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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부실 대응에 "눈 부릅뜨고 볼뿐"…檢 '합수본' 못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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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시민들이 이태원 참사 약 4시간 전부터 압사 위험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한 ‘112 신고’ 내용이 공개되면서 경찰의 형사 책임 여부가 쟁점으로 부상했다. 특히 사고 현장인 골목길 진입을 통제하거나 일방통행 조치를 해달라는 수차례 신고를 묵살한 데 대해선 직무유기 및 업무상과실치사 혐의 적용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실제 경찰청 특별수사본부는 2일 서울경찰청과 용산경찰서, 용산구청 등 8곳에 대해 희생자 156명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법원의 영장을 받아 압수수색을 벌였다.

2014년 세월호 이후 최대 인명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당시처럼 검경 합동수사본부를 꾸리지 않고 수사 대상이 된 경찰에 자체적으로 수사를 맡긴 걸 두고도 논란이다.

검찰은 지난 9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 시행에 따라 대형참사에 대한 수사개시권이 사라진 직후 참사가 발생한 데 내부적으론 들끓는 분위기다. 하지만 대검찰청은 경찰이 진상 규명 및 책임자 수사를 마치고 사건을 송치할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가운데), 윤희근 경찰청장(왼쪽), 오세훈 서울시장이 1일 각각 이태원 사고와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가운데), 윤희근 경찰청장(왼쪽), 오세훈 서울시장이 1일 각각 이태원 사고와 관련해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법조계 "경찰 지휘부에 법적 책임 물을 수도"

2일 법조계에선 “공개된 112 신고 내용만 보더라도, 용산서 등 현장 경찰이 아닌 경찰 지휘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분출했다. 사고 4시간 전 지난달 29일 오후 6시 34분분터 “사람이 계속 밀려 올라오니까 압사당할 것 같아요…이태원역에서 나오는 인파가 너무 많은 데 통제를 해주세요” 등 심각성을 알리는 신고가 최소 11건 있었다.

경찰은 이 중 4건만 출동하고, 6건 전화상담 후 종결, 1건은 불명확으로 처리했다. 이후에도 “일방통행을 하게 통제해달라”는 같은 내용의 신고가 거듭되는 등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 ‘3년째 이태원파출소에서 근무 중’이라고 밝힌 A씨는 1일 경찰 내부망에 “용산경찰서가 서울경찰청 기동대 경력 지원요청을 했으나 지원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폭로했다.

한 부장검사는 “당시 경찰의 내부 의사결정 상황을 면밀히 봐야겠지만, 신고 내용에 ‘와이키키(골목 모퉁이 주점) 앞에 사람들이 쓰러졌다’는 등 위급성을 인식했는데 출동을 안 했다면 직무유기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A씨의 주장처럼 경찰 지휘부가 용산서로부터 위험 상황 보고 및 경력 투입 요청을 받고서도 이를 묵살한 사실이 입증된다면 직무유기 등으로 형사처벌 될 수 있다.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도 “당시 경찰이 출동해서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었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며 “신고가 들어왔고 사고 위험이 명백하면, 어떻게든 윗선에서 구체적인 대응 지시가 있어야 했다”고 밝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세월호 123정장만 업무상과실치사 유죄…해경 수뇌부 1심 전원 무죄

다만, 법원에서 직무유기죄로 기소되더라도 유죄로 인정되기까진 쉽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한 형사부 부장판사는 “법적으로만 따지면, 신고를 받는다고 100% 출동해야 하는 건 아니다”며 “출동 여부는 경찰의 자율 영역에 속하므로 유죄를 입증하려면 아예 신고전화를 받지 않는 등 의도적인 방임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경찰 수뇌부의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를 입증하는 것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용산경찰서장은 물론 윤희근 경찰청장 등 지휘부가 112 신고 내용 등 사전 보고받고 압사 사고를 객관적으로 예견 가능했는데도 주의의무를 다 하지 않았다는 업무상과실부터 입증돼야 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실제 세월호 참사의 경우 당시 현장에 출동해 승객들에 대한 퇴선 유도 조치를 하지 않는 등 부실한 초기 대응으로 재판에 넘겨진 목포해경 김경일 123 정장만 유일하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징역 3년의 유죄를 확정받았다.

김석균 당시 해경청장 등 지휘부 9명은 참사 6년 뒤 2020년 2월 세월호 특별수사단에 의해 뒤늦게 기소됐지만 지난해 1심에서 전원 무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 재판부는 “당시 123정 등 구조세력과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세월호에 대한 지휘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구조 업무와 관련해 형사 책임을 묻기에는 부족하다”고 봤다.

하지만 국가의 배상 책임은 성립한다는 의견이 많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은 정부·지방자치단체가 재난 및 각종 사고 예방 책임을 지도록 해놨다. 사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경우, 정부(경찰)가 사고 위험을 충분히 인식했는지, 112 신고 이후 대응이 미흡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대형 재난사고 수사 경험이 많은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행정안전부와 용산구청중 누구의 책임이 크냐의 문제일 뿐 국가와 지자체의 손해배상책임은 명확해 보인다”고 밝혔다.

검수완박에 수사권 잃은 ‘검찰’…“눈 부릅뜨고 지켜볼 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0월 31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10월 31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연합뉴스

이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검찰이 수사에 나서지 않는 데 대해 “(검수완박)법 개정으로 검찰이 직접 수사 개시할 수 있는 부분에서 대형참사가 빠졌다”며 “검찰이 경찰의 범죄 자체를 수사할 수는 있지만, 참사의 범위가 넓기에 검찰이 잘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검찰청 관계자도 “참사의 전체적인 원인 규명에 집중해야 할 때이기 때문에 경찰 범죄만 따로 떼서 수사에 들어가진 않을 것”이라며 “지금은 경찰의 자체 조사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뿐”이라고 했다.

재난 사고 등 위험 예방 의무가 있는 경찰이 대형참사 발생 시 수사까지 도맡는 상황은 이미 지난해 4월 검수완박법 국회 논의과정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예세민 당시 대검 기조부장은 4월 26일 법사위 소위에서 “대형참사는 검경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일사불란하고 신속히 실체를 밝혀 책임자를 처벌하고 피해 회복을 해왔지만 대형참사가 제외되면 합수본 방식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 말했었다.

김후곤 전 서울고검장도 이날 페이스북에 “신속한 진상규명을 하고 싶어도 검수완박 때문에 안 되느냐”며 “경찰이 법리에 밝은 검사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면 가능한가. 법을 만든 여의도 정치인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길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검수완박을 주도한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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