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대세가 기울어졌다.  같은 날 장면 총리가 은신처(서울 혜화동 수녀원)에서 나와 자진사퇴를 선언했다. 쿠데타군은 원주 1군 사령부에서 이한림 사령관을 체포해 압송했다. 김종필은 “18일은 거사 완결의 날”이라고 표현했다.     전두환은 혁명주체세력도 아니면서 당일 아침부터 현장에 등장해 세력을 규합하고, 마침내 혁명주체 대령들도 실패했던 육사생도 퍼레이드를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다. 쿠데타를 기정사실화한 결정적 공로다. 박정희는 곧바로 전두환을 자신의 비서(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비서관)로 발탁했다.      ━  무장공비 막은 조명탄     전두환의 두 번째 공은 1968년 1·21 사태 당시 대응이다.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전두환 중령은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대대장 발령을 받았다. 30대대(30경비단의 전신)는 청와대를 지키기 위해 청와대 정문 맞은편,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두환은 대대장에 취임하자마자 81㎜ 박격포를 청와대 뒤쪽 북악산을 향해 배치하는 일을 시작했다. 북악산 일대에 간첩이 나타나면 박격포로 조명탄을 쏘아 주위를 대낮처럼 밝혀야 작전을 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부대가 경복궁에 있기 때문에 북악산을 겨냥하자면 박격포가 청와대 쪽을 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청와대를 향해 포를 겨냥한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불경죄로 여겨졌다. 그래서 박격포는 창고에 박혀 있었다.   전두환은 직속상관인 수경사령관을 찾아가 보고했다. 그러나 사령관은 “대통령에게 결례”라며 난색을 표했다. 전두환은 청와대로 직진했다. 박종규 경호실장을 찾아갔다.   “81㎜ 포를 배치해 비상시 조명탄을 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박종규는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줬다. 전두환은 곧바로 박격포 발사훈련에 돌입했다. “상황이 발생하면 1분 이내로 조명탄부터 쏴라”라는 지침을 내렸다. 1·21 사태 때 생포된 무장공비 김신조 모습. 김씨는 이후 반공연사로 활약했다. 중앙포토   전두환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1968년 1월 21일 진짜로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했다.  당시 허술했던 휴전선 일대에서 북한군의 도발이 자주 일어나긴 했지만 청와대를 공격하기 위한 무장공비 침투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북한군 특수부대 장교 31명이 낮에는 산속에 숨어 있고 밤이면 능선을 타고 넘어 마침내 청와대 300m 앞까지 접근했다.  세검정에서 청와대로 넘어오는 길목에 있던 초소에서 경찰의 검문에 걸렸다. 종로경찰서 최규식 서장이 공비 일행을 가로막았다. 공비들은 “방첩대원들인데 부대 복귀 중”이라며 행군을 계속하려 했다. 경찰서장이 증명서를 요구하던 순간 총성이 울렸다. 밤 10시10분.     갑자기 밤하늘이 훤해졌다.  전두환 대대장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30대대 경내에 있었다. 전두환은 지휘관에 임명되면 부대에서 숙식하는 날이 많았다. 즉시 조명탄 발사를 지시했다. 1분 만에 조명탄이 공비들을 향해 날아갔다. 조명탄에 놀란 공비들이 뿔뿔이 흩어져 북한산과 인왕산으로 도망쳤다. 병력이 출동하기도 전에 조명탄이 1차 대응을 대신한 셈이다.  30경비대대까지 출동해 군경 합동 토벌작전을 벌인 결과 28명 사살하고, 2명을 체포했다. 체포된 1명은 무장해제 중 가슴의 수류탄이 터져 폭사했고, 살아남은 1명은 이후 각종 시국강연 단골 연사가 된 김신조다. 못 찾은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간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은 30경비대대를 깜짝 방문했다. 전두환 대대장과 부대원들이 웃통을 벗고 새벽 구보를 하는 모습을 본 대통령은 경비대대 막사와 목욕시설을 새로 지어주었다. 전두환은 그해 10월 국군의날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고, 11월 선두주자로 대령으로 진급했다.      ━  적시타 ‘제3 땅굴’ 발견     전두환이 박정희 대통령의 인정을 받은 세 번째 공은 ‘제3 땅굴’의 발견이다.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1978년 1월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10월 1사단 관할 비무장지대에서 세 번째 땅굴이 발견됐다.   경기도 파주 제3땅굴 발견 당시 모습. 중앙포토 땅굴이 발견된 시점은 박정희 정권에 큰 도움이 된 적시타였다.  땅굴 탐색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4년부터다. 당시 북한 개성 출신 귀순자가 “1972년부터 땅굴을 파는 작업이 대규모로 시작됐다”고 털어놓았다. 땅굴은 비무장지대 지하에 15개 정도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광활한 산악지대 땅속 깊은 곳의 굴을 찾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땅굴은 운 좋게 찾았다.  1974년 11월 경기도 연천 지역 비무장지대에서 수색조 병사가 풀숲에서 증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했다. 대검으로 흙을 파헤치자 불과 50㎝ 아래 땅굴 천장이 드러났다. 첫 번째 땅굴은 규모가 작고 깊지 않았다.     두 번째 땅굴은 1975년 3월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발견됐다.  경비병이 폭발음 소리를 듣고 일대에 45개 시추공을 박아 찾아냈다. 지하 100m 내외 깊이에 폭이 2m에 이르는 대형 땅굴이다.     이후 전군이 땅굴 찾기에 나섰으나 성과가 없다가 경기도 파주 제1사단에서 세 번째 땅굴을 찾은 것이다.  1974년 귀순자가 처음으로 지목했던 지역인데 4년간 찾지 못했다. 전두환은 사단장 부임 이후 시추 현장을 찾아다니며 독려한 끝에 땅굴을 찾아냈다. 운도 따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미국 철수 문제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미국 민주당의 도덕주의자 카터 대통령이 외교안보 관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당시 북한에 비해 국방력이 약했던 남한으로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1975년 베트남 공산화에 고무된 김일성이 “(지금 전쟁을 하면)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을 것은 조국 통일”이라며 소련·중국을 향해 6·25 당시와 같은 후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불과 44㎞ 떨어진 파주에서 1시간에 1만 명을 침투시킬 수 있는 대형 땅굴이 발견됐으니 호재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국내에 반공 여론을 환기하는 한편 미국에 대해서도 ‘미군 철수 불가’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북한의 무력증강에 대한 우려가 막 높아지던 시점이었다. 결국 주한미군 철수는 1979년 한·미 정상회담을 거치면서 흐지부지됐다.    전두환 사단장은 땅굴 발견 공을 인정받아 5·16 민족상을 받고, 사단장 부임 1년 만에 보안사령관으로 영전했다. 양아들이란 세간의 표현이 전혀 지나치지 않았다.   ■ 🔎 등장인물 「 ◆강영훈=1921년 평북 창성 출신. 1941년 만주국 건국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입대. 해방 후 귀국해 1946년 군사영어학교 입학. 5·16 당시 육사교장으로 생도들의 지지 데모에 반대해 수감됐다가 중장 예편. 이후 미국 유학. 신군부 등장 후 외교관으로 발탁. 6공 출범 이후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역임. 2016년 사망.   ◆김신조=1942년 함경북도 청진 출신.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로 침투했다가 투항. 이후 반공연사로 활동하면서 목사 안수 받아 목회활동을 벌이다 은퇴.     ◆김종필=1926년 충남 부여 출신. 육사 8기로 5·16의 주역. 박정희 정권 아래서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 등 2인자로 활동. 이후에도 3당 합당에 참여해 김영삼 정권 탄생에 기여하고, 김대중과 연합해 공동정권 창출하는 등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의 주역. 2018년 사망.   ◆매그루더=카터 보위 매그루더. 190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미국인. 미국 육사 졸업 후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유럽에서 주로 근무. 1959년 유엔군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서울에 부임. 5·16에 반대해 쿠데타군 진압을 시도했으나 한국군 병력 동원에 실패. 1961년 전역. 1988년 사망.   ◆박종규=1930년 경남 창원 출신. 1947년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하사관 복무 중 육군종합학교에 입학해 소위 임관. 5·16 당시 박정희 경호 담당.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근무하면서 전두환과 군내 사조직 하나회 후원 담당. 1974년 영부인 육영수 피격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 이후 국회의원을 지내고 5공 출범 후 IOC위원 역임. 1985년 사망.   ◆윤보선=1897년 충남 천안 출신. 일제시대에 영국 에든버러대학교 유학. 해방 후 한민당(민주당 전신) 창당발기위원으로 참여. 4·19 직후 의원내각제 체제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실권 없는 대통령을 맡았다. 곧바로 5·16으로 물러난 이후 박정희 정권 아래서 재야활동. 1990년 사망.   ◆이규동=1911년 경북 고령 출신. 일제하 만주로 이주해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 만주국 육군 복무. 해방 후 육사 2기 졸업 후 육군 경리감 역임 후 준장 예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 대한노인회장 역임. 2001년 사망.   ◆이한림=1921년 함경남도 안변 출신. 일제하 군복무 경력이 박정희와 똑같은 라이벌. 만주군 육사 졸업 후 우수학생으로 일본 육사 진학 이후 만주군 장교로 복무. 해방 직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박정희(육사 2기)보다 한국군 내 출발은 앞섰다. 5·16에 반대해 중장 예편 후 미국 유학. 박정희와 화해 후 건설부 장관 역임. 2012년 사망.   ◆장도영=1923년 평북 용천 출신. 일제하 학도병으로 중국에서 복무.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졸업. 6·25 전쟁 당시 육본 정보국장으로 휘하에 있던 문관 박정희를 소령으로 복귀시켜줬다.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박정희의 추대로 내각수반을 지냈으나 한 달 만에 반혁명세력으로 숙청됐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 학자로 변신. 2012년 사망.   ◆장면=1899년 서울 출신. 1925년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가톨릭 교육자로 활동.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투신. 민주당 중진으로 활동하다가 4·19 직후 내각제가 도입되면서 실권자인 국무총리로 집권에 성공. 그러나 5·16으로 자진사퇴했으나 반쿠데타 사건 배후로 지목돼 복역. 1966년 사망.   ◆카터=1924년 미국 조지아 출신. 지미 카터. 민주당 출신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재직. 이상주의 도덕주의 정치를 강조하며 한국 내 미군 철수와 인권 상황 개선을 강조하는 바람에 박정희 정권과 시종 갈등을 겪음. 퇴임 후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             」 

    2024.03.18 15:37

  • [오병상의 라이프톡] “공천 그림 그리는 분”

    국민의힘 이혜훈 후보 국민의힘 이혜훈 후보가 천기를 누설했다. 서울 중·성동을 후보로 공천된 이 후보는 13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갑자기 출마하게 된 사정을 설명했다.   “갑자기 공천 그림을 그린다고 알려진 분이 불러서 ‘우리 후보가 사퇴했으니 당을 위해서 나오라’고 했다.”   통상 정치판에서 ‘공천 그림 그리는 분’이란, 공천 과정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숨은 실력자’란 의미다. 아무리 조심스러운 표현이라고 해도 이런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천기누설에 해당한다.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모두 공천과 관련해선 ‘국민의 눈높이’ ‘민심’ ‘객관’ ‘공정’ 등 온갖 좋은 말로 포장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실 공천 과정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현실은 ‘하향식 공천’이기 때문이다. 지도부의 의지에 따라 공천 물갈이가 이뤄진다. 공천관리위원회가 ‘시스템 공천’한다고 말하지만 복잡한 절차 속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   그런데 공천은 ‘상향식 공천’이어야 맞다. 실력자가 내리꽂는 공천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추켜세우는 공천이 진짜 민주주의다.   정당들도 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반민주적 ‘하향식 공천’을 하지 않는 듯 보이기 위해 ‘시스템 공천’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시스템이니까 사람이 간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 ‘그림 그리는 분’을 인정하면 절대 안 된다.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은 늘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유권자들은 다 안다. 이혜훈이 누설한 천기가 사실은, 몰라서 비밀이 아니라, 부끄러워서 비밀이라는 것을.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3.15 00:22

  • 전두환 “군인은 멸사돌진”…김재규 체포 때도 그랬다 유료 전용

      「 궁정동의 총소리  」 「 2회. 전두환의 돌진 ‘김재규 체포’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중 앞에 처음 나타난 장면. 1979년 10월 28일 전두환 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국방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노재현 국방장관은 1979년 10월 26일 밤 11시40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암살범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았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유선전화로 이리저리 수소문해야 했다. 그런데 전두환은 이미 이상사태를 감지하고 국방부 맞은편 육군본부(현재 전쟁기념관 자리)에 와 있었다. 육본 보안부대장실에 임시 지휘소를 설치해 연락 거점으로 삼았다. 곧바로 장관실로 달려갔다.   노재현은 전두환을 복도에서 만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각하를 시해한 사람이 김재규인 것 같다. 정승화 총장에게 지시해 놓았으니 지침을 받아 김재규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파격 인사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히든 카드(Hidden Card)’나 마찬가지다. 박정희는 1979년 3월 5일 전두환 소장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여러 면에서 파격적인 인사였다.   보안사령관은 중장급 보직이라 소장급과 맞지 않는다. 더욱이 전두환은 사단장으로 임명된 지 1년밖에 안 됐다. 사단장 임기는 2년이다.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박정희는 과감하게 전두환을 발탁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 취임하자마자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부대 정화’ 작업이다. 인사청탁이나 이권개입 논란이 있던 요원들을 무더기로 잘라 전방부대로 보냈다. 대신 자신이 믿을 만한 엘리트 후배들을 불러모았다. 대표적인 예가 허화평 대령이다. 육사 17기 출신 하나회 핵심 멤버.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지만 당시까지 같이 근무한 적은 없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이 되자 허화평에게 연락해 “같이 일하자”며 불렀다. 이후 허화평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사실상 신군부 집권의 설계자 역할을 했다. 그래서 흔히 5·16 쿠데타를 육사 8기(김종필 등)가 했다고 볼 수 있다면, 12·12 쿠데타는 육사 17기(허화평 등)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둘째는 정보 업무의 강화다. 보안사는 전두환 사령관 취임 직전 말썽 많은 대민 정보업무 기능을 폐지당했다. 김재규 정보부장이 전방부대 대대장 월북사건을 수사하던 중 보안사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 기능을 폐지한 것이다.   전두환은 불과 두 달 만에 그 기능을 부활시켰다. 보안사의 정보 기능는 대개 민관 고위직들에 대한 정보 수집이었다. 덕분에 전두환은 10·26 전후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셋째는 유사시 보안사령관의 합동수사본부장 겸직이다. 전두환은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보안사령부의 역할 강화 방안을 찾으라고 허화평에게 지시했다. 합동수사본부장은 유사시 각군은 물론 검찰과 경찰, 중앙정보부까지 장악해 지휘 할 수 있는 자리다.   이 같은 권한은 사실상 중앙정보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숨지기 몇 달 전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보고를 받고 그에게 권한을 몰아주었다.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권력다툼을 벌이는 상황에서 박정희는 최후의 안전장치로 전두환이란 ‘히든 카드’를 심어놓았던 셈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10월 27일 새벽 3시 박정희 시신이 모셔진 청와대 소회의실을 찾아가 다짐했다. 반드시 범인을 처벌하겠다고. 이는 박정희가 남긴 마지막 ‘임무’인 동시에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운명’이라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가운데)이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 재판을 받기 위해 압송되고 있다. 중앙포토    ━  전두환의 ‘멸사돌진’       전두환이 육사 생도 시절부터 스스로 다짐했던 군인정신을 표현한 말이 ‘멸사돌진(滅死突進)’이다. 알려진 고사성어가 아니다. 전두환 본인이 만든 표현으로, 풀이하자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침없이 나아간다’는 의미다. 전두환 스타일이 느껴진다.    10월 26일 밤 노재현 장관으로부터 김재규 체포명령을 받은 전두환은 돌진을 시작했다. 정승화 참모총장을 만나러 육본 지하벙커로 찾아갔다. 정승화는 김진기 육본 헌병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승화는 두 사람에게 “신병 확보”를 지시하면서 전두환에게 “(김재규를) 정동 안가로 모셔라”고 덧붙였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정승화의 지시는 노재현의 지시와 달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노재현의 지시는 ‘체포하라’는 뉘앙스였는데, 정승화의 지시는 ‘모셔라’였으니까. 더욱이 정승화가 지정한 ‘정동 안가’는 범죄자를 수사하는 곳이 아니라 보안사령관이 서울시내에서 조용히 사람을 만나는 의전용 공간이다.    아무튼 전두환은 미리 육본으로 불러 대기시켜 놓았던 보안사 요원 중 베테랑 군사정보과장 오일랑 중령에게 신병 확보를 지시했다. 오일랑은 헌병 옷으로 위장하고 김진기 헌병감과 함께 체포에 나섰다.     먼저 중무장한 김재규 경호원을 빼돌려야 했다. 김진기가 김재규를 연행할 비상통로에 헌병을 미리 배치했다. 김진기가 자신을 ‘정승화 총장 비서실장’이라며 “총장이 조용히 만나자고 한다”고 하자 김재규는 의심 없이 따라 나섰다. 김재규 수행원들이 따라오는 것은 배치된 헌병들이 차단했다.     오일랑이 대기해 둔 승용차에 김재규를 밀어넣는 동시에 옆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반대편엔 헌병이 미리 타고 있었다. 노련한 오일랑은 “무장해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김재규 허리춤의 권총을 낚아챘다. 별 저항이 없었다.     27일 새벽 0시20분쯤 차가 삼각지를 돌아 서울역 쪽으로 향하자 김재규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너희들 헌병 아니지”라고 물었다. 오일랑은 “총장 지시에 따라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갑자기 “이젠 세상이 달라졌어. 각하는 돌아가셨어”라며 위세를 과시했다.     정동 안가에서 김재규를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김재규를 2층 응접실로 안내하고 정중하게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는 “세상이 바뀌었다”고 반복해 강조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잡혀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내 부하들이 쳐들어올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동 보안사 안가에서 불과 30m 정도 떨어진 곳에 중앙정보부 안가가 있었다. 황당하게도 용산에서 김재규를 태우고 오던 차의 운전사는 정보부 안가를 보안사 안가로 착각하고 들어가려 했다.  김재규가 “우리 분실이구나”라고 반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오일랑이 차를 돌리게 해 보안사 분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보안사에는 실병력이 거의 없었다. 정보부에서 쳐들어오면 김재규를 지키기 힘들다.     허화평이 새벽 1시30분 전두환에게 전화했다.  “김재규가 범인이 틀림없습니다. 서빙고로 옮겨 조사해야 합니다.”   전두환은 곧바로 정승화 총장을 찾아갔다. “김재규가 시해범이 틀림없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구속수사하겠다”고 보고했다. 김재규를 보안사 소속 서빙고 수사분실로 옮겨 본격적인 취조에 들어가겠다는 얘기다.        ━  긴급보고 “정승화도 궁정동 있었다”     1979년 2월 용산 육군본부 광장에서 열린 육군참모총장 이취임식. 왼쪽부터 이임하는 이세호 육참총장, 노재현 국방장관, 정승화 신임 육군참모총장. 중앙포토   서빙고에서 김재규를 기다리고 있었던 인물은 이학봉 중령이었다. 베테랑 수사관 이학봉은 부마사태(부산·마산 지역 민주화 시위)로 부산에 내려가 있다가 이날 밤 전두환의 긴급소환에 군용기를 타고 막 돌아왔다.     김재규는 보안사령관 출신인지라 이학봉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이학봉은 나서지 않고 부하 수사관이 취조를 맡았다. 시급하게 알아내야 할 사항은 단독범행 여부였다.  초미의 관심사는 ‘병력 동원’ 여부다. 김재규 지지 병력이 서울로 진군하고 있다면 당장 대항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관심사는 ‘미국과 사전협의’ 여부다. 정상적으로 병력을 동원하려면 미군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수사관이 정색하고 반말을 하면서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김재규는 의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만성 간질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김재규의 눈두덩이가 순식간에 부었다. 허세가 사라졌다. 2시간 만에 취조가 일단락됐다. 결론은 단독범행.   그런데 김재규는 조사 과정에서 예상 외의 진술을 했다. 새벽 4시10분쯤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정승화 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었다는 긴급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자 갑자기 김재규가 박수를 치면서 “정승화 총장이 궁정동 안가에 같이 있었고, 같은 차를 타고 육본으로 이동했다”고 자랑했다.     만약 정승화가 공범이라면 전두환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전두환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새벽 5시 정승화에게 수사 진행상황을 보고하면서 정승화 부분은 언급하지 않았다. 정승화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아침 7시 다시 보고하는 자리에서 전두환은 “김재규가 정승화 총장과 관련해 진술했다”며 내용을 보고했다. 정승화는 여전히 언급을 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이때부터 정승화 총장에 대한 의심의 싹이 움트게 됐다”고 말했다. 12·12는 일찌감치 예고돼 있었다.   10월 28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전국에 생중계된 TV에 등장했다. 중간수사 발표. 정승화 관련 부분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날 국민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전두환 합수본부장 자신이었다. 시원한 대머리와 날카롭고 충혈된 눈, 꼭 다문 입술, 그리고 느리고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까지. 삽시간에 ‘박정희 양아들’이란 소문이 돌았다.   ■ 🔎 등장인물 「 ◆김재규=1924년 경북 선산 출신. 육사 2기. 1973년 육군 중장 예편. 건설부 장관·국회의원(유정회) 역임. 1976년 중앙정보부장 취임. 1979년 10·26 사건의 주범으로 박정희·차지철 암살. 1980년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   ◆김진기=1932년 평북 후창 출신. 육사 9기. 육군본부 헌병감(준장). 정승화 참모총장 시절 헌병감으로 김재규 체포. 12·12 당시엔 신군부에 끝까지 반대하고 1980년 예편. 김영삼 정부에서 한국토지공사 이사장 역임. 2006년 사망.   ◆노재현=1926년 경남 마산 출신. 육사 3기. 1972년 육군참모총장. 1977년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 1979년 12·12 당시 잠적했다가 뒤늦게 나타나 신군부를 지지. 이틀 후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한국비료공업협회장 등 지냄. 2019년 사망.   ◆오일랑=1938년 일본 오사카 출생. 갑종간부로 1961년 소위 임관. 예비역 준장. 보안사 군사정보과장, 기조실장, 경호실 안전처장, 한국토지개발공사 감사 역임.     ◆이학봉=1938년 부산 출신. 육사 18기. 보안사 대공처장. 합수부 수사단장. 1980년 준장 예편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안기부 차장, 민정당 국회의원 역임. 2014년 사망.   ◆전두환=1931년 경남 합천 출신. 육사 11기. 1961년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비서관.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 10·26 사건 합동수사본부장. 12·12로 군권을 장악하고 1980년 8월 대통령에 취임.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로 기소돼 사형 선고. 1997년 사면. 2021년 사망.   ◆차지철=1934년 경기도 이천 출신. 1954년 육군 갑종간부로 소위 임관. 5·16에 가담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부관을 지내고 중령 전역한 다음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 1974년 경호실장. 10·26 당시 김재규에게 암살당함.   ◆정승화=1929년 충북 영동 출신. 육사 5기. 10·26 당시 육군참모총장. 12·12로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군사법정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유죄 선고받고 복역 중 1년 만에 사면복권. 1987년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입당. 대한성우회 회장. 2002년 사망.   ◆허화평=1937년 포항 출신. 육사 17기. 전두환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준장 예편 후 전두환 대통령 보좌관, 정무수석 역임. 14, 15대 국회의원.  」   ■ 더중앙플러스- 더 많은 정보를 보려면 아래 기사를 클릭하세요. 「 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2757   청와대 향해 조명탄 날렸다…‘박정희 양아들’ 만든 사건 셋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5997    ‘박정희 위험’ 눈치챈 전두환…직보 사흘 전 10·26 터졌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642   가택연금 DJ ‘깜짝 외출’ 뒤엔, 박정희 미워하는 카터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445   」 

    2024.03.11 15:31

  • 김재규는 왜 그날 총을 쐈나…‘박정희 양아들’이 등판했다 유료 전용

      ■ ‘전두환 비사’ 연재를 시작하며 「 ‘전두환 비사’는 중앙일보가 1990년 11월부터 1995년 4월까지 연재했던 기획취재 ‘청와대 비서실’ 시리즈를 현시점에 맞게 재구성한 기획입니다. ‘청와대 비서실’은 과거 3명의 군부 출신 대통령(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기 권력 비사를 두루 발굴취재했는데, ‘전두환 비사’는 가장 뜨거운 논란의 대상인 전두환의 등장과 몰락을 집중 탐구합니다. 지난 30여 년간 미국 국무부 비밀문서 해제 등으로 드러난 미국의 역할과 한계 등은 새로 추가했습니다. 현대사를 정확히 기록한다는 취지에서 팩트 중심의 객관적 글쓰기를 원칙으로 삼으면서도,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썼습니다. 」  「 궁정동의 총소리 」 「 1회. 누가 박정희를 죽였나 」   탕, 탕.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40분 청와대 정문 앞 궁정동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였다. 박정희 철권통치 18년의 마감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화의 출발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79년 10·26 직후 궁정동 안가 만찬장 모습. 십장생 병풍 앞 등받이가 박정희 대통령 자리. 맞은 편 방석 왼쪽이 김재규 정보부장, 오른쪽이 김계원 비서실장 자리. 왼쪽 끝 술병이 놓인 곳이 차지철 자리. 술상 오른쪽 핏자국이 남아 있다. 중앙포토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과 이에 따른 혼돈 상황에서 섣불리 서울의 봄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군부, 흔히 말하는 ‘신군부’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군부의 리더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아들로 통했다. 10·26은 12·12와 5·18로 이어지는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  누가 박정희를 죽였나?      사건 장소는 궁정동 안가(안전가옥)다. 지금은 분수대 옆 무궁화동산 자리. 궁정동 안가는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가 관리하는 비밀 장소다. 술을 좋아하는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들과 저녁 술판을 벌이는 곳이다. 술자리 정규 멤버는 박정희 외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이다. 그리고 대통령의 좌우에 두 명의 여성이 추가된다. 그때마다 달라야 했다. 이 날의 경우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었다. 사건 직전 심수봉은 ‘그때 그 사람’을 불렀다.   범인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다. 김재규는 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차지철 경호실장을 먼저 쏘아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혔다. 이를 본 박정희 대통령이 “뭐하는 짓이야”라고 소리 지르자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쐈다. 폐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은 박정희는 술상 위에 고꾸라졌다. 심수봉이 부축하며 “각하 괜찮으십니까”라고 묻자 “난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김재규는 권총이 격발 불량으로 고장나자 바깥으로 나가 부하에게 다른 권총을 받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새 화장실로 도망쳤던 차지철이 방 밖으로 도망치려 나오다가 김재규와 마주쳤다. 차지철은 항상 권총을 차고 다녔다. 궁정동 술자리에도 권총을 차고 왔지만 얼마전부터 총을 두고 왔다. 차지철은 사방 탁자를 들고 맞서다가 복부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차지철은 이후 김재규 부하의 확인사살을 받고 절명했다.   김재규는 피를 쏟으면서도 의식이 남아 있던 박정희의 뒷머리를 근접 겨냥해 확인사살했다. 이 때 김재규의 흰색 셔츠에 피가 튀었다. 박정희 시신이 경복궁 옆 국군서울지구병원(현재의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군의관이 바로 알아보지 못한 것은 머리의 총상 때문이었다. 1979년 10·26 당시 박정희 대통령 암살범 김재규 정보부장이 현장검증에서 앞쪽 박정희(대역)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김재규 왼쪽은 김계원. 김재규의 사전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대기 중이던 경호실 직원들을 모두 사살했다. 그 와중에 네 발의 총탄을 맞고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경호원 박상범은 이후 김영삼 정부 경호실장이 됐다.      ━  “형님, 저는 한다면 합니다.”     와중에 김계원 비서실장은 무사했다. 김계원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다음 불발 권총을 바꾸러 나가자 복도로 나가 벽을 붙잡고 떨고 있었다. 확인사살까지 마치고 방을 나온 김재규는 복도의 김계원에게 “형님, 저는 한다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김계원을 같은 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거사 계획을 미리 말했다. 김재규는 이날 오후 5시40분쯤 안가에 도착한 김계원과 함께 대통령을 기다리면서 당시 정국의 핫 이슈였던 ‘부마사태’(부산·마산 지역 민주화 시위) 얘기를 나눴다.  현장을 직접 보고 온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민란”이라고 말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일부 불순분자 소행”이라는 식으로 거짓보고하면서 강경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서 문제라는 주장이었다. 김계원이 “차지철이 문제”라며 동의했다. 그러자 김재규는 “형님, 그 자식 해치워버릴까요”라고 되물었다.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런 얘기를 나눌 정도로 가까웠다. 나이 한 살 차이인 둘은 경북 선산(김재규)과 영주(김계원) 출신으로 사실상 동향이나 마찬가지다. 식민지 시절 일본군에 몸담고 있다가 해방 직후 한국군에 입문해 출세가도를 동반질주했다. 특히 1960년께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 시절 경남 마산에서 회식을 마치고 귀대하던 중 지프가 낭떠러지로 추락해 중상을 입었는데, 당시 육군대학 총장이던 김계원이 업고 올라와 후송한 덕분에 살았다. 이후 김재규는 김계원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깍듯하게 모셨다.    대만 대사를 마치고 귀국한 김계원을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추천한 것도 김재규다. 그래서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거사를 미리 알리고 지원군으로 삼았다. 김재규는 거사를 마치고 궁정동을 떠나면서 김계원에게 “보안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현장 수습하는 뒤처리를 맡겼다.    이후 김계원은 실제로 김재규가 요구한 보안을 지키고자 했다. 박정희의 시신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옮겨 대통령 전용 병실에 안치하면서도 주검의 주인이  ‘대통령’이라고 밝히지 않았다. 이에 더해 궁정동 안가에서부터 동행한 중앙정보부 직원 두 명을 병원에 남겨두고 외부인 접촉을 막게 했다. 또 청와대로 복귀한 김계원은 경호실 직원에게 비상근무령을 내리면서도 이재전 경호실 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 금지”를 지시했다. 비상사태라면서 상황 설명도 하지 않고, 대신 경호실의 손발을 묶어 놓은 셈이다.     김계원은 총리와 장관들에게 비상사태 논의를 위해 청와대로 모여 달라고 연락했다. 최규하 총리가 청와대에 도착하자 김계원은 ‘대통령 유고’ 상황이라고 밝히면서 “김재규가 차지철과 싸우다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라는 애매모호한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최규하를 포함한 장관과 경호실 관계자까지 어느 누구도 김계원을 추궁하지 않았다.     밤 9시쯤 김계원은 용산 육군본부 지하벙커로 간 김재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재규가 “총리와 국무위원을 데리고 이쪽으로 오라”고 연락하자 각료들을 몰고 육본 벙커로 갔다. 김재규는 최규하 총리에게 “대통령 유고다.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을 선포해 달라”고 요구했다. 최규하가 자세한 상황설명을 요구했지만 김재규는 “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밤 11쯤 최규하 총리와 각료들은 긴급 국무회의를 열기 위해 육본 옆 국방부 대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총리는 김재규에게 “직접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김재규는 횡설수설했다. 김재규는 대통령의 유고에 따른 비상계엄을 주장하면서 “유고 사실 자체를 공개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깐깐한 신현확 부총리가 “정확한 사정을 알아야 국무회의 의결을 할 수 있고, 국민도 설득할 수 있다”며 추궁했다. 다른 장관들이 신현확에게 동조했다. 정회가 선포됐다.   김재규의 얼렁뚱땅 밀어붙이기가 벽에 부닥친 셈이다. 김계원은 이를 지켜봤다. 김재규의 거사를 지원하는 세력은 전혀 없음을 확인한 셈이다.    ━  김계원의 변심 “김재규가 시해범”      김계원의 마음이 바뀌었다. 밤 11시40분, 김계원이 슬그머니 회의실을 빠져나와 옆 국방장관 보좌관실로 들어갔다. 보좌관에게 부탁해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참모총장을 조용히 불러오게 했다.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이라고 털어놓은 다음 “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승화 총장은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김재규는 이날 오후 4시 차지철로부터 ‘궁정동 행사 6시’를 통보받자마자 정승화 총장에게 전화해 “궁정동에서 저녁 같이하면서 시국 얘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김재규는 대통령을 암살하는 현장에 정승화를 끌어들인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계엄이 선포될 경우 계엄사령관이 되기에, 차후 권력 장악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김재규는 정승화를 자기 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차기 참모총장으로 정승화를 적극 추천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궁정동 안가엔 독립된 건물 3개 동이 있다.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대통령 술자리에 참석해야 하게 됐다”며, 옆 건물 식당에서 정보부 국내정치담당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먹으며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김재규는 대통령과 술을 마시다 중간에 나와 정승화가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술자리로 돌아가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곧바로 본관으로 돌아와 정승화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궁정동을 떠났다.   정승화는 차 안에서 김재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통령 술자리에 참석 중이라던 김재규가 피 묻은 셔츠 바람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허겁지겁 달려왔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재규는 “큰일났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운전사에게 “남산(중앙정보부)으로 가자”고 지시했다.    정승화가 “각하께 무슨 일 있냐”고 묻자 김재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당했다”는 표현을 했지만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그래서 정승화는 대통령의 유고는 확인했지만 범인은 알 수 없었다.    정승화는 혹시 모를 상황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려면 “남산보다 육본이 낫다”고 주장해 차를 용산(육본)으로 돌렸다. 육본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먼저 주요 군부대 상황을 점검했다. 그리고 전성각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전화해 “청와대를 외곽에서 포위하라”고 지시했다. 경호실에서 병력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은 것이다.   당시와 관련해 정승화가 남긴 진술은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난다. 10·26 직후 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자리에 있을 당시 진술, 12·12로 신군부에 연행된 이후 진술, 그리고 1987년 김영삼(통일민주당) 대통령후보가 고문으로 영입한 이후 정치인이 된 정승화의 발언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보도한 중앙일보 지면(1979년 10월 27일자 1면). 주한미군 비상, 전국에 비상계엄 등 당시 급박했던 상황에 대한 소식도 함께 실렸다. 중앙포토   분명한 것은 정승화가 궁정동 현장에 있었고, 김재규와 같은 차량에 탑승해 육본으로 이동했으며, 육본 도착 이후에도 김재규와 계엄 발령 이후 문제를 협의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들은 이후 신군부의 12·12 쿠데타에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10월 26일 자정이 돼서야 비로소 박정희를 죽인 범인이 김재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제 전두환이 나설 차례다. 관련기사 청와대 향해 조명탄 날렸다…‘박정희 양아들’ 만든 사건 셋 전두환 “군인은 멸사돌진”…김재규 체포 때도 그랬다 JP “전두환 재산 환수해야” 그의 감옥행은 반대한 까닭 (87) “전두환, 끝내 사과 안했다” 서빙고 분실서 JP의 오열 (83)  ■ 🔎 등장인물 「 ◆김계원=1923년 경북 영주 출신. 일제시대 학도병에 징집돼 일본군으로 복무.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 대만 대사. 1978년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10·26 현장에 참석. 1980년 군사법정에서 김재규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 1982년 석방. 1988년 사면복권. 2016년 사망.   ◆김재규=1924년 경북 선산 출신. 육사 2기. 1973년 육군 중장 예편. 건설부 장관·국회의원 역임. 1976년 중앙정보부장 취임. 1979년 10·26 사건의 주범으로 박정희와 차지철 암살. 1980년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   ◆노재현=1926년 경남 마산 출신. 육사 3기. 1972년 육군참모총장. 1977년 국방부 장관, 1979년 12·12 당시 잠적했다가 뒤늦게 나타나 신군부를 지지. 이틀 후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한국비료공업협회장 등 역임. 2019년 사망.   ◆박정희=1917년 경북 구미 출신. 대구사범 졸업 후 교직에 있다가 1940년 만주국 육사를 지원. 일본육사 편입 졸업 후 만주군 장교로 근무. 해방 후 육사 2기로 입대. 1961년 5·16으로 집권. 1979년 10·26으로 암살당할 때까지 18년간 집권.     ◆신현확=1920년 경북 칠곡 출신. 일제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제국정부 공무원으로 근무. 해방 후 상공부 관료로 장관까지 지내고 1973년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계 진출. 경제부총리와 국무총리 역임. 2007년 사망.     ◆전두환=1931년 경남 합천 출신. 육사 11기. 육사 출신 사조직 하나회 리더. 1961년 박정희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비서관.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 취임. 10·26 사건 수사를 총지휘한 합동수사본부장. 12·12로 군권을 장악하고 1980년 대통령 취임. 1995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따라 군사반란·내란죄로 기소돼 사형 선고. 1997년 사면. 2021년 사망.   ◆차지철=1934년 경기도 이천 출신. 1954년 육군 갑종장교 간부후보생으로 소위 임관. 5·16에 가담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부관. 중령 전역 후 공화당 국회의원. 1974년 경호실장 취임. 1979년 10·26 당시 김재규에게 암살당함.   ◆최규하=1919년 강원도 원주 출신. 일제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만주국 공무원으로 근무. 해방 후 외무부·농림부 근무. 1979년 10·26 당시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 거쳐 제10대 대통령 취임. 1980년 8월 신군부 압력으로 대통령직 사임. 2006년 사망.   ◆정승화=1929년 충북 영동 출신. 육사 5기. 10·26 당시 육군참모총장. 12·12로 신군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군사법정에서 ‘내란방조미수죄’로 유죄 선고받고 복역 중 1년 만에 사면복권. 1987년 통일민주당 고문으로 입당. 대한성우회 회장. 2002년 사망.      」 

    2024.03.04 15:34

  • [오병상의 라이프톡] 정치는 ‘증오의 조직화’다

    라이프톡 정치를 정의하는 말은 여러가지다. 7일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대담을 보면서 ‘통치란 실망시키기다 (Governing is disappointing)’란 말이 와닿았다.   핵심은 김건희 여사 명품백 사건이다. 대통령은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고 좀 아쉽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고 말했다. 명품백 사건과 관련 사과를 요구하는 여론이 과반을 훌쩍 넘는다. 당연히 사과발언을 예상했는데, 전혀 없었다.   여권에선 실망감을 드러내기조차 어려워 보인다. 김건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했던 국민의힘 김경율 비상대책위원은 8일 “대통령이 계속 ‘아쉽다’고 했는데 나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겠습니다. 아쉽습니다”라고 답했다. 김경율 처지에선 용기 있는 ‘실망’ 표현이다.   대통령 부부를 지지해온 신평 변호사는 8일 SNS글에서 ‘이 사건은 절대 이대로 지나가지 않을 것 같다’ 며 ‘획기적인, 뼈를 깎는 개선안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대통령을 잘 아는 재야 인사의 충심이 느껴진다. ‘정치는 증오의 조직화(Organization of hatred)’라는 말이 떠오른다. 정치인이 유권자의 호감을 사기는 어렵지만 반감을 얻기는 쉽다. ‘윤석열이 좋아서라기보다 이재명이 싫어서’ 윤석열을 찍은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명품백은 증오를 조직화하는데 활용하기 좋은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2.09 00:17

  • [오병상의 라이프톡]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친’

    라이프톡 ‘넘쳐 넘쳐 흐르는 볼가 강물 위에 / 스텐카 라친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1970년대 통기타 가수 이연실이 불렀던 ‘스텐카 라친’은 러시아 민요다. 스텐카 라친은 17세기 러시아 농민반란 지도자로 볼가강 유역에서 활약했다. 그는 전제군주의 폭정에 저항한 영웅이 되었고, 그를 기리는 마음은 민요가 되었다. 그 영웅서사를 드라마틱하게 장식한 건 페르시아 공주 에피소드다.   ‘돈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 교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스텐카 라친이 페르시아 지역을 공략하던 중 얻게 된 공주와 사랑에 빠져 초심을 잃었다. 그를 따르던 무리(돈코사크)들은 교만한 공주 때문에 굶주리게 됐다며 아우성이다. 결국 스텐카 라친은 공주를 강물에 던진다.   ‘꿈을 깨친 스텐카 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볼가강처럼 도도히 흐르는 멜로디에 비장한 서사는 무거운 여운을 남긴다. 여러모로 불온한지라 군사정권 시절 내내 금지곡이었다.   오래된 금지곡이 떠오른 건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김웅 의원(국민의힘)의 파격 해법 탓이다. 김웅은 24일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김건희 여사가) 사저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해서 잠시 외국에 나가 있겠다랄지 하면 이 국면이 뒤집어진다”고 말했다. 파격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야당의 공작에 시달리다 총선에서 패배한다는 주장이다.   ‘정치를 위해 사랑을 내치라’는 주장은 매정하게 들린다. 그만큼 김건희 리스크가 심각하고, 여당의 사정이 절박하다는 아우성이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1.26 00:20

  • [오병상의 라이프톡] 설마 했던 ‘트럼프 시즌 2’

    라이프톡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올해 11월 대선에서 다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15일 아이오와주 코커스(당원대회)에서 트럼프가 역대급 압승을 거뒀다. 51% 득표로 2위 후보(21%)와 30% 초격차 기록을 세웠다. 트럼프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트럼프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한 바이든 대통령과의 본선 대결에서도 이길 가능성이 높다.   설마했었다. ‘설마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될까’ 했던 건 트럼프의 황당한 범죄행각 때문이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2021년 1월 6일 극우시위대의 국회의사당 습격이다. 의회민주주의를 짓밟는 초유의 사건은 사실상 트럼프의 선동이었다.   이후에도 트럼프는 대선결과에 불복하면서 온갖 협박과 선동을 계속했다. 성추행과 성매매 관련 너저분한 사건도 이어졌다. 트럼프는 91가지 범죄혐의로 4차례 기소됐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발언을 추적해 ‘집권 4년간 3만건의 거짓말을 했다’고 보도했다.   이 정도면 당연히 유권자들이 외면할 줄 알았다. 그런데 트럼프는 모든 비리의혹을 ‘민주당 정권의 정치적 마녀사냥’이라고 되받아쳤다. 객관적 사실이나 정황과  무관하게 트럼프의 선동은 통했다. 트럼프 현상은 미국 정치의 퇴락를 보여준다. 토크빌이 예찬했던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덕’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운 한국은 미국의 정치행태에 민감하다. 한국정치가 트럼프식 포퓰리즘과 거짓선동에 휘둘릴까 무섭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1.19 00:10

  • [오병상의 라이프톡] 노인정치와 세대 갈등

    라이프톡 노인정치(Gerontocracy)란 노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기형적 정치형태다. 과거 공산권 독재자들의 종신 집권을 비판하던 용어다. 최근엔 미국 바이든(81) 대통령과 트럼프(78) 전 대통령의 대권도전을 비판할 때 흔히 사용된다.   노인정치의 문제는 노년층의 기득권이 강화되면서 젊은층의 발언권이 축소되는 세대 간 불균형이다.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역동성을 잃고 퇴행하게 된다.   지난 10일 행정안전부 발표 인구통계에 따르면, 올 4월 총선에서 60대 이상 유권자가 20, 30대 유권자보다 많아졌다. 60대 이상의 높은 투표율까지 감안하면 세대 간 정치불균형이 심각해지게 됐다.   노년층 유권자의 비중이 높아지면 정치권은 당연히 이들을 위한 정책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젊은층은 정치를 불신하고 외면하게 된다. 방치하면 세대갈등이 더 심각해지는 악순환을 초래하게 된다.   유권자의 고령화가 한국형 노인정치를 재촉하고 있다. 인구문제는 ‘정해진 미래’라고 한다. 충분히, 그리고 정확히 예측 가능하다. 하지만 피하지 못한다. 뻔히 알면서도 대책 마련엔 소홀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장기 발전전략보단 선거용 땜질 처방에 매달린다. 4월 총선에서도 여야 정치권은 사투를 벌일 것이다. ‘회색 코뿔소’와 같은 현존 위험인 세대갈등은 요란한 정쟁에 묻힐 것이다.   코뿔소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세대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젊어 본 적 있는 노년층이 청년층을 이해하는 것이, 늙어본 적 없는 청년층이 노년층을 이해하는 것보단 쉽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1.12 00:25

  • [오병상의 라이프톡] 나홀로 볼링…정치 유튜브

    3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가 열린 회의실에 이재명 대표의 자리가 비어있다. 강정현 기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공격한 테러범은 은둔형 외톨이, 유튜브 과몰입자다. 뿌리 깊은, 전형적인 사회 병리현상으로 풀이된다.   이 문제를 분석한 명저가 2000년 출간된 ‘나홀로 볼링’이다.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1950년 이후 미국사회의 변화를 분석했다. 단체 볼링은 줄고 ‘나홀로 볼링’이 늘었다. 공동체 붕괴와 개인주의 확산으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심각해졌다.   학자들은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감소했다고 표현한다. 사회적 자본은 공동체 구성원간의 신뢰와 연대다. 자본(돈)이 있어야 시장이 돌아가듯, 사회적 자본(신뢰)이 있어야 사회가 잘 돌아가고 개인이 행복할 수 있다.   20세기말 시점에서 퍼트남이 지적한 문제의 대표적 원인제공자는 TV였다.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TV를 보는 바람에 공동체 활동이 사라졌다는 지적이다.   현시점에서 TV를 대신한 원인제공자는 유튜브다. 유튜브는 TV보다 맹독성이다. 유튜브는 혼자 몰입해서 보게 되며, 무한대 채널이 무한경쟁하면서 자극적 선택을 강요하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사회적 자본이 사라지면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심해진다. 사회구성원들의 공감대 영역이 줄어들면 그만큼 분열의 공간은 커진다. 극단 정치성향 유튜브는 그 틈을 파고드는 유해가스다. 중독되면 자신도 모르게 망상에 사로잡힌다. 정치적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간주한다.   TV나 유튜브 자체가 악은 아니다. 그 위험성을 인지하고 선용하면 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유튜브를 끊고 골방 밖으로 나서는 것이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4.01.05 01:15

  • [오병상의 라이프톡] 슬픈 이선균

    오병상의 라이프톡 “빨간 모자를 눌러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1990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부르던 가수(김완선)는 폴짝폴짝 토끼 춤으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웃음 뒤, 아무도 모르는 눈물과 같은 페이소스가 대박의 비밀코드다.   연예인은 일반인보다 감정선이 예민해야 한다. 섬세한 감정전달로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해야 하는 업(業)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정의 기복이 크고 흔들리기 쉽다. 더욱이 최근 K 컬처의 부상으로 연예인들이 가진 것도 많아졌다.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 더 커지게 마련이다. 출렁이는 환호에 맡겨진 운명인지라 작은 불운에도 스스로 무력하다고 느끼기 쉽다. 불안은 두려움을 거쳐 공포로 자란다. 공포는 공격성으로 전환되며 막다른 상황에선 스스로를 공격한다.   배우 이선균의 죽음에 피에로가 떠올랐다. 일반인이었다면 주목받지 않았을 것이다. 마약 복용이 확인되더라도 단순 초범인지라 집행유예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월드 스타 반열에 오른 이선균에겐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더욱이 이선균은 시종일관 자신이 피해자임을 호소했다. 유흥업소 종업원의 꼬임에 넘어갔고, 협박에 시달려 3억5000만원을 뜯겼다고 주장했다. 통화내용 등으로 미뤄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그를 유죄로 단정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고인과 유족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2.29 00:12

  • [오병상의 라이프톡] 한동훈 출사표 “맹종한 적 없다”

    오병상의 라이프톡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21일 퇴임하고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을 수락했다. 앞서 19일 국회 도어스테핑에서 던진 출사표에 다시 주목하게 된다.   “누구(에게)도 맹종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한동훈은 ‘윤석열 대통령 아바타’라는 지적에 이렇게 반박했다. 오늘의 윤석열 대통령을 있게 만든 2013년  ‘충성’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윤석열 당시 여주지청장은 국정감사장에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후 윤석열은 실제로 사람(박근혜·문재인)에 충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한동훈의 발언은 맥락상  ‘윤석열에게 맹종한 적 없다’와 같다. 그는 “공직생활을 하면서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한 가지 기준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윤석열이 아니라 ‘공공선’이 그의 판단기준이란 얘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다짐하는 출사표인 셈이다.   김건희 특검법에 대한 답변도 일통한다. 답변의 첫머리는 “법 앞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 국민이 보고 느끼기에도 그래야 한다”였다. 이어 “(김건희 특검법은) 민주당의 총선 선전·선동용이기에 악법”이라고 반대를 분명히 했다.   맥락을 감안하면 뉘앙스가 다르다. 김건희 여사도 법 앞에 예외는 아니다.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한다. 따라서 선거 이후 특검을 할 수도 있다 등등의 해석이 가능하다. 정치판에서 2인자의 숙명은 1인자의 극복이다. 한동훈도 알고 있다. 그의 출사표엔 윤석열로부터의 독립의지가 조심스럽게 담겨 있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2.22 00:30

  • [오병상의 라이프톡] 민심의 바다 위 김건희 리스크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3박5일 일정으로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하기 위해 11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오르며 환송객들에게 손들어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핵관 장제원 의원의 불출마선언,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사퇴로 드높아진 여론의 눈길이 김건희 여사를 향하고 있다. 총선을 앞둔 김건희 리스크에 보수진영까지 경계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최근 김건희 리스크에 불을 지핀 건 명품백 동영상이다. 유투브채널 '서울의소리'가 지난달 공개한 동영상에서 김건희 여사는 친북성향 재미 목사로부터 300만원 짜리 명품백을 받는다. 목사가 '서울의소리'와 짜고 김건희가 좋아하는 명품을 미끼로 몰카촬영했다. 취재윤리상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취재내용(김영란법 위반)이 사라지진 않는다.  동영상은 여러모로 악성이다. 대통령의 부인은 지난해 9월 개인사무실로 친북 목사를 불러 '(남북문제 관련) 같이 일하자'며 명품백을 받았다. 보수진영이 왈칵할만 하다. 김건희 리스크를 계속 뭉개고 갈 수 없는 것은  '김건희 특검법'으로 이어지는 야당의 파상 공세 때문이다. 민주당은 28일 국회에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관련 특검법을 통과시킬 예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특검법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민심이다. 최근 한국갤럽 조사결과 '특검법 거부'를 반대하는 여론이 70%다. 이럴 경우 민주당이 내세우는 '윤석열의 내로남불' 프레임이 맞아 떨어진다. '이재명 민주당대표는 탈탈 털면서 김건희는 감싸고 돈다'는 주장이 민심을 파고들게 된다.   내년 4월 총선에 치명적일 수 있다. 선거의 승패는 프레임에 민감한 스윙보터(중도표)에 달렸기 때문이다. 김건희 리스크가 민심의 바다에 던져졌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2.15 00:18

  • [오병상의 라이프톡] 정치인 한동훈과 프레임 정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6일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열린 국민의힘 정책의원총회에서 '출입국 이민관리청 신설 방안'에 대해 제안설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6일 국민의힘 의원총회장에서 이민청 설립안을 설명했다. 사실상 정치입문 신고식이라니, 타이밍이 좋았다. 이날 인터넷의 화제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의 교통사고였다. 전날밤 귀가 중 유동규 차를 트럭이 추돌했다. 유동규는 "내가 죽으면 극단선택 절대 아니다"고 말했다. 사고나 자살로 위장된 피살 가능성을 경고한 셈이다. 유동규는 지난달 30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사건의 결정적 증언자다. 유동규는 김용이 받은 대장동 일당의 돈은 결국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김용의 법정구속은 이재명 사법리스크의 현실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유동규 교통사고와 김용 유죄선고를 엮으면 영화 '아수라'가 된다. 2016년 개봉된 영화는 노골적으로 성남시장 이재명을 연상하게 만드는 범죄스릴러다. 영화속 악덕시장은 부패경찰을 사주해 결정적 증언자를 처리함으로써 선거법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는다. 아수라가 회자되는 타이밍에 한동훈의 등장은 '범죄자와 검사'라는 프레임을 강화시킨다. 프레임은 유권자의 생각을 지배하는 정치언어의 틀이자, 선거를 좌우하는 정치판의 구도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고 하면 코끼리를 더 생각하게 되듯이, '범죄자와 검사'란 구도가 만들어지면 한동훈은 정의의 사도가 된다. 정치신인 윤석열 검사가 백전노장 이재명을 이긴 데도 이런 프레임이 작동했다. 범죄피의자 이재명이 야당 대표이자 차기 대권주자인 상황에서 이 프레임은 여전히 유효하다. 주인공이 윤석열에서 한동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2.08 00:12

  • [오병상의 라이프톡]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이었던 2014년 7월 울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던 송철호(왼쪽) 전 울산시장의 지지를 호소하며 함께 유세하는 모습. 문재인은 대통령 시절 송철호의 울산시장 당선을 '소원'이라 말했고, 결과적으로 울산시장 선거에 청와대가 개입해 송철호를 당선시킨 선거범죄가 이어졌다. [연합뉴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은 문재인 정권 최악의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정치적 논란을 떠나 명백한 중대범죄이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이 29일 관련자 12명에게 무더기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청와대의 백원우 민정비서관이 징역 2년,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이 징역1년. 주범에 해당되는 송철호 전 울산시장과 황운하 전 울산경찰청장(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 3년형. 선거 범죄는 민주주의 뿌리를 흔들기에 심각하다. 청와대가 범죄의 중심이니 최악이다. 2018년 지방선거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친구 송철호를 당선시키기위해 청와대가 경찰을 동원해 유력 상대후보(김기현 현 국민의힘 대표)를 범죄자로 몰아 떨어트렸다. 유권자의 신성한 주권행사를 방해한 것이다.  유권자 입장에서 더 억울한 것은 범죄자들이 권력을 누리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유죄선고가 나오기까지 5년 넘게 걸렸다. 대통령의 입김 탓에 검찰도, 법원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결과 송철호는 울산시장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현직 경찰로 금뱃지를 단 황운하도 대법원 확정판결 이전에 임기를 무사히 마칠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권력이 너무 큰 탓이다. 대법원장 임명권을 통해 사법부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립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법부를 통한 견제와 정의구현이 지체되는 사이 유권자의 주권과 정의는 실종됐다. 유죄선고가 나오자 대통령 문재인에 대한 수사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잘잘못을 밝혀 대통령의 권력남용에 경종을 울려야한다. 정의가 더이상 지체되어선 안된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2.01 00:26

  • [오병상의 라이프톡] 실패한 쿠데타, 고삐 풀린 AI

    지난 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오픈AI의 개발자 회의에 참석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왼쪽)와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 최대주주다. 올트먼을 쫗아내는 쿠데타를 진압한 것도 사티아 나델라다. 연합뉴스.   지난 한 주 세계가 주목한 빅뉴스는 오픈AI의 실패한 쿠데타다. 오픈AI 이사회가 17일 CEO 샘 올트먼을 전격해고 했지만 5일만에 뒤집어졌다. 이번 사태는 AI의 미래를 예고하기에 의미심장하다. 쿠데타의 뿌리는 AI라는 기술을 보는 상반된 시각이다. AI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극적으로 갈린다. AI가 편리한 수단이기에 적극 개발해야 한다는 낙관론자는 부머(Boomer)라 불린다. 반대로 AI가 인간을 파괴할 수 있기에 신중하게 개발해야 한다는 비관론자는 두머(Doomer)다.  오픈AI 공동창업자 중 사업가 출신 올트먼은 부머, 원천기술을 개발한 과학자 일리야 수츠케버는 두머다. 원래 오픈AI는 2015년 '안전한 AI 개발'을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 단체다. 두머 조직인 셈이다.  AI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적 활용가능성이 높아졌다. 2019년 올트먼이 돈벌이(영리)용 자회사를 만들었다. 부머 조직이다. 올트먼은 지난해 챗GPT를 선보인 이후 더욱 적극적인 상품개발과 사업확대에 나섰다. 올트먼의 행보를 '과속'이라 판단한 수츠케버 등 두머 이사 4명이 부머 이사 2명을 전격해고했다.  급반전의 동력은 영업용 오픈AI 최대주주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에 투자한 마이크로소프트 입장에서 두머의 급브레이크는 영업방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올트먼과 동조 직원을 몽땅 영입, 사실상 오픈AI를 자사 내부조직으로 흡수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두머들은 막강 자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사회가 부머로 물갈이됐다. 두머들이 잡고 있던 고삐가 풀렸다. AI가 실험실을 탈출했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1.24 00:18

  • [오병상의 라이프톡] 토사구팽 윤핵관

    윤석열 정권 창업공신 장제원 의원의 기세등등하던 인수위원회 시절 모습. 차기정부 내각구성이 한창이던 2022년 5월 5일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이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핵관하면 뭐니 뭐니 해도 장제원 의원(부산 사상구)이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권후보가 되기 전부터 집을 찾아가 정치현안을 브리핑했으며, 대선 승리 직후 당선인 비서실장으로 인수위원회를 좌우했으며,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를 내세우고 지탱해온 김장연대 당사자다. 그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위기에 처했다. 토사구팽은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고사성어다. 국민의힘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대통령과 가까운 영남중진의 험지출마'를 요구했다. 창업공신 장제원에게 정치적 자살을 강요한 셈이다. 장제원은 반발했다. 11일 지지자 모임에 이어 14일 올린 교회 간증 영상에서 거듭 거부의사를 밝혔다. 간증의 주제는 '아버지 장성만'이었다. 고 장성만은 목사이자 동서대 설립자로서 민정당 창당발기인으로 정치입문, 1987년 국회부의장까지 지냈다. 장제원으로선 뿌리를 두고 맹서한 셈이다. 그러자 인요한은 15일 "대통령실에서 거침없이 하라는 신호가 왔다"고 밝혔다. 버티는 장제원에게 '어명이요'라고 윽박지르는 듯하다. 토사구팽은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정계은퇴하면서 남긴 탄식으로 유명해졌다. 김재순은 민정계 출신이면서 민주계 수장인 김영삼을 지지해 당선시킨 창업공신이다. 재산공개 과정에서 축소신고 물의가 일자 청와대에서 손절했다. 토사구팽은 2500년전 중국 춘주전국시대 고사에 등장한 이래 동서고금 정치사의 곡절마다 반복돼온 정치판의 상식이다. 세상이 변해도 권력의 속성은 바뀌지 않는다. 권력은 나눠가질 수 없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1.17 00:11

  • [오병상의 라이프톡] 방통위원장은 왜 탄핵당하나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이 9일 오후 국회 로텐더홀에서 자신에 대한 민주당의 탄핵 관련 입장을 발표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 231109   민주당이 9일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을 탄핵하기로 했다.  탄핵은 간단치 않다. 최종심판권을 가진 헌법재판소가 기각할 가능성이 높다. 헌재는 7월 용산참사 관련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을 기각했다. 이동관 탄핵까지 기각될 경우 민주당은 '탄핵 남발'이란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탄핵을 밀어붙이는 것은 그만큼 방통위원장의 역할이 정치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총선을 앞 둔 현시점에선 더더욱 그렇다.  방통위원장은 정쟁의 최전선인 각종 미디어를 쥐락펴락하는 자리다. 현시점 핫이슈는 양대 공영방송 KBS와 MBC 사장 교체. 방통위원회는 KBS 사장을 뽑는 이사회와 MBC 사장을 뽑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구성을 결정한다.  방통위원회는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남영진 KBS이사장을 해임하고, 새 사장으로 박민 문화일보 논설위원을 추천해 7일 국회 인사청문회를 마쳤다. 위원회는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도 해임했으나 가처분소송에서 졌다. 권태선의 버티기로 총선전 MBC사장 교체는 어려워졌지만, 방통위는 소송을 이어갈 계획이다. 이동관이 국회에서 탄핵소추되면 헌재결정이 나오기까지 직무정지 된다. 내년 4월 총선까지 방통위가 사실상 마비된다. 민주당 입장에선 설령 헌재에서 기각되더라도 당장 남는 장사라 판단한 셈이다.  방통위가 행정기관이면서도 독립성을 중시하는 합의제 형식의 위원회로 만들어진 것은 정치적 중립을 담보하기위해서다. 1988년 개신교 거물 강원룡 목사를 방송위원장(방송통신위 전신) 으로 모신 것도 그런 취지의 파격이었다. 그러나 독립성과 합의정신은 그 이후 뒷걸음질만 쳐왔다. 정치 탓이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1.10 00:27

  • [오병상의 라이프톡] 빈대의 돌연변인 '수퍼버그' 되다

      2차 대전 이후 전세계에 파견된 미군들이 빈대와 이를 박멸하기위해 DDT를 많이 사용하였다. 당시만 해도 인체에 해롭다는 사실이 안 알려져 사람 몸에 직접 뿌렸다. 자료사진 현대그룹 창업자 고 정주영 회장이 들려준 독특한 일화는 '빈대 이야기'다.  공사장 막노동하던 젊은 시절 빈대 소굴인 숙소 대신 구내식당 테이블 위에서 잠을 청했다. 한밤중 가려워 보니 빈대가 천장으로 기어올라가 자신의 몸을 겨냥해 떨어졌다. 이를 보고 '빈대도 살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라는 생각에 더욱 분투노력한 결과 성공했다고 한다.  다소 황당하지만 정주영은 '빈대 이야기'에 진심이었다.  '빈대만도 못한 놈'은 그가 구사하는 극강 모멸감의 표현이었다.  빈대가 40년만에 돌아왔다. 프랑스 파리 지하철을 점령한 빈대 뉴스가 황당했는데 어느새 우리나라에 상륙했다.  빈대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기에 인간과 숙명적 생존투쟁을 벌여왔다. 2차 대전 이후 인간은 '기적의 살충제' DDT를 개발해 빈대를 거의 멸종시켰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화학물질은 환경파괴범이었다. 인간에게도 치명적이었다. 1970년대에 대부분 국가에서 사용금지됐다. 이후 수십년간 빈대는 살충제를 견뎌내는 돌연변이를 했다. 외골격 (껍질)을 두껍게 만들어 독성물질의 침투를 최소화하고, 체내로 들어온 독성의 확산을 차단하고, 나아가 해독하는 효소까지 장착했다. 그 사이 인간은 빈대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빈대의 천적 바퀴벌레를 박멸해주고, 지구온난화로 빈대가 좋아하는 기온을 만들었고, 해외관광에 열광하면서 전세계로 빈대를 실어날랐다.  빈대가 DNA를 바꾸는 환골탈태의 분투노력으로 인간과의 생존투쟁에서 승리한 꼴이다. 정주영이 저승에서 '빈대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꾸짖는 듯하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1.03 00:29

  • [오병상의 라이프톡] 아야톨라의 나라· 이란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 시아파 종교지도자가 다스리는 신정국가다. 지난해 9월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친정부 성향의 시위대가 이란의 초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오른쪽 위)와 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아래쪽 좌우)의 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이 연일 이란에 경고하고 있다. 블링컨 국무장관이 24일 유엔 회의석상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개입하지 말라”고 최후통첩성 경고를 날렸다.   미국은 이란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무장세력 모두의 배후라고 판단한다.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물론 요르단의 헤즈볼라와 예멘의 후티 반군까지 모두 이란의 군사적 지원으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동시에 이라크·시리아 등에 주둔한 미군기지도 함께 공격하고 있다.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 시아파 종주국이다. 이란과 이란이 지원하는 시아파 무장세력을 묶어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이라 부른다.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이 규정한 ‘악의 축’이 아니라, 정반대로 미국·이스라엘을 상대로 지하드(성전)를 벌이는 정의세력의 중심이란 뜻이다. 이란은 이들 무장세력을 전쟁대리인(Proxy)으로 내세워 중동지역의 패권을 장악해왔다. 따라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확전여부는 이란의 의지에 좌우될 수 있다.   이란은 종교지도자 아야톨라가 다스리는 신정국가다. 1979년 팔래비 왕조를 무너트린 혁명지도자가 아야톨라 호메이니며, 그의 후계자인 현재 최고지도자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84)다. 아야톨라는 무슬림이 따라야하는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지고 신의 뜻에 따라 현세를 지배하는 절대권력자다. 미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야톨라 하메네이는 25일 “미국은 이스라엘과 공범”이라고 비난했다. 아무래도 미국은 두 곳(우크라이나·이스라엘)에서 동시전쟁을 치러야할 듯하다. 오병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3.10.27 0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